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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22. 2021

안 맞는 건 안 맞는 대로 둬.

대인배 그거 꼭 해야 하나요?

 

내가 그의 퇴사 소식을 들은 건 한 달 전쯤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고, 연령대도 비슷했으며, 사내에서 커리어도 엇비슷하게 쌓아온 그와 나는 뭐랄까, 조금 애매한 사이였다. 사무실 내에서 우리 두 사람의 자리는 가까웠지만, 업무적으로는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왔으니까. 


 사내 평판도 좋고, 일도 썩 잘하는 그가 퇴사를 한다는 소식을 처음 전해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생각보다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퇴사 소식을 접하기 한 달 전, 최근 회사에 몰아친 변화에 힘들어하고 미래를 고민하던 우리는 둘이서 그와 관련된 대화를 종종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놀라운 일은 그 이후에 일어났다. 비록 남의 입을 통해 처음 전해 듣긴 했으나, 나는 그로부터 그의 퇴사 소식을 직접 들은 것은 아니었다. 회사에 먼저 소문이 쫙 퍼진 후, 그는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차례로 자신의 퇴사 소식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간 함께 일해왔던 동료들과의 점심 약속을 잡고, 커피를 마시러 나가겠다며 자리를 비우는 일도 부쩍 잦아졌다. 그런 모습들을 보며 나는 내심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나는 비슷한 나이에 비슷한 연차로, 여러 번 같이 일한 적도 있었던 관계였다. 게다가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퇴사가 나비효과처럼 이런저런 연쇄작용을 일으켜 그의 퇴사 이후의 내 업무에도 영향을 끼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나는 더더욱이 평소 본인이 관련된 일이라면 항상 야무지고 깔끔하게 처리해왔던 그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서 내게 뭐라도 한 마디쯤은 직접 건네 올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퇴사하는 날까지도 그로부터 퇴사와 관련된 말 한마디도, 메시지 하나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가 맡았던 업무와 관련하여 인수인계를 받으면서까지도. 그는 자신의 입으로 내게 퇴사를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에도, 내가 그가 퇴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두고 나와 대화를 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 퇴사해요'라는 뻔한 말 한마디조차 없이.


 처음에는 단순히 아직 내 차례가 오지 않았겠거니, 하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 꺼림칙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내가 먼저 '퇴사 얘기 들었어요' 하고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이번에는 일을 먼저 받아서 타이밍이 틀어져서인지 왠지 그러기가 좀 꺼려졌다. 이후로도 그의 퇴사 소식이 사내에 소문이 난 이후 우리는 좀처럼 얽히지 못했는데, 처음에는 그게 우연인 줄로만 알았으나 갈수록 그것이 필연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그의 송별회를 명목으로 만든 저녁 자리에 참석하러 가던 도중, '오늘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분들께는 제가 말씀드렸어요.'라는 메시지를 받은 순간. 처음 그의 퇴사 소식을 들은 이후 그의 행적들을 보며 느꼈던, 내내 내 속에 똬리를 틀듯 자리 잡고 있던 왠지 모를 불편한 기운이 확실한 무엇으로 변했다.


 그것은 바로 벽이었다. 그가 나와 마주하기를 꺼려 친 거대하고 반투명한 벽이 그와 나 사이에 세워져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이 사람 내가 불편하구나.'



 그는 이 회사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동료인 나와 이 문제에 대해서 대화할 의지가 없는 거구나.

 나름대로 동료로서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착각일 뿐이었고. 사실은 우리 사이엔 아마도 이 반투명한 벽처럼 어렴풋이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었나 보다.


 벼락같은 깨달음과 함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상대방이 어지간히 눈치 주는데도, 눈치가 없어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먹고 끝까지 들이대는 인기 없는 찐따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똥강아지처럼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며 언젠가 내게도 말을 해주겠거니, 마지막 인사라도 해주겠거니 잠자코 기다렸던 내 모습이 무척 어리석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이런 기분을 느껴보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무척 당황스럽기도 했다. 학창 시절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한 반으로 묶여 늘 서로 붙어 지내야 했기에 그중의 누군가는 반드시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대학 입학과 함께 그런 상황을 벗어나고 나서는 그래도 요령이 생겨서 그럭저럭 남에게 쉽게 배척되거나 배제되지는 않는 삶을 살아왔다. 즉, 성인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는 이런 느낌을 느껴본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는 이야기다.

