늦게 핀 책벌레의 인생 역전기

2025년 9월 9일과 과거의 오늘

by 세템브리니
tempImageYpLi3S.heic
tempImageW5h4bG.heic
페이스북 과거의 오늘

온갖 정념과 욕구에 휘둘리던 사춘기를 나는 늦게야 졸업했다. 친구들이 모두 학생으로서의 노력을 수능이라는 제도를 통해 확인받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 답은 내가 스스로 벽을 쌓고 외면해왔던 공부였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지긋지긋한 장애물을 뒤엎을 수 있는 방법은, 공부를 통한 출세밖에 없어 보였다.


삼수 끝에 대학에 들어가 편입을 거쳐 졸업했고, 카투사로 군 복무를 마쳤다. 전역 후에는 방송국에서 프리랜서 번역을 하다가 회사에 들어갔다. 이후 IT, 화학, 제조, 가구, 반도체, 바이오 회사를 거치며 15년 동안 직장생활을 이어왔다. 그렇게 맞이한 두 번째 이십 년은, 첫 번째 이십 년 동안 소홀히 했던 공부에 매진하는 시간이었다. 성인이 된 뒤 나를 알게 된 사람들은, 스무 살 이전의 친구들이 들으면 콧방귀를 낄 만한 별명—책벌레, 모범생—으로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결국 혹독한 사춘기가 내게 남긴 단 하나의 유산은 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며 하루에 세 번 책을 읽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 전에 한 시간, 점심에는 김밥이나 도시락을 먹으며 한 시간, 퇴근 후에는 회사에 남거나 집에 돌아와 자기 전까지 한 시간. 그렇게 시간을 쪼개 책을 읽어야만, 나는 첫 번째 이십 년 동안 비워 두었던 지식, 아니 지식을 담을 수 있는 두뇌를 겨우 사용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책을 읽지 않으면, 늦게 출발한 나는 스스로에게 어떤 기대도 걸 수 없었다.


처음 손에 든 책은 문학이었다. 글을 길게 쳐다본 경험조차 없던 내게 어려운 책은 무리였다. 대신 이야기가 흥미로운 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모는 그런 나를 위해 책을 추천해 주었다. 대한민국 현대사를 저항의 시선으로 그려낸 대하소설들이었다. 이모의 ‘조카 의식화 시키기’ 작전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책장을 넘길수록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이 솟아올랐다.


그렇게 다져진 독서 습관은 문학에서 역사로, 다시 철학으로 이어졌다. 문학은 역사와 떨어질 수 없었고, 역사는 다시 철학과 맞닿아 있었다. 나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알기 전부터 이 세 분야가 서로 얽혀 있음을 체감했다. 책은 호기심을 불러왔고, 호기심은 내 의지를 불태웠으며, 의지는 다시 습관을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직장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자기 계발서나 경영서보다 인문학에 깊이 빠져, 어디서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삶을 살아갔다.


그러다 페이스북을 만났다. 과거 싸이월드 같은 플랫폼도 있었지만, 페이스북은 내 생각을 쓰기에 훨씬 수월했다. 나는 그곳에 내가 읽는 책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을, 어떤 날은 책으로부터 떠오른 단상을, 또 어떤 날은 읽고 난 뒤의 소감을 적었다. 책을 읽다 보면 가슴속에서 쓰고 싶은 말들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생각들을 쉴 새 없이 올렸다. 출근길 지하철에서도, 심지어 화장실 변기 위에서도 글을 썼다. 글을 올리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이십 대 중반부터 쌓인 글들이 하루하루 기록처럼 이어졌다.


보수적인 분위기의 회사에 다닐 때는 SNS에 글을 쓰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시선도 있었다. HR팀 직원이 입이 가볍다는 비난이었다. 어떤 선배는 내 표현 방식을 문제 삼으며, 언젠가 내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 그 말에 고마우면서도 속으로는 ‘너나 잘하세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에서는 더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당신들이면서, 제정신에 글을 올리는 나를 비난하는 게 우습게 느껴졌다. 나는 그런 말들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쉼 없이 SNS에 글을 올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글쓰기의 체계가 잡혀 갔다. 정식으로 글쓰기를 배운 적은 없었지만, 내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이 글쓰기 능력을 끌어올렸다. 몇 년 동안 내 글을 지켜봐 온 동료들은 어느 순간부터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요즘 글이 늘었어.” “네 피드가 재밌어. 계속 올려줘. 네 덕분에 내가 못 읽는 책을 간접적으로 읽고 있어.” 사소한 말이었지만, 그런 격려는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말들이 쌓이면서 글쓰기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그렇게 마흔셋이 되던 해, 나는 다니던 회사에서 임원이 되었다. 회사 역사상 최연소 임원이었고, 나조차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유가 흥미로웠다. 직장생활 내내 단점처럼 지적받던 나의 원칙적이고 직설적이며 분석적이고 솔직한 태도가 오히려 강점으로 평가된 것이다. 사실 그것은 책을 읽는 사람이 감출 수 없는 성향이기도 했다. 특히 인문학을 꾸준히 읽으며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특별한 재능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어쨌든 나는 기뻤다. 그리고 임원이 된 뒤에도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일했고, 오히려 그 일관성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상적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부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회사를 떠났다. 임원으로서 내가 맡아야 할 역할은 다 마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른 누군가가 와도 조직의 흐름은 매끄럽게 이어질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너무 늦기 전에 회사를 쉬고 글쓰기에 전념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동안 늘 시간에 쫓겨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하루 종일 책과 노트북 앞에 앉아 지내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기도 했다.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가 언제 다시 병마에 시달릴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더 늦게 무모한 도전을 했다가 사회로 돌아오기 어려운 나이가 되면 감히 시도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다행히 내 사정을 오래 지켜본 아내가 기꺼이 동의해 주었다. 그렇게 지난 4월, 회사를 그만두고 세상 끝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서부터는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그것이 지금 내 삶을 사로잡는 ‘글쓰기’라는 화두와 이어진 사연이다.


