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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19. 2022

07. 헤르미온느와 솔로몬의 선택

물리학의 법칙에 도전하라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07. 헤르미온느와 솔로몬의 선택 



「나, 소설 한 번 써보려고.」


 가영이 자신의 결심을 가장 먼저 털어놓은 것은 은수와 인경이 함께 있는 단톡방이었다. 가영에게는 지금 누군가의 정서적 지지가 절실했다.  혹시 이 상황에서 자신이 벌이려는 이 짓이 일종의 미친 짓은 아닌지, 문득 가슴 한 구석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이 의심을 누구라도 좋으니 제거해 줬으면 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M출판사에서 이번에 단편소설 공모전을 한다는데, 주제도 괜찮고 한 번 해 볼만 한 것 같아서!」

「아니 근데 님 지금 괜찮겠어? TF인지 뭔지 때문에 바쁘다며.」

「그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알 게 뭐야. 나도 좀 미친 거 같기는 한데. 근데 이거라도 안 하면 더 미칠 것 같아.」


 이런 상황에서도 평소 가영의 노답 반골 기질이 여지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은수와 인경이 걱정하니까 오히려 더 하고 싶어 지고, 간절해지다니.


 마치 가영 본인이 10년도 더 된 아득한 예전부터 ‘소설가’라는 꿈을 인생의 꿈으로 품어 오기라도 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엿한 사회인인 절친들이 늘어놓는 현실적인 걱정을 들으며 가영은 오히려 어떻게든 공모전에 낼 소설을 쓰고야 말겠다는 제 결심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과정에서 남자친구인 준성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준성은 분명 아버지를 제외하고서는 이 세상에서 가영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터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막말로 가영이 다시 아이돌 팬픽을 쓰겠다는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느덧 루틴이 되어 버린, 퇴근무렵 걸려 온 준성의 안부 전화에도 가영은 지극히 일상적인 말로만 대꾸했을 뿐이었다. 어제와 같은 그녀의 인생이 내일도 그대로일 것처럼. 그 어떤 변화도 맞이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뭐. 일단은 다른 이런저런 거 신경 쓰지 말고 소설을 구상하고 써내는 게 중요해.’


 가영은 오랜만에 집에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아이패드를 산 후로는 전원을 켜지 않은지 한참 된 노트북이었다. 회사에서 매일 하루 8시간 넘게 지겹도록 모니터만 들여다보는데, 뭐하러 집에서까지 컴퓨터를 들여다보나 싶어서 방치하다 보니 어느덧 먼지까지 쌓여 있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가영은 인터넷 브라우저에 접속하여 M출판사의 공모전 응모 서식 파일을 다운로드한 뒤 열어 보았다. 처음 몇 페이지에 걸쳐 공모전 안내 페이지에 기재되어 있는 참고 사항과, 응모 시 준수해야 하는 사항 등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 아래 덧붙여진 참가자의 정보와 작품 소개를 기재하는 페이지 아래부터는 온통 하얗게 비어 있는 페이지가 끝도 없이 아래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가영은 잠시 동안 가만히 그 화면을 응시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아무것도 없는 흰 화면이 너무나도 먹먹했다.


그래도 뭐라도 써야 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것만이 유일하게 도망칠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날부터, 가영은 계속해서 글을 써 내려갔다. 나름대로 조금 생각을 해서 써야 하지 않나 고민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새하얀 화면에 대한 압박감이 너무 심했던 게 문제였다.


 그래서 가영은 일단 첫날부터 생각나는 대로 등장인물이나 상황, 대략적인 스토리의 흐름을 정한 뒤 무작정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아무 말이라도 써서 이 페이지의 여백을 일단은 채워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비어 있는 페이지들을 마냥 하얗게 남겨놓는 것보다는, 그래도 뭐라도 채워놓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보다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가영은 본인이 대체 지금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건지, 일의 순서나 등장인물의 개연성이 이게 맞는 건지 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대강 정한 상황에 떠오르는 장면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불안하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아무래도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가영은 소설의 분량이 어느 정도 중반에 이르기까지 어쨌든 그럭저럭 빠른 속도로 분량을 채워 나갈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와중에 은수와 인경이 걱정했던 대로 가영 멘탈에 과부하가 발생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어진 것은 맞았다. 회사에서 일할 때 외의 시간은 오로지 소설 쓰기에 몰빵했으니까. 


