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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n 12. 2022

06. 잔혹한 성덕의 테제

오타쿠여, 성덕이 되어라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06. 잔혹한 성덕의 테제



 이후 오후 시간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흘렀다. 그렇지만 그날의 저녁 퇴근길은 어쩐지 미래사업전략 TFT가 시작된 이래 늘 그랬던 것처럼 어마어마하게 피곤하진 않았다.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에 올라 적당히 집까지 서서 갈만한 자리를 확보한 가영은 스마트폰의 메신저 앱을 켰다.


 가장 최근에 읽었던 대화방 리스트 최상단에는 이정아 팀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대화방을 클릭하자, 열린 창의 가장 하단에 이 팀장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메시지가 있었다.


「MD님, 공모전 안내 페이지예요! 자세한 사항은 이 링크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


 메시지 하단에는 M출판사의 홈페이지 도메인으로 시작되는 URL이 하나 첨부되어 있었다. ‘M출판사 테마 단편소설 공모전’이라는 썸네일을 보니 어쩐지 속이 울렁거렸다. 


 공모전의 주제는 이 팀장의 말대로 ‘덕질’이었고, 제출 분량은 A4 용지로 20페이지 정도였다. 당선작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총 8작품이었고, 선인세를 포함한 상금 150만 원에 앤솔로지 단편소설집 출간이 예정되어 있었다. 다만, 마감까지 남은 기한이 길어야 3주 정도였다. 가영은 생각에 잠겼다.


‘내가 쓸 수 있을까?’


 그래도 가영은 왜 이 팀장이 자신에게 이런 주제의 공모전이 딱이라며 추천했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이 팀장과 가영이 나이차를 극복하고 본격적으로 친해진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바로 ‘덕질’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오타쿠가 될 운명으로 태어난 사람과, 어떻게 해도 오타쿠가 될 수 없는 갓반인*이라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가영은 그중 철저히 전자의 유형의 사람이었다.


 가영의 덕질의 역사는 그녀의 성장과 함께 착실히 단계적 루트를 밟았다.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도서 대여점에 발을 들이고 나서부터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각종 만화책과 소설을 읽으며 2D덕질에 빠져들었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당시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 남자 아이돌 그룹 ‘식스틴즈(6TNZ)’에 입덕하며 본격 3D 덕질을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가영은 학교가 끝난 뒤 혼자 저녁을 먹으며 TV를 틀어 놨었다. 그때 마침 나오던 음악방송에서 식스틴즈의 첫 데뷔 무대를 보게 되었다. 그녀는 갓 데뷔한 신인 특유의 기합이 빡 들어간 칼군무를 보다가 그만 자신이 숟가락을 입에 넣는 것을 까먹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그들의 무대를 한번 봤을 뿐인데, 눈 깜짝할 시간에 시간이 지나 있었다.

그야 말로 타임 루프 급의 덕통사고였다. 


이후 한동안 식스틴즈는 가영의 덕질 생활 전반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중에 대학생이 되고 시간이 좀 생기면서 가영은 본격적으로 드라마와 영화 덕질까지 시작했다. 이후로 종종 그 대상과 테마가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적어도 덕질을 처음 시작한 이래 가영이 단 한순간도 뭔가에 대한 덕질을 하지 않고 살았던 적은 없었다. 


인간 박가영은 뭐랄까, 그야말로 ‘휴덕은 있어도 탈덕은 없다’는 오타쿠계 명언의 인간화나 다름없었다.

 그런 만큼 덕질은 그녀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인생 전반에 걸쳐 그녀가 덕질과 맺어온 관계를 돌이켜보면, 거기엔 어느 정도 상호적인 측면이 있었다. 비록 덕질이 그녀의 시간과 열정을 탐욕스럽게 소비하긴 했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그만큼 가영에게 뭔가 꼭 뒤에 남기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 꿈도, 뚜렷한 목적도 없이 퀘스트만 성취하는 형태로 흘러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가영에게, 그나마 덕질이 제시하는 방향이라도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녀는 자신의 삶이 도저히 어찌 흘러갈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뭐…. 결과적으로 보면 목적이 아닌 덕질이 이끄는 삶을 살다 보니, 얼렁뚱땅 이렇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아웃풋을 낸 것은 책에 대한 덕질이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 국민서점에서 도서MD, 그것도 본인이 사랑하는 문학 파트의 MD로 일하다 보니 가끔은 남들로부터 성덕** 소리를 듣지 않던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책만큼이나 책 이외에 가영이 덕질했던 콘텐츠들 또한 그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녀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아이돌 팬픽을 쓰면서부터였으니까.

