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있소는 언제나 구인중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월말이 다가오며 슬슬 사내에 들뜬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매해 9월 말이면 국민서점은 연례행사처럼 ‘베스트 국민서점인’을 발표했다. 베스트 국민서점인은 올 한 해 동안 국민서점의 발전에 기여한 임직원에게 수여하는 상이었다.
일정 기간 동료들의 추천을 받아 후보에 오르면, 팀장으로 구성된 선정 위원들이 인사팀과 함께 심사하여 각 본부 별로 한 명씩을 선정했다. 이렇게 선정된 베스트 국민서점인에게는 상여금과 함께 2단계 특별 승급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것은 굉장히 특별한 상이었다. 국민서점은 직급에 따른 연봉 테이블이 전부 정해져 있었다. 매출 부서와 비매출 부서 간의 위화감 조성을 방지하기 위해 매출 달성시에도 상여금은 팀 예산으로만 지급되었으며, 그나마도 지원 부서와 비율에 맞춰 나눠 가져야 했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 지독한 공동체주의를 자랑하는 국민서점의 분위기에, 개인에게 상여금을 주는 데다 승진에도 영향을 주는 이와 같은 이벤트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특히 2단계 특별 승급은 엄청난 치트키였다. CEO가 직접 회사의 장점으로 ‘가족 같은 분위기’를 최고로 꼽을 정도로, 국민서점은 정말로 의리가 넘치는 조직이었다. 한 번 식구로 받아들인 직원은 제 발로 나가기 전까지는 웬만하면 자르지 않았다. 아무리 성과를 내지 못해도 일단 제 발로 회사에 붙어 있기만 하면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끝까지 끌어안고 연공서열 순으로 승진을 시켜줬다.
그 의리는 확실히 감동적이긴 했지만, 실무 입장에서는 결코 일하기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일보다 성과보다 오로지 생존만을 노리고 존버하는 성향의 인사들이 살아남기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미 국민서점의 윗 라인 일부에는 기생충 같은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은 대충 아랫사람들한테 떠넘기고 매일 6시까지 시간을 때우며 ‘존버’하다보면 저절로 볕 들 날이 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회사는 그런 그들의 믿음을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그들은 뻔뻔하게도 매번 때 되면 따박따박 승진까지 얻어내고 싶어 했다. 한번 들어온 사람을 잘 내보내지 않는 국민서점 특성상 승진 적체는 사은품처럼 따라오는 것이었고, 웬만한 직원들도 제 때에 승진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가영도 올해 과장 승진 대상자가 되긴 했지만 애초에 한 번에 승진이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었고.
그 결과, 국민서점의 평균 근속 년수는 10년이 넘었으나, 3~5년 차의 이직률은 제일 높았다.
승진 TO는 한정적인데 대기자들은 나날이 늘어나 줄줄이 대기하는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그나마 승진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과 평가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 은 개뿔. 사바사바였다.
승진 시즌이 되면 상사와 점심을 먹고, 자신의 쥐똥만 한 성과를 공룡 똥 크기로 강조하여 보고하는 그런 사바사바 말이다.
상사한테 사바사바 정치질도 못하고, 본인 성과를 뻔뻔하게 부풀리지도 못하는 가영과 같은 젊은 실무들의 입장에서는, 베스트 국민서점인상에 발탁되어 2단계 특별 승급을 받는 것만이 그 모든 줄을 질러갈 수 있는 ‘슈퍼 패스’를 받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작년 같은 상황이었다면 별로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영 또한 자신이 어떤 캐릭터인지 잘 아니까. 가영은 결코 상사 입장에서 예뻐할 만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것을 깨닫고 한 때 상사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해 보았던 적도 있었지만 매번 극도의 어색함을 느끼며 실패만 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저도 모르게 조금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파트장이 퇴사한 다음부터 폭발적으로 늘어난 업무량을 소화하며 파김치가 된 가영을 보면서, 주변 동료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바람을 넣곤 했었다.
“박 대리, 요즘 일 너무 많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 보여.”
“서 팀장님도 너무하지. 이러다 박 대리까지 퇴사한다고 하면 진짜 난리 날 텐데. 미리미리 알아서 좀 챙겨줘야 하는 거 아냐?”