 TF로 일이 바빠진 이후 준성과의 데이트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줄였으니, 사실상 가영의 하루는 60%의 회사 생활과 30%의 소설 쓰기, 10%의 수면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런 삶을 산다고 해서 그녀가 스스로도 걱정하던 만큼 기진맥진하게 녹초가 된 것도 아니었다.


 왜 음식을 먹을 때도 밥 먹는 배, 간식 배가 따로 있다고 하지 않던가?

 밥을 아무리 먹어서 배가 빵빵하게 불렀더라도 간식을 먹으면 또 어떻게든 들어가는 것처럼. 

 회사에서 극악의 스케줄을 소화하며 모든 에너지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짜인 것 같아도 집에 와서 노트북만 켜면 신기할 정도로 새로운 에너지가 솟아났다.


 소설을 쓸 때 다시 불이 붙는 그 정신력은 애초에 그 힘의 원천 자체가 다른 것 같았다. 평소에 회사에서 일할 때 쓰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뽑아내는 부분이 아닌, 새롭게 발굴해 낸 다른 영역으로부터 그 에너지를 길어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달까.


 뭐랄까, 회사 일을 하면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스스로의 안에 내재된 열정을 재발견한 느낌? 

 

 그 열정으로 인해 가영은 점차 바쁜 와중에도 오히려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소설을 쓰기 시작하기 전의 가영 쪽이 훨씬 무기력하고 에너지가 부족했던 느낌이었다.


 무엇보다, 글을 쓰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재미있었다. 아마 오랜만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 취업한 이후 거의 10년 넘게 목적성이 있는 글 외에는 써보지 않았던 가영이었다. 때문에 이번에 쓰게 된 소설처럼, 등장인물과 서사를 갖춘 형태의 글은 그녀로서도 거의 10년 만에 써보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너무나 오랜만이라 부담스러웠던 마음도 잠시. 예전처럼 글을 쓰고 화면을 채워나가는 데 본격적으로 몰두하면서 가영은 점점 자신감을 되찾아갔다.


 ‘그래, 이거지. 바로 이거였어!’


 노트북 앞에 앉을 때마다 가영은 고등학생 시절 각종 내신 시험과 모의고사,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짬을 내서 팬픽을 써서 올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가영의 학창시절은 세상의 기준으로 봤을 때 평범한 여고생에게 바람직하다고 권장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고등학생이 영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야 할 시간에 이런저런 망상이나 하면서 고작 아이돌 2차 창작에 불과한 팬픽을 쓴다는데 누가 반길까? 그걸 쓴다고 해서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고,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현실 세계의 누구도 가영이 그 글을 쓴다는 걸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가영은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글을 썼다. 주변의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그 일만이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 가득했던 당시 가영의 삶에 조금의 숨구멍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내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적어도 그것 만큼은 순수하게 가영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지친 몸으로 집에 와서 공모전에 내기 위한 소설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켤 때마다, 가영의 마음은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글을써서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든다는 행위가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고 읽는 것만큼이나 순수하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깨닫게 되었다.


 애초에 왜 가영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 많은 책들을 읽다가 이 길에 다다르게 되었는지를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명료해졌다. 가영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읽는 것만큼이나 본인이 직접 쓰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나이 서른 다섯. 생애 처음으로 팬픽을 썼던 17살의 배 이상은 더 살았을 그녀는 그렇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중간고사 전날에도 떠오르는 발상을 꾹꾹 눌러 참지 못하고 컴퓨터를 켜 자판을 두들기던 17년 전 여름의 어느 날처럼.