 가영은 아이돌 덕후 중에서도 철저히 안방파 덕질을 선호하는 유형의 덕후였다. 땡볕과 눈 비바람과 싸우며 오빠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오프라인 무대를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TV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으로 각종 떡밥을 주워 먹으며 그것을 묵혀 자신만의 망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더 그녀의 덕질 스타일에 잘 맞았다.


 특히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20대 시절에는 그런 망상에 혼자 거하게 취하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는 머릿속에서 퐁퐁 솟아나는 연성***거리들을 바깥으로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며 매일같이 끙끙댔다.


 그래서, 가영은 그렇게 했다.


 가영이 식스틴즈 최애로 잡았던 민혁의 유명 팬페이지 소설 게시판에서 팬픽을 연재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친 짓이었다. 한창 수험생인 고등학생에게 권장될 만한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당시의 가영에게는 그 글을 빨리 써내는 것이 공부에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전 단계 같은 것이었다. 가슴에서, 머리에서 자꾸만 분수처럼 솟아나는 그 망상을 당장 눈에 보이는 형태로 적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글은 이 세상에 형태를 갖춘 모습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때까지 가영을 괴롭힐 것이었다. 가영이 공부에든 입시에든 집중할 수 없도록 말이다. 


 때문에 가영은 일단 미친듯이 썼다.  글을 쓰지 않으면 공부를 할 수 없으니까 일단 미친 듯이 글을 쓴 뒤, 기진맥진한 기분으로 책상에 앉는 것이다. 그렇게 글을 써서 게시판에 올려놓고 나면, 한동안은 오히려 머릿속이 개운해져서 공부에 더 잘 집중할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쓰고 싶은 연성이 그녀의 마음 한편에 똬리를 틀고 몽글몽글 자라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쓰고, 또 썼다. 생각이 비어 있는 날에는 언제 또 불현듯 쓰고 싶은 소재나 영감이 불쑥하고 머릿속을 죄다 점령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더욱 집중해서 공부를 하곤 했다.


 당시에는 꽤 힘들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시기가 좋았던 것 같다.

 놀랍게도 그녀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완결을 냈던 팬픽은 6종이 넘었다. 중단편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장편이었다. 오전부터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집에 와서는 비몽사몽한 채로 팬픽을 썼다. 대체 어디서 그런 열정이 솟아나왔는지, 어떻게 그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었는지는 지금의 그녀에게도 불가사의한 일로 느껴졌다. 


 그리고 당시 가영이 그렇게 치열하게 써냈던 팬픽들은 꽤나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팬픽 작가로서 그녀의 명성은 필명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의 탑 티어 급은 아니었지만, 새 글을 올리면 하단에 ‘작가님’이라며 추켜세워주는 댓글이 고정적으로 2~30개 주르륵 달릴 정도는 되었다.


 어쩌면 그러한 피드백 또한 그녀가 별다른 대가 없는 창작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었을지도 모른다. 가영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가끔씩 팬픽을 연재했다. 자신을 ‘작가님’이라고 불러 주는, 얼굴도 모르는 독자들을 위한 책임감으로 묵묵히 썼다. 그렇게 어느덧 단편에서 장편까지 15종이 넘는 팬픽에 완결을 냈을 때쯤엔 식스틴즈 멤버들이 하나둘씩 군대에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티스트의 활동 공백기가 생기고, 팬덤 규모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이후 등장한 신생 SNS들에 밀려 가영이 활동하던 팬페이지도 문을 닫았다.


 그렇게 20대 중반까지 뜨문뜨문 이어지던 가영의 은밀한 창작 생활은 주로 활동하던 팬페이지의 폐쇄와 함께 그 막을 내렸다. 물론 예전에 썼던 팬픽들은 전부 백업을 해 두었고, 그 중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 픽션타입이라는 2차 창작 사이트에 업로드도 해 두긴 했다. 그러나 이후로 더 이상 새로운 창작을 하진 않았다.


 결과적으로 가영이 몇 년 간 팬픽을 썼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주변에 거의 없었다. 그나마 그녀가 뼛속까지 본투비 오타쿠라는 것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은수, 인경 정도였지만 그들도 가영의 필명을 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비록 아무도 몰라준다 해도. 당시 가영이 필명으로 누렸던 과거의 영광은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영의 마음속에 은밀한 긍지로 남아 있었다. 단지 그것을 대놓고 드러낼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을 뿐.