“그래. 일 많아진 건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된 이상 베국인이라도 타서 특별 승급 가자. 내가 추천서 넣어 줄게.”
그래서, 평소와는 달리 조금은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난 한 달간 채찍질만 해대는 회사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당근을 한 번 준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버틸 힘을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9월 마지막 주의 어느 날. 인트라넷에 공지된 ‘베스트 국민서점인’의 온라인 사업본부 수상자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가영의 이름이 아니었다.
거기엔 정 과장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가영은 정말로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우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영을 베국인에 추천해 주었던 동료들은 결과를 보고 사내 메신저로 하나 둘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박 대리, 어떡해? 서 팀장님 진짜 너무한다. 일은 박 대리가 다 하는데, 정 과장이 무슨 말이야.」
「ㅎㅎ… 괜찮아요. 정 과장님 그래도 작년에 비해서 열일하시긴 했잖아요.」
게다가 거기에는 어느 정도 정 과장을 달래주기 위한 목적이 있기도 했을 것이다. 사실 올해 초 승진 대상자에 오른 사람 중에는 정 과장도 있었는데, 거의 될 것이 확실시 되는 상황에서 TO가 꼬여 막판에 미끄러진 것이다. 서 팀장은 정 과장을 위로하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 한동안 국민서점 1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면담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매일같이 목격되던 시기가 있었으니까.
서 팀장의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마음을 다잡은 정 과장은 미래사업전략 TFT에도 자원해서 합류했다. 그런 만큼 애초에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시켜서 합류했던 가영과는 게임이 안 되는 승부였을지도 모른다. 베국인 후보 자체는 동료들의 추천으로 올라갈 수 있지만, 선정에 최종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각 부서를 관리하는 팀장의 의견이 가장 큰 역할을 했으니까.
‘뭐, 그런 거지.’
머리로는 분명히 이해하려고는 했는데 속은 쓰렸다. 괜찮은 척… 못 하겠다. 그래도 어쩌겠나.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고개 한번 털고 나서 다시 엑셀 화면을 켜는데 스마트폰에 띠링- 하고 알림이 떴다.
「급여(09월) 입금 2,872,329원 」
월급이다.
전월에 받은 금액하고 똑같았다.
‘일은 3배를 했는데.’
무심코 든 생각에 가영은 무척 울적해졌다.
베국인 발표 이후로 수없이 맘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노력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솔직히 상은 진짜 아무 상관이 없다. 이깟 상 받고 싶었던 게 아니었으니까.
가영이 원했던 것은 그저 증거였다. 자신이 몸이 부서져라 일하고 있음을 회사가 어떻게든 알아주고, 보답해주려 노력한다는. 우리의 관계가 일방이 아니라 쌍방이라는 그런 사소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뭔가?
전월과 똑같은 월급이었다.
파트장의 대체 인력이 들어올 때까지 아마도 이런 삶은 기약이 없이 이어질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과연 대체 인력이 들어온 다음에도 이 삶이 끝나긴 할까? 그냥 다 허무하고, 속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PC화면에 켜져 있던 인트라넷 화면의 베국인 공지 밑에 올라온 다른 공지가 눈에 띄었다. 그 또한 오늘 올라온 새 글인 듯, 제목 옆에 주황색 N자가 번쩍이고 있었다.
「국민서점 정년퇴임 사우 공로패 전달식」
가영은 무심코 그 글을 클릭했다. 글을 클릭하자마자, 대회의실에 모인 CEO와 올해 정년퇴임을 앞둔 사우들의 사진이 떴다. 현수막 아래에서 밝게 웃고 있는 그들은 가영의 아버지인 병호보다 더 젊어 보였다. 아니, 실제로도 어릴 것이었다.
이제 만 60세인 그들은 아직 한창 창창하고, 얼마든지 더 일할 수 있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가영은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저분들은 이제 회사를 나가면 뭐할까?’
그냥 쉴까? 치킨집을 차릴까? 아니면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딸까?
손주들을 봐주고 아들 딸의 살림을 봐주면서 소일거리를 할까?
가영은 괜히 궁금해졌다.
100세 시대에, 만 60세는 일을 그만두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생각해 보면 가영도 아직 만 40세가 되지 않았는데. 60세에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가영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내 온 만 34년에 추가로 6년 만큼의 까마득한 삶이 더 펼쳐져 있지 않은가.