 어찌 보면 지금 가영이 처한 상황 자체도 17년 전의 박가영과 전혀 다를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벼락처럼 몰아치는 회사 일도, 딱히 문제는 없지만 같이 있다 보면 신발 안에 들어간 돌처럼 뭔가가 묘하게 거슬리는 남자친구와의 관계도. 반등의 기미도 없이 지난 11년 간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아둔 자신의 '있었는데 없었던' 걸로 만들고 있는 주식, 코인도.


 지금 가영의 삶에는 어릴 때 소화해야 했던 학업과 성취 만큼이나 피할 수 없는 일과 해야만 하는 일들로 꽉 차 있었다. 그래서 가영은 더욱 열심히 소설을 쓰는 데 몰두할 수 있었다. 소설을 쓰다 보면 이렇게 스스로가 처한 답답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그 세계의 인물에게 자아를 의탁하여 잠시라도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가영은 그 감각을 기억했다. 


 덕분에 오랜만에 잊고 있던 즐거움을 되찾은 가영은 그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 지하철을 타고 왕복 1시간 40분씩 출퇴근을 하는 중에도 스마트폰의 메모장 어플로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수정했다. 가영이 이런 루틴에 어느 정도 적응하는 와중에도, 외부의 상황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흘러가지 않았지만.





***




 몇 주 사이에 미래사업전략 TFT는 나름대로 진척이 있었다. 메타버스를 비롯한 주요 신기술에 대한 트렌드 분석은 이미 완료되었고,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국민서점이 진행하는 사업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도 정했다.


 그에 맞춰 각 사업부 별로 현황을 파악하고, 그로부터 도출한 각 팀 별 개선 요구사항을 세부적으로 취합했다. 이후 부지런히 달려  향후 적용 과제에 관한 아이디어를 모으는 지난한 과정까지도 다 끝났으며, 이제는 본격적으로 수행과제 선정에 착수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본격적인 실무가 시작되면서,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안건이 개별적으로 쪼개지고 구체화되었다. 20명이 넘는 규모의 대인원으로 구성되었던 미래사업전략 TFT 또한 그에 보조를 맞춰 여러 프로젝트 그룹으로 쪼개지게 되었다. 각 프로젝트 그룹은 3~4명으로 구성되었고, 각 과제 별로 1명의 PM이 정해졌다.


 일전에 가영에게 TFT 합류를 권하며 ‘내가 메인을 맡겠다’고 다짐했던 서 팀장의 말은 정말 거짓말은 아니었던 듯, 그는 이런저런 과제의 PM으로 지원해서 몇 가지 프로젝트에 제 이름을 담당자로 적어두었다.


 가영 또한 세 개 과제의 PM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과장 이상 급만 메인 PM을 하고 대리 이하 급은 보조를 했겠지만, ‘미래사업전략 TFT인 만큼 2030 젊은 친구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전략기획실장의 희망을 반영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실무그룹이 구성된 다음부터는 상황이 점점 더 정신없이 돌아갔다. 각 그룹 별로 과제가 구체화되고 개별적인 데드 라인이 정해지면서, 개별 그룹 단위의 미래사업전략 TFT 관련 미팅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럭저럭 소화는 가능한 일정이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긴 한 것인지, 그래도 이 생활을 시작한 지 몇 주가 지나면서 어느덧 이 업무량에 적응이 되어가고 있었으니까. 쉽지는 않았지만, 가영 자신이 맡은 업무는 그래도 어떻게든 해낼 수는 있었다.


 다만, 문제는 회사생활이라는 게 그러하듯이. 

 가영이 본인 몫의 일만 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었다.


 가영은 간과하고 있었다. 이 회사를 다니면서 결코 믿어서는 안 될 것 중의 하나가 서 팀장의 ‘내가 메인을 맡겠다’는 호언장담이라는 것을.