 취업 이후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조금씩 덕질 소강상태에 접어든 그녀는 이런 자신의 과거를 주변에 철저히 숨기며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남자친구인 준성은 가영이 소싯적에 팬픽까지 썼던 오타쿠였다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가영이 아이돌이나 영화를 좀 딥하게 좋아한다고만 생각했고, 가끔씩 과몰입하는 성향이 좀 있는 정도라고 여겼다. 이쪽 세계에 대해서 문외한이어서 그런지, 설마 자기 여자친구가 오타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물론 가끔가다 가영이 바꾸는 스마트폰 잠금화면 속 인물이 자신이 가영의 최애 아이돌의 사진인 것에 종종 불만을 표시한 적이 있긴 했다. 그렇지만, 딱히 집요하게 굴지는 않았다. 본인의 스마트폰 잠금화면 또한 어디 무슨 해안도로 근처에서 삐까뻔쩍하게 세워놓고 찍은 본인의 차 사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녀의 최애 잠금화면 사진은 실제로 꽤 유용하게 활용되기도 했는데, 가영이 M출판사의 이 팀장과 본격적으로 친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 사진 때문이었다. 


 가영이 문학 파트로 분야를 변경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당시는 마침 식스틴즈 멤버들이 전원 군대를 다녀온 뒤에 오랜만에 컴백하던 시기였다. 몇 년 간 고무신 덕질을 하며 살짝 팬심이 시들해졌던 찰나에 찾아온 완전체 컴백에 제대로 뽕이 차버린 가영은 폰 배경화면을 최애인 민혁이 팬들 보라고 SNS에 올려준 남친 짤로 바꿔두었었다.


  그런데 그 화면을 당시 미팅 중이던 출판사의 이정아 팀장이 보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일코****한다고, 약간 알아보기 긴가민가한 옆모습 사진으로 설정해두었는데도 이 팀장은 그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어머, MD님!! 어머어머!! 이거 식스틴즈의 민혁이 아니에요?”

“엇,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제 최애는 호진이에요!”


 기습과도 같은 고백이었다. 가영이 일코를 해제할까 말까 고민할 틈도 없었다. 그저 머리로, 가슴으로 한순간에 그 사실이 받아들여졌다.


 이 팀장도 식스틴즈의 덕후였던 것이다!


 심지어 이 팀장도 가영과 마찬가지로 식스틴즈 데뷔 때부터 입덕이라는 게 아닌가? 당시 그녀가 첫 출산과 독박 육아로 인해 앓던 우울증을 호진이가 치유해줬다고 한다. 일터에서 덕친을 만나기도 어려운데, 심지어 입덕 시기까지 똑같다니. 마치 운명과도 같은 시추에이션이었다.


 그날의 덕밍아웃*****을 계기로 두 사람의 친밀도는 급속도로 올라갔다. 미팅 중간중간에 덕톡을 섞는 것은 물론이고 컴백이나 멤버 개인 활동 등 떡밥이 생기면 카톡을 보내주기도 했다. 식스틴즈 콘서트 티켓팅에 같이 참전하기도 하고, 심지어 한 번은 콘서트에 같이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 팀장이 가영의 덕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이런 제안을 하게 된 것 자체가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팀장도 가영이 몇 년간 식스틴즈 팬픽을 꽤 열심히 썼었다는 것은 모른다. 아무리 가영이어도 일로 만난 사이에 그런 TMI까지 털어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러니 가영에게 소설을 써보라는 권유도 이 팀장 입장에서는 그저 가영의 과거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그냥 별 생각 없이 던져본 말일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팀장의 제안이 가영에게 가지는 울림이 생각보다 꽤 묵직했던 것이다. 지금의 가영에게는 도피처랄지, 탈출구 같은 게 절실했으니까.


 가영은 덜컹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자신의 지난 과거를 짧게 돌아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영이 소싯적에 꾸준히 썼었던 팬픽들은 가영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끌어올려줬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해소해주기도 했던 것 같다.  