 

 가뜩이나 회사 생활이 전환점을 맞이하며 더욱 힘든 길로 접어들려는 찰나였는데, 이런 일이 생기니 자꾸만 나도 모르게 땅을 파게 됐다. 비록 우리가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었어도 적어도 이렇게 끝이 어색할 줄은 몰랐는데... 와, 나 진짜 별론가봐. 내가 그렇게 별론가.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회사 또라이'가 바로 나였나? 내가 그에게 했던 모든 행동들을 되짚어보며 내가 그에게 혹시라도 미움 살 만한 행동을 했던 게 아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딱히 뭔가가 명확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퇴사 소식이 들려오기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둘이 같이 밥도 먹었었는데. 대체 왜일까...표면적으로는 그가 나를 드러내 놓고 배척하지 않았기에 이게 그냥 단순히 내 자의식 과잉으로 인한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잊고 털어보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 <인셉션>의 토템 팽이처럼 내 무의식 안쪽 깊숙한 곳에서 돌기 시작한 팽이는 좀처럼 그 회전을 멈추지 않았다.


  근데 이게 어디 가서 털어놓기엔 또 어쩐지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은 부끄러운 얘기인지라('네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별로면 그러겠어'라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혼자서 며칠을 끙끙대다 결국 친한 언니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털어놓았다.



"언니, 우리 회사에 퇴사하는 사람이 저한테만 인사를 안 해요. 저 빼고 다른 사람하고는 다 하는데. 저하고는 이야기할 자리가 생겨도 피하는 것 같아요."



어느새 사회생활 연차가 10년 차가 훌쩍 넘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사회인인 언니는 그런 내 고민을 듣자마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이럴 때일수록 그냥 네가 대인배 해. 그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고, 그동안 수고했다 고마웠다고 말 한마디라도 건네주고. 퇴사 선물도 좀 챙겨주고 그래라. 그럼 네가 더 큰 사람 되는 거야."



 '세상 의외로 좁아서 10년 내에 어디선가 반드시 만난다'는 언니의 지혜로운 조언을 듣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라며 쇼핑백에 담긴 선물을 웃으며 건네는 내 모습을. 근데 그 모습을 떠올린 순간 느낀 것은 '유레카! 바로 이거야!' 하는, 갑갑한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오히려 눈물이 핑 도는 것 같았다. 서러워서.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내게 상처를 주는 사람에게 일부러 더 베풀고 나서 '와 나 대인배가 됐다, 내가 더 큰 사람이 됐다' 그런 뿌듯함을 느끼기엔 나는 아직 너무 애인 것 같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를 계속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니 이런 답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나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게 싫어.
 가능한 한 좋은 사람으로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한 번이라도 얽혔던 존재가 나를 별로인 사람으로 기억하는 게 속상해서 이러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마침내 여기에 이르자, 갑자기 중요한 뭔가를 자각한 것처럼 머릿속이 오히려 맑아졌다.


 아니, 이 세상에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어? 유재석도, 김연아에게도 트집 잡는 안티들은 있을 텐데. 심지어 인간이 아닌 신들도 세상 사람들한테 호불호가 갈리잖아. 내가 뭐라고.


 애초에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수는 없는 건데, 나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알고 나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들은 나를 좋아해야 한다고. 아니 좋아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나를 싫어하진 않았으면 한다고.





 "언니, 전 대인배 안 할래요. 못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뭔가 마음이 후련한 듯하면서도 콕콕 찔렸고 그러면서도 후련했다.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애초에 그런 게 됐다면 내가 내가 아니었겠지?



 "나중에 누가 제 위인전 안 내줄 거잖아요."



 난 그 정도로 위대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하고 찌질한 나니까, 그냥 대인배 안 하고 말지 뭐. 그러자 언니는 아무렴 네 속이 편한 게 제일이라며 시원시원하게 이렇게 대꾸해왔다.



 "그럼. 훌륭하게 살 필요 없어~"



 언니의 말에서 나는 예전에 JTBC <한끼줍쇼>에서 봤던 이효리의 명언을 떠올렸다. '뭘 훌륭한 사람이 되려 하냐고, 그냥 아무나 돼'라던 그 말 말이다.




 그래 진짜 내가 뭐라고. 난 '아무나'니까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도 있고, 불편해할 수도 있다. 평소에 내가 너무 특별하다는 생각에 이걸 잠시 잊고 살았을 뿐이지. 거참 나 스스로 호불호 갈리는 스타일인 거 잘 알면서도 내 일인지라 가끔 망각한다.


 어찌 보면 이렇게 그것을 받아들이고 누군가 나를 불편해하는 것을 견디는 것도 어른이 되는 과정인 것 같다. 이렇게 나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뿐이다.


 그러니 결심했다. 안 맞는 건 안 맞는 대로 두기로. 적어도 되도 않는 대인배 흉내 내면서 내가 나를 가스 라이팅 하진 말자. 뭐든지 내 마음 편한 게 제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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