 서 팀장은 본인이 메인 PM을 맡은 TF 미팅에 거의 절반은 참석하지 못했다. 그에게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팀장인 만큼 너무 바빴고, 외부 일정으로 자리를 비울 일이 많았을 뿐이다. 

애초에 서 팀장이 처음부터 그런 본인의 상황을 감안하여 적절히 업무를 쳐내고 받았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센스는 부족했다. 오히려 서 팀장은 실무 출신 팀장이라서 그런지 다른 팀장 급에 비해 현업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가끔은 꽤 의욕적인 모습도 보였다.


 문제는 그가 이제는 더 이상 맡은 일만 착착 완수하면 되는 실무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관리직인 본인의 현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에 맞는 캐파를 계산하는 센스가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의욕이 앞서다보니 그런 계산에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아랫사람에게 돌아왔다. 그나마 사이에 파트장이 있었을 때는 괜찮았는데, 파트장이 사라지니 가영이 그 수습을 도맡아 해야 했다. 최근에 가영은 서 팀장에게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그가 메인 PM으로 맡은 그룹 과제에 땜빵 멤버로 회의실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일상이었다. 가끔은 정 과장이 갈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영이 갔다. 그렇게 다녀온 미팅의 내용을 서 팀장에게 매번 따로 정리해서 보고하는 것도 꽤나 시간을 잡아먹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메인 PM인 서 팀장보다 땜빵 멤버였던 가영의 참석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해당 프로젝트 그룹 팀원들이 문의할 것이 있으면 서 팀장이 아닌 가영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정도였다.


「박 대리님, 오늘 회의도 박 대리가 오시나요?」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웃지도 못하겠는 상황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영은 생각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가 처음부터 메인 한다고 하고 실적이나 채우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상사 복도 복인 것을.


가영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가라앉히고 부지런히 땜빵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면서 가영은 종종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두, 세 개의 회의가 동시간대에 잡히는 것이었다. 그나마 주간 회의와 같은 정기 회의와 겹칠 때는 다른 MD에게 부탁해서 양보했지만, TF 관련된 미팅이 겹칠 때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때마다 가영은 서 팀장에게 선택지를 제공했다.


“팀장님.”

“어?”

“저 이번 주 목요일 오후 3시에 미래사업전략 TFT 그룹 미팅 대리 참석 요청 주신 것 있잖아요.”

“어어. 그게 왜?”

“저 그때 국민 북 어워드 TFT 미팅도 겹쳐서요…”

“아, 그래?”

“네. 정 과장님이 대신 참석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앗, 그런데 정 과장 그날 건강검진 휴가라고 했는데… 어떡하지?”


 바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 답답한 듯 서 팀장이 미간을 찡그렸다. 손가락으로 턱 부근을 쓸면서 고민하는 폼이 마치 솔로몬의 선택이라도 하는 듯한 진지한 모습이었다.


“북어워드 그건 박 대리 대신 참석할 사람 없나?”

“네… 이거 파트장님하고 같이 했던 건데, 퇴사하시고 나서는 히스토리를 아는 다른 MD들이 없어요.”


 가영의 입에서 파트장 이야기가 나오자 서 팀장이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가영이 파트장의 대체 인력을 요구한 지도 어느덧 거의 한 달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데도 서 팀장은 매번 그 사실을 까먹는 듯했다. 이렇게 가영이 은근히 말에 뼈를 섞어 던질 때에만 ‘아 맞다, 파트장 나갔지. 대체 인력 필요하댔지?’ 하고 새삼 새롭게 깨닫는 것 같았으니까. 매번 처음 듣는다는 듯한 저 반응은 가영으로서도 매번 신선하고 새로웠다.


 가영은 보이지 않게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 대체 인력이라는 사람은 대체 언제 볼 수 있단 말인가? 그 사이 잠시 어쩌지 고민하던 서 팀장이 묘안이 났다는 듯이 아, 하고 손가락을 튕기며 가영에게 말했다.


“일단 국민 북어워드 회의를 가고.”

“네.”