 단지 그것이 1차가 아닌 2차 창작에 기반한 글쓰기였기에 한계가 있었던 것일 뿐이다. 2차 창작은 무엇보다 1차 떡밥인 그룹 활동이 활발하지 않으면 그만큼 활발해지기 어려운데, 식스틴즈는 지난 10년 간 꾸준히 활동이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도 멤버들 각자 개인 활동을 하면서도 2년에 한 번씩은 완전체로 앨범을 내주긴 했는데, 그것도 3년 전쯤이 마지막이었다. 당시 식스틴즈의 데뷔 15주년 콘서트에서 멤버 중 한 명이 결혼을 발표했고, 이후로는 조용했다. 비록 해체는 안했지만, 사실상 그룹으로서는 활동 중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가영은 지금도 여전히 식스틴즈를 좋아했다. 다만 더 이상 그들을 소재로 글은 쓰지 않았다. 탈덕, 휴덕 뭐 그런 걸 다 떠나서 굳이 현 상황에서 별로 없는 떡밥을 착즙까지 해가면서 꾸역꾸역 뭔가를 생산해 낼 정도의 열정은 남아있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 할까.


 한창 미친듯이 팬픽을 쓰던 시기와 비교했을 때 지금 가영의 개인적인 상황이 많이 변하기도 했다. 타이밍도 그랬다. 하필 민혁의 팬페이지가 폐쇄되던 때는 가영이 한창 본격적으로 취업준비를 시작했을 때였다. 당연히 팬픽이고 뭐고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이후 첫 취업에 성공했을 땐 처음 겪어 보는 사회생활에 적응하느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열정이 있다 해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가영의 열정은 모조리 회사 일에 써야만 했다. 자연히 본인의 열정을 투입하여 뭔가를 연성해 내는 주체적이고 생산적 덕후의 삶과는 거리가 다소 멀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로 살아온 게 벌써 거의 10년이다.  가영은 자연스레 자신이 과거에 팬픽을 썼다는 것을 까먹고 살고 있었다.


 그런 만큼 가영에게 '소설 쓰기'란 일종의 추억 팔이에 가까웠다. 가끔씩 개별 활동을 하며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추억팔이를 하는 식스틴즈 멤버들을 볼 때마다 가영은 감회가 새로웠다.


‘맞다, 내가 옛날에 그랬었지.’


 그렇게 조금 아련하게 생각할 순 있으나, 현재 진행형은 아닌 이야기였다는 얘기다.


 애초에 식스틴즈의 덕후로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가영으로서는 식스틴즈 연성과 관련된 게 아니면 아니면 별로 소설 형태의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생에서 뭔가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박가영은 절대 소설이라는 걸 쓸 일이 없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가영인데. 이번 이 팀장의 제안은 왠지 자꾸만 솔깃했다.  


 가영은 스마트폰의 인터넷 브라우저를 켜서 국민서점 웹진에 접속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해, 몇 년 전에 연재했던 ‘박 MD의 업무 일지’ 에세이를 차분히 다시 읽어보았다.


 4주에 한 편씩 총 12편 정도 연재되었던 그 글은 이 팀장의 말대로, 에세이라기보다는 마치 소설 같았다. 한 편 한 편이 사건 형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나, 고정적인 등장인물이 캐릭터화 되어 대사를 주고받는 점이 그러했다.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그냥 일하느라 시간도 없는 와중에 팀장님이 쓰라고 하니까 뇌 빼고 그냥 손가락이 흐르는 대로 싸지르듯이 썼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어릴 때 팬픽을 하도 쓰다 보니 그런 형태의 글을 쓰는 것이 손에 익은 것 같았다.


 가영은 웹진 창을 닫고 오랜만에 자신의 팬픽들을 백업해 올려둔 픽션타입에 들어갔다. 본진인 식스틴즈가 인기가 떨어져서인지, 백업 겸 올려둔 소설들은 예전만큼의 인기는 없다.


 좋아요 수는 50개, 100개 정도. 가영이 다시 읽어봐도 너무 옛날에 쓴 글들이라 요즘 감성에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것들을 차분히 읽고 있는 가영의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묘한 생기를 찾고 있었다. 


보통 지하철을 타고 이 지점까지 오면 동태 눈깔이 되곤 했는데 말이다.


 10대부터 20대 시절까지, 자신이 꾸준히 써서 하나하나 세상에 내보내 왔던 글들을 차분히 훑어보다 보니 마침내 내릴 역에 도착했다. 열린 지하철 문을 벗어나 플랫폼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가영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부터 집에 가서 공모전에 낼 소설을 구상할 것이었다.  

 가영의 마음 중심부에서 뭔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할 수 있어!’라고 자신 있게 답은 못해도, ‘글쎄… 한 번 해볼까? 막상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는 말해볼 수 있을 정도의 딱 그런 정도의 소극적인 열정이었다. 