나는 지금도 무턱대고 글을 쓰고 있지만, 어떤 주제로 묶어야 할지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다만 나의 글감은 대개 책에서 떠오르고, 그것들을 페이스북에 기록해 온 덕분에 ‘과거의 오늘’에 남겨진 흔적이 매일 새로운 소재가 되어 준다. 화면에 뜬 과거의 글을 읽으면 그때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지금 다시 살아나곤 한다. 그래서 이 브런치북은, 과거의 오늘이 오늘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기 위해 발행한 것이기도 하다. 지난 15년간 쌓아온 사유의 파편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흐름을 만들었는지를 확인하는 경험은 뜻밖에도 내게 큰 자산이 되었다. 가까운 누나는 이제는 내 아카이브가 된 페북이 부럽다고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매일 조금씩 올린 글들이 결국 시간 속에서 나만의 사유의 강을 만든 것이다.


과거의 오늘에서 유난히 나를 사로잡는 테마가 있다. 하나는 작년 이맘때 읽었던 김상봉 교수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에서 얻은 문제의식이고, 또 하나는 2년 전 오늘 읽었던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속 문장 한 줄이다. 핵심은 사건을 전체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이었다. 나는 일 년 전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철학과 인문학은 파편화되려는 삶을 총체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며,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에서 보편성을 발견하게 해 준다고. 그래서 다른 어떤 자극보다 인문학을 통한 지적 자극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장 재미있다고 했다.


이 깨달음은 내가 인문학뿐 아니라 물리학까지 공부하며 얻은 가장 큰 효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일상은 늘 파편적이다. 세분화된 지식은 세상을 환원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그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데서 출발한다. 삶과 세상을 하나의 틀로 묶어 보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상상할 수 있는 힘, 그것이 인문학 읽기의 효과였다. 그 덕분에 세상을 보는 내 시각도 조금은 현명해졌다. 적어도 직장생활 속에서 부딪치며 얻은 좋은 평판과 소중한 관계들이 그 증거일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인문학 읽기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그래서 독서 모임에도 꾸준히 나가고, 책 읽기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책을 권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특히 1년 전 읽은 『도덕 교육의 파시즘』은 나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나는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책을 오랫동안 좋아해 왔다. 그의 세계관과 철학적 통찰은 늘 내 학구열을 자극했다. 심지어는 두 권에 이십만 원에 달하는, 아무도 쉽게 사지 않을 법한 책도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당시 읽던 페이지에는 소크라테스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이 수천 년간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를 묻고 답해온 흔적이 한 줄로 압축되어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고 큰 흐름만 이해한 채 넘어갔지만, 언젠가 한 사람 한 사람 다시 공부하겠다는 다짐을 남겼다. 그리고 오늘, 그 다짐을 이어가려 한다.


아래의 정리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향후 나의 공부를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순서도일 뿐이다. 다만 이 흔적을 설명하며 덧붙이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나처럼 늦게 공부를 시작한 사람도 주저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린 시절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고 해서, 혹은 공부와 인연이 없다고 여겨왔다고 해서, 평생 그 길에서 멀어질 필요는 없다. 나의 경험이 증명하듯 공부는 언제든 새로운 삶의 적성이 될 수 있다.



tempImage9z2eBZ.heic 도덕교육의 파시즘 - 김상봉 저


『도덕 교육의 파시즘』에서 언급된 철학자 정리


소크라테스는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그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라는 말처럼 무지의 자각을 지혜의 출발로 보았고, 대화를 통해 진리에 다가가려 했다. 그에게 덕은 단순한 착한 성품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는 능력이었으며, 지식과 덕을 동일시하여 참된 앎이 있으면 반드시 옳은 행동이 뒤따른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있는 이데아를 통해 진리를 설명했다. 그는 『국가』에서 정의를 논하며, 정의란 사회와 개인이 각자의 역할을 조화롭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이성, 기개, 욕망이 균형을 이룰 때 개인이 정의로우며, 각 계급이 맡은 임무를 다할 때 국가도 정의롭다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였지만 경험과 논리를 중시하며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모든 존재가 고유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보았고,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라고 했다. 여기서 행복이란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이성적 덕을 실천하며 자기 삶을 완성해 가는 상태를 뜻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의 이성적 질서에 따르는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으로 다스리는 상태를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용기와 절제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힘이야말로 참된 자유라고 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삶의 목적이라고 했지만, 그가 말한 쾌락은 방탕이나 욕망의 충족이 아니었다. 그는 고통이 없는 평온한 상태, 즉 아타락시아를 최고의 쾌락으로 정의했다. 욕심을 줄이고 소박하게 살며 불필요한 욕망을 끊어내는 삶이 진정한 즐거움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키케로는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로, 공화정적 덕과 시민적 책임을 중시했다. 그는 『우정에 관하여』에서 친구는 단순히 즐거움의 동반자가 아니라 도덕을 함께 추구하는 동반자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우정은 이익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삶을 고양시키는 가치 그 자체로 이해되었다.