“그게 더 빨리 끝날 것 같으니까, 끝나면 바로 미래사업전략 TFT 그룹 미팅을 가도록 해.”

“…네?”

“걱정 마. 중간부터 참석하더라도 이전의 내용은 내가 다른 참석자한테 부탁해서 촬영이든 녹음이든 해 달라고 할 테니까."


 만화책을 보다 보면 종종 그런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이마에 선명한 혈관이 십자 모양으로 새겨지면서, ‘빠직!’하는 효과음이 커다란 글자로 새겨지는 그런 것. 지금 가영은 마치 본인이 그런 만화 속의 한 장면으로 뛰어든 것 같았다.


‘나 지금 반갈당한 거야?’


아니 이게 무슨 탕짬면도 아니고… 쌍쌍바도 아닌 것이. 회의 반갈이라니요.

정말 솔로몬도 울고 갈 명선택이 따로 없었다.


 이 세상에는 물리학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한 사람이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 팀장은 지금 가영에게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길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어도 가영이 알기로는, 이것이 가능한 사람(?)은 이 세상에 『해리 포터』 시리즈의 헤르미온느 외에는 없었다. 그나마 그녀도 엄밀히 따지자면 동시에 두 장소에 존재한 게 아니었다. ‘타임 터너’라는 마법 아이템을 써서 시간을 되돌려야 했단 말이다.


 이건 말 그대로 서 팀장이 당장 덤블도어에 빙의해서 가영의 손에 타임 터너를 쥐어주지 않는 한 실현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가영은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본인에게 그런 초자연적인 힘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작 회사의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 힘을 빌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




[뭐 어때, 어쩌다 한 번 그럴 수도 있지.]


 퇴근길. 가영으로부터 오늘 회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준성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기껏 가영이 지하철 역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늘어놓았는데, 그걸 그냥 저렇게 간단하게만 대답해버리니까 듣고 있던 가영은 어쩐지 기운이 쭉 빠졌다. 억울한 마음에 되받아치는 목소리의 톤이 살짝 높아져 있었다. 


“아니, 근데 이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라니까?” 


 비록 가영이 이렇게 말은 했지만.


 솔직히 회의 두 개에 동시 참여하고 앞부분은 동영상으로 다시 보라는 이 정도의 지시까지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긴 했다. 여태까지도 미팅 시간이 동시에 잡힌 적이 한두 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정 과장이나 다른 MD들에게 부탁해서 겨우겨우 돌려 막긴 했으니까. 그래도 이제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고작 한 달 정도 되었는데 이 정도라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영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 정말 이렇게 막무가내로 땜빵할 게 아니라… 뭔가 근본적인 대책이 있어야지. 내가 손 딸린다고 경력자 뽑아달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고. 심지어 매번 물어볼 때마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짓는다니까? 완전 소름 돋아.”

[요새 어디든 괜찮은 사람 뽑기가 힘들다잖아. 그냥 좀 기다려 봐, 인사팀에서 어련히 알아서 하고 있겠지.]


‘오늘따라 정말 왜 이러지?’


가영은 울컥 짜증이 났다. 통화 내내 준성의 시각은 묘하게 가영의 상사인 서 팀장의 입장에 치우쳐 있었다. 보수적인 성격 때문인건지, 준성은 이런 경우에 가영의 편을 들어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준성은 회사 생활에 대해서는 항상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뭐 어떡해, 상사가 까라면 까는 거지 뭐.’


 가영은 평소 성격이 둔감하고 센스가 부족한 편인 준성이 회사에서 인망을 얻으며 그럭저럭 사회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 것은 이런 면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회인 강준성이 아닌, 박가영의 남자친구 강준성으로서 대답해줬으면 했다. 그냥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서 하기에는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괜히 준성이 얄미워지기까지 했다.  이 순간, 가뜩이나 스트레스가 가득 찬 가영을 치졸하게까지 만드는 것 같아서.


 “몰라. 나 집 거의 다 왔어. 끊을게.”

 [그래, 저녁 맛있게 먹고.]