 한창 때는 매일매일 팬페이지 소설 게시판에 A4 3~4장 분량의 소설을 연재하곤 했던 가영이었다. 아직 감만 많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남은 기간 동안 A4 20장의 소설을 쓰는 것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특히 ‘덕질’이란 건 본인이 누구보다 자신 있고, 잘 아는 주제였으니까.


 이후로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가영은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여태까지 자신의 덕질의 역사를 쭉 돌아보면서, 본격적인 구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팬픽을 쓰다 대박 터진 성덕 작가의 이야기를 써볼까? 


 아니야. 너무 자전적으로 흘러서 오히려 에세이 같아질 것 같아.

그럼 최애의 입대 소식이나 열애설이 떴을 때 느꼈던 그런 상실감을 써볼까? 너무 소소해.

학교 폭력 문제로 논란에 휩싸인 아이돌을 덕질하는 오타쿠의 심리에 대해 써볼까? 근데 이건 20페이지로 해결하기엔 너무 무겁게 흘러갈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던 것이 결국 장기간의 덕질 생활에 대한 현타와 현실적인 덕질의 문제와 맞닿았을 때, 가영의 머릿속에서 퍼뜩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차라리… 메타버스나 가상현실 같은 미래 기술과 아이돌 산업을 엮어서 한번 써볼까? 가상 아이돌이면 노화도, 군대도, 열애설 같은 병크******도 없을 거 아냐. 메타버스 속에서 피그말리온 같이 내 취향의 덕질용 안드로이드를 맞춤 제작한다거나…그런 SF적인 설정으로 한번 써보면 어떨까?’


 어차피 미래사업전략 TFT 때문에 요새 맨날 개고생 하면서 그런 것들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기왕 공부하는 거, 공모전에 제출할 소설의 메인 소재로도 함께 활용할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닌가. 


 어차피 마감까지 남은 기간이 3주밖에 안 되었다. 하필 업무적으로도 바쁜 시기였다. 그러니 따로 이 소설을 위해 자료 조사까지 해가며 쓰는 것은 무리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메타버스랑 엮어 구상하면, 미래사업전략 TFT와 관련하여 온 시간과 정신을 쏟아야 하는 현재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솔직히, 회사에서는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어떤 다른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이 바쁘고, 집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뻗기 바쁜 이런 삶 속에서 3주 안에 A4 20장짜리 소설을 써낸다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소설을 써야겠다'고 확실히 마음을 먹자마자 다 고갈되어 더 퍼낼 건덕지도 안 남았던 에너지가 어딘가로부터 다시 추가로 리필이 되는 느낌이었다.

 당장 소설을 쓰겠다고 해서 최근의 답답한 일상이 뭔가 크게 달라지진 않겠지만, 오랜만에 다시 소설을 쓸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뭔가 달라질 순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영이 최근의 일상을 살면서 좀처럼 느끼지 못했던, 무척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유일한 희망이기도 했다. 


지금 두근거리는 가슴이 그 증거였다. 가영은 최근에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려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다시 소설 한 번 써보자. 2차 창작이 아닌, 진짜 오리지널의 이야기로 한 번 도전해 보는 거야.’










- 다음 편에 계속 -



※ 각주 - 알고보면 쓸데없이 KG받는 덕후사전


*갓반인 : God+일반인의 합성어. 갓생 사는 일반인이라는 뜻.

**성덕 : '성공한 덕후'의 줄임말. 본인이 덕질하는 분야와 관련된 일을 하며 갓생을 살고 있는 오타쿠를 의미한다.

***연성 : 연금술로 뭔가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 특히 오타쿠들 사이에서 덕질 용어로 사용될 때에는 보통 1차 콘텐츠에 기반한 2차 콘텐츠(팬픽, 팬아트, 썰 등)을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일코: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로,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현실의 지인들에게 본인이 오타쿠임을 숨기고 일반인인 척 행동한다는 의미.

*****덕밍아웃 : 오타쿠 + 커밍아웃의 합성어. 현실의 지인에게 자신이 덕후임을 밝힌다는 뜻.

****일코: 일반인 코스프레의 줄임말로,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현실의 지인들에게 본인이 오타쿠임을 숨기고 일반인인 척 행동한다는 의미.

*****덕밍아웃 : 오타쿠 + 커밍아웃의 합성어. 현실의 지인에게 자신이 덕후임을 밝힌다는 뜻.

******병크 : 병X 크리티컬의 줄인 말로 루머나 부정적인 사건에 휘말렸을 때 주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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