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7일 ~ 3월 11일
1. 낭만의 시대 (1)
어제 오랜만에 예전에 썼던 팬픽 공책을 다시 찾아 보았다.
살면서 가장 최초로 팬픽을 써서 완결을 냈던 건 아마도 중 1 때였던 것 같다.
당시 나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줄노트 위에 색색깔의 볼펜으로 한줄한줄 꾹꾹 눌러 쓰곤 했다.
그렇게 쓴 팬픽 노트는 학교에 와서 친구들에게 돌려 보여줬는데, 친구들은 그것을 읽고 맨 뒷장에 감상평을 남겨주었다.
무려 20년 전에 썼던 글에 대한 친구들의 감상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막상 한번 읽어보니 그렇게 나쁜 일만도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감상은 이거다.
'이거 꼭 인터넷에 올려.'
그 친구는 내가 이렇게 20년 뒤에도 그때랑 비슷한 수준의 소설을 써서 인터넷에 올린다는 걸 알까?
어쩌면 지금 내 소설을 읽는 건, 20년 전 친구들 의 나이와 동갑이 된 그들의 자식들일지도 모른다.
다들 어른이 되었는데, 나만 그 때 모습 그대로 멈춰있는 것 같다.
2. 낭만의 시대 (2)
공책에 펜으로 팬픽을 쓰던 나는 오빠의 쓰던 컴퓨터를 물려받으면서 비로소 타이핑의 세계로 들어왔다.
그러나 내 컴퓨터는 모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았고, 나는 항상 집에 있는 한글과 컴퓨터 프로그램에 소설을 써서 플로피디스크에 저장했다.
그리고는 방과 후마다 집 앞 피씨방에 가서 디스크를 꽂고, 써간 소설들을 팬페이지 소설 게시판에 복붙해 올렸다.
당시에는 인터넷 게시판 초기 시대라, '코멘트' 즉 덧글 기능이 없었다. 때문에 내 소설에 대한 감상은 주로 감상게시판이라는 별도의 게시판에 새 글 형식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렇게 올라오는 모든 감상 글들에 정성스레 답글을 달곤 했다.
처음에는 소설에 대한 감상을 주고 받던 것이 나중에는 갈수록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나 안부까지 주고 받는 펜팔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다.
스마트폰도, 휴대용 인터넷도 없던 그 시절엔 시도 때도 없이 사이트를 확인하지도 못했다.
하루종일 수업이 끝나길 기다려, 전날에 쓴 소설을 담은 플로피디스크를 들고 PC방으로 뛰어가는 그 시간들.
오직 하루에 단 한번씩만 주어졌던 그 시간들은, 그 나름대로 낭만적이었던 것 같다.
3. 빌어먹을 세상따위
대통령선거 투표를 마치고 동생하고 밥을 먹으러 갔다.
이제 오늘 저녁이면 결과가 나올테지만, 어느 쪽이 되더라도 우린 착잡할 것이었다.
우리는 러시아의 전쟁과 푸틴의 노망 여부에 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문득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몰라, 어차피 우린 다 죽을거야."
우리는 파스타와 스테이크를 가니쉬 하나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는 포근한 미세먼지 속에서 산책하며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마치 <카페 알파>같았다.
4. 매달리는 것은 막막하지만 도움이 된다.
얼마 전에 인터뷰 촬영을 하나 하고 왔다.
2020년에 냈던 클라이밍 에세이 <일단 한번 매달려보겠습니다>와 관련된 인터뷰였다.
신기했다. 솔직히, 이 책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게 오는 연락이나 의뢰는 웬만하면 이 책과 관련된 것이다.
나의 최근작은 돈 이야기었지만, 사람들은 어느새 돈 이야기를 지겨워한다. 세상은 점점 어지러워진다. 친구가 말했다.
"오히려 이 시국에 지금 네가 내세워야 하는 건 그 돈 에세이가 아니라 클라이밍 에세이일지도 몰라."
매달리는 것은 막막하지만, 분명 도움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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