세네카는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였으며, 짧은 생애의 덧없음을 자주 강조했다. 그는 삶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기에 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말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를 충실히 사는 것이 곧 지혜라고 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고백록』에서 인간의 불안정한 마음은 신 안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고백했다. 반면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인간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신 앞에 홀로 서는 단독자가 되어야만 진정한 신앙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신앙을 인간 삶의 근본적인 구원과 해답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스피노자는 네덜란드의 합리주의 철학자로, 인간이 감정에 지배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성을 통해 그 감정을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감정을 억누를 수는 없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면 더 이상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정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로크와 루소는 시민적 덕을 논할 때 자주 함께 언급된다. 로크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정부는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반면 루소는 공동체적 연대와 ‘일반의지’를 강조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진정으로 실현되려면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참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민이 지켜야 할 덕과 책임을 설명했다.


흄과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도덕과 삶을 감정에서 찾았다. 흄은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이유는 이성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 때문이라고 했다. 쇼펜하우어도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를 줄이는 길은 타인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동정심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두 철학자 모두 연민을 인간 도덕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칸트는 근대 철학의 거장으로, 도덕과 정치에서 보편성과 의무를 강조했다. 그는 『영구평화론』에서 각 국가가 전쟁을 멈추고 법과 이성에 기반한 질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인간은 단순히 한 나라의 국민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피히테와 헤겔은 개인과 국가의 관계를 깊이 탐구한 철학자들이다. 피히테는 개인이 국가를 통해 자기 자유를 실현한다고 했으며, 헤겔은 역사와 국가를 인간 정신의 발전 과정으로 이해했다. 그들에게 국민의 도리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스스로를 완성해 가는 과정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비판한 철학자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소외시키고 소수에게만 부를 집중시키며 불평등을 심화시킨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불의하고 부도덕한 체제라고 보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주의적 대안을 제시했다.


니체는 기존의 도덕과 종교가 힘을 잃은 시대를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인간이 더 이상 믿을 수 있는 절대적 가치가 사라진 상황을 질병처럼 진단했으며, 그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인간, 즉 ‘초인’을 제시했다.


후설은 현상학의 창시자로, 과학이 인간 삶을 설명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과학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인간 존재의 의미가 가려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철학이 다시 삶의 근본적인 경험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인간 존재를 죽음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죽음을 단순한 끝이 아니라, 자기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게 하는 계기로 보았다. 또 기술 문명이 인간을 도구화하고 세계를 단순한 자원으로만 보게 만들 위험을 경고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자들로, 파시즘과 전체주의가 어떻게 등장했는지를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그들은 특히 문화 산업이 대중을 조종하고 권력에 순응하게 만든다는 점을 지적하며, 자유로운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인간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 자유는 선택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를 두려움이 아니라 실존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메를로-퐁티는 몸의 철학을 발전시킨 사상가로, 인간은 단순한 정신도 물질도 아닌 ‘살아 있는 몸’으로 세계와 관계한다고 보았다. 그는 몸을 세계와 만나는 통로로 이해하며, 이를 통해 인간 경험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했다.

푸코와 들뢰즈는 욕망을 새롭게 해석한 철학자들이다.


푸코는 권력과 사회 제도가 욕망을 어떻게 규율하는지 탐구했으며, 들뢰즈는 욕망을 결핍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욕망은 단순히 채워야 할 부족함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힘이 된다.


레비나스는 철학의 출발점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그는 타인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윤리적 책임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 존재의 근본은 ‘나’가 아니라 ‘타인과의 만남’ 속에 있다고 보았다.


롤스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정의를 새롭게 정의한 인물이다. 그는 사회적 자원은 공정하게 분배되어야 하며, 불평등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 약자에게 이익이 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분배적 정의’라고 부른다.


하버마스와 아펠은 민주사회에서 대화와 토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합리적 의사소통 속에서만 공동체가 공정한 규범을 세울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진정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투표가 아니라 끊임없는 대화와 합의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부처와 요나스는 생명과 환경 문제에서 만날 수 있다. 부처는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緣起)를 통해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요나스는 현대 기술 사회에서 인간이 미래 세대와 자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 모두 생명과 환경을 도덕적 과제로 제시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철학자로, “언어는 세계의 한계”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곧 사고의 경계를 규정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말은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를 형성하는 힘이다.


- 끝

keyword
작가의 이전글조직문화, 보이지 않는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