 가영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오피스텔의 작은 거실에 놓여 있는 소파에 그대로 뻗듯이 엎드려 누워버렸다.

 오늘따라 마음이 너무나 답답했다. 


‘이 답답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이 와중에 놀랍게도 준비 중인 소설은 거의 완성 단계였다. 그동안 부지런히 쓴 덕분이었다. 그러나 가영은 아직도 준성에게 본인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사실 가영은 뭔가를 직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준성이 보일 반응은 뻔하지 않은가. 


‘ ‘그래?’ 하고는, 주말에 어디로 뭐 먹으러 갈지나 얘기하겠지.’


 그러면 가영은 분명히 준성에게 정이 떨어질 것이다. 


 그건 싫었다. 


‘어차피 결혼할 사이에, 정이 떨어지면 나만 괜히 괴롭기만 하지.’


 차라리 아예 애초부터 준성에게는 그런 쪽으로 기대를 안 하는 게 나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마음먹어도 뭔가가 자꾸만 허전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영의 인생에 분명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그리고 그것이 가영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는데도. 가영은 그런 자신의 변화를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남자친구와 터놓고 공유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병호에게는 더더욱 할 수 없었다. 평생을 몸으로 일해 돈을 벌며 살았던 병호는 가영과 달리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지 멀쩡한 젊은 사람이 몸 바쳐 일하기는커녕 방구석에 앉아 소설 따위를 쓰는 데 시간을 쓴다는 것을 결코 이해할 리가 없었다.


 비척거리며 몸을 돌려 다시 소파 위에 똑바로 누운 채로, 가영은 팔을 들어 올려 손등을 이마에 짚었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앞에 펼쳐지는 지금부터의 삶을 떠올렸다.


 일단 준성과 의논해서 날을 잡고, 상견례도 준비하고. 연말 시상식 준비하고.

  내년까지 TF 참여하고. 바쁜 거 좀 정리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집 구하고, 결혼 준비해서 식 올리고.

 몇 년 내로 애 생기면 낳고. 육아 휴직하고, 복직하고. 그렇게 계속 일하고.


 언뜻 떠오르는 것은 모든 것이 너무도 명확하게 평탄한 삶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당분간 가영의 인생에서 찾아 올 빅 이벤트는 결혼이 거의 유일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신부가 주인공이라는 자신의 결혼식에 선 본인의 모습조차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당연했다. 여태까지의 가영의 삶을 드라마라고 한다면, 시점 제공자인 가영은 주연이라기보다는 엑스트라에 가까웠다. 많이 봐줘야 다른 수많은 주인공의 삶을 관찰하며 생각하는 내래이터 정도랄까. 화면 구석에 보일 듯 말듯 비치다가 기껏해야 가끔가다 감독 눈에 띄어서 대사 한 두 줄을 받게 되는 정도가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치의 특별한 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혼이 아마 그런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 줄 것이다. 


 다만, 앞으로 준성과 같이 살게 되면 아마도 소설을 쓸 시간은 없을 것이다.

 지금 가영이 온 힘을 몰두해서 쓰고 있는 이 소설은 아마도 그녀가 아직 미혼인 상태에서, 아직 충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을 때 그냥 한 번 도전해 본 취미에 그칠지도 모른다.


 이 허겁지겁 쓴 소설이 기적적으로 당선되지 않는 이상, 박가영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소설을 썼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아무도 모른 채 묻혀버릴 것이다.


 직장도, 결혼할 남자친구도 있다. 


비록 주식, 코인에 꼬라박긴 했지만, 당장 길거리로 내쫓기거나 굶어 죽을 정도로 빚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만하면 된 거 아니냐는데.


남들도 다 그러고 산다고, 만족하고 살라는데.


근데 왜 자꾸 그렇지 않은 것 같을까?


왜 자꾸 인생에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은 걸까?


왜 자꾸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고 더 나아가고 싶은 걸까?


이러면 안 되는 걸까?






-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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