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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04. 2022

[10줄 문학] 무명 소설가의 칸트적인 삶

2022년 5월 30일 ~ 6월 3일

1. 무명 소설가의 칸트적인 삶


<대기업 때려치우고 웹소설>이라는 책을 보다가 공감한 부분이 있다. 바로 일상에 별다른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부분이다.


웹소설을 쓰기 위한 루틴을 지키면서, 주 5일 연재를 해 내는 것은 충분히 벅찬 일이다. 그런데 그 사이에 어떤 예기치 못한 비일상적인 사건이 끼어들면 스트레스로 이어지게 된다.


작가는 본인이 친구가 별로 없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연재 노동자에게는 친구를 만나기 위한 시간을 빼는 것조차 부담스러운 일이다.


한없이 단조로운 일상을 사는 칸트형 생활자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창작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웹소설 작가로서 사교활동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작가들과 공동 작업실을 사용하거나, 트위터 스페이스를 하는 방법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파리의 르 프로코프에 모인 작가들처럼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창작까지 한번에 해결해 버리던가. 그런 살롱이 한국에도 있으려나?




2. 정신 승리


나의 창작의 동기는 대부분 열등감이었다. 나는 뭔가가 자발적으로 쓰고 싶었다기보다는, 누군가와 비교하고 그를 질투하고 이기고 싶은 마음으로 창작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불타올라서 쓰더라도, 나중에는 점점 기운이 빠진다. 동기가 내면이 아닌 외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외부의 아무도 반응 없이 나 혼자 악으로 깡으로 써나갈 때가 되어서야 나는 생각한다. 이건 이제 나와의 싸움이라고.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글을 꾸역꾸역 써나간다는 것은 단타로 큰 성공을 거두려다 물려버린 주식을 손절하지 않고 강제 장투하는 것과 비슷하다.


초반부터 내가 바랐던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면 좋았겠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지속 가능한 창작을 위해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정신승리 뿐이다.


이건 내 만족을 위한 것이며,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스탠스를 바꾸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무슨 노벨 문학상을 탈 것도 아니고, 망작이든 뭐든 그냥 완주하는 데 의의를 두자고.





3. 계단


나이든 반려동물을 키우다 보면, 노화라는 것은 계단 식으로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매일 조금씩,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늙지 않는다. 한동안은 현상 유지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상황이 안 좋아진다.


분명히 전날 까지는 가능했던 행동을 오늘부터는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태로 또 한동안이 유지된다.


'꺾인다'는 말을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왜 늙음이 '꺾임'으로 표현되는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나의 새가 이렇게 죽음을 향한 관문을 하나 둘씩 밟아 갈 때마다 나는 새장의 크기를 줄이고, 바닥의 높이를 높인다. 어제는 새장의 절반 높이나 담요를 쌓아서 깔아주어야 했다.


새의 죽음은 '낙조', 즉 새가 떨어진다고 표현한다.


계단식 하락을 맞이하고 있는 그가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바닥에 도달할 수 있을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서 계단을 깔아주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닐까 한다.




4. 다크 홀드


회사에 다닐 때는 내가 이렇게 잘 타는 체질인지 몰랐다.


학원에 왔다갔다 하느라 한낮에 하루 1시간씩 자전거를 타다 보니 몸이 엄청나게 그을리고 있다.

안 타는 건 불가능하고, 기왕 타는 거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민소매를 입거나 반팔을 걷어부친다.


그렇게 나름대로 선방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어느 날 글을 쓰다 시선이 머무른 내 손가락이 거뭇거뭇해져 있는 걸 발견한 것이다.


손가락이 뚫려 있는 자전거 장갑 때문인 듯 했다. 나는 샴고양이처럼 말단만 새까매진 손가락 사진을 찍어서 친구에게 보내줬다.


친구는 사진을 보고 말했다.


"너 무슨 다크 홀드라도 습득한 거니?"


내 타락한 검은 손가락이 들키지 않도록, 당분간은 완다처럼 손을 어지럽게 휘두르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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