올해 만 나이로 62세가 된 병호도 자신의 식당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60줄에 들어선 그의 삶에서 ‘일’은 아직도 커다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병호도, 가영도 일하지 않는 병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괜히 다시 울적해져 왔다.
가영은 이제 35세고, 정년 퇴임까지는 대략 25년 남았다. 가족 같은 국민서점의 특성상 가영이 먼저 박차고 나가기 전까지 회사는 가영을 품어줄 것이다. 그녀가 만 60세가 될 때까지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한 해 한 해를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그녀 또한 정년퇴임 기념식 참석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그때까지 매일매일 이렇게 일하고 나면 과연 그때의 내게 뭔가 남는 것이 있을까? 매년 인트라넷에 올라오는 정년 퇴임식 단체 사진에 찍히는 것 외에, 그 때쯤의 내가 확실하게 ‘박가영’이라는 이름으로 남길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년 퇴임하는 본인의 모습과, 앞으로의 회사 생활은 마치 눈 앞에 보이듯이 빤히 그려지는데 비해서. 만 60세가 되어 회사를 떠난 이후 본인의 모습만큼은 놀라울 만큼 막막한 암흑에 가까웠다.
***
그날 저녁, 가영은 집에 가는 길에 집에 떨어진 생필품을 사러 집 앞 다있소에 들렀다. 물건을 여러 개 집어 캐셔로 가는데, 캐셔 뒷편의 벽에 A4 용지 사이즈의 포스터가 크게 붙어 있었다.
「다있소 XX점 점원 상시 모집 : 최저 시급, 휴일 근무 수당 보장」
그러고 보니 그 포스터는 항상 그 자리에 붙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가영이 이 다있소 매장에 자주 들리기 시작한 이래로는 항상 말이다. 여태까지는 가영이 관심이 없어서 들여다보지 않았을 뿐.
그런데 왜 하필 오늘따라 그 포스터가 눈에 들어온 것일까?
가영은 다있소 봉다리를 손목에 건 채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가면서 알바 사이트에 한번 접속해 보았다. 최저 시급과 휴일 근무 수당을 따져서 계산해 보니, 한 달 동안 다있소에서 하루 7시간씩, 주말까지 껴서 일하면 그래도 월에 한 200 가까이 벌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왔다.
가영의 마음속에 늘 두루뭉술한 형태로 떠다니던 의문에 뭔가 형체가 잡히며, 구체화되었다.
‘내가 당장 회사를 나가서 알바를 뛰어도, 이만큼은 벌지 않을까?’
금액만으로 따지면 결코 가영이 지금 받는 월급을 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가영이 지금 직장에서 직급과 역량에 비해 과도한 업무를 소화하며 받는 스트레스까지 따져 보면….
오히려 깔끔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최저 시급을 받는 다있소 아르바이트 쪽이 더욱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가영은 다있소의 캐셔에 붙어 있는 포스터의 세부 사항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는 머릿속에 새기듯 한 가지 사실을 되뇌었다.
‘다있소는 항상 사람을 뽑는다.’
***
「응모 후 수정이 불가능합니다. 작품 응모를 완료하시겠습니까?」
노트북 위에 뜬 회색 팝업창의 문구를 보며, 가영은 잠시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이 날이 온 것이다. 그동안 모든 남는 시간을 올인하여 미친 듯이 썼던 바로 그 소설을 제출하는 날이.
솔직히 잘 썼는지는 모르겠다. 주변의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준성은 가영이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모르고, 절친인 은수와 인경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간을 할애해서 A4 20페이지짜리 분량의 소설을 읽어준다는 것은 아무리 친구 사이여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직 가영은 자신의 이름을 건 소설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이 지극히 부끄러웠다. 물론 이것이 M출판사의 편집부의 심사위원들의 손에 들어가는 이상, 이정아 팀장이 이 글을 어떻게든 보게 될 순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가영은 이 여정을 무사히 끝낸 것이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예’라는 버튼을 누르자, 잠시 로딩이 돌더니 ‘응모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안내와 함께 페이지가 응모작 제출 페이지로 돌아갔다. 가영은 그대로 상체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보았다.
뿌듯함과 해방감, 약간의 기분 좋은 탈진감이 상쾌함과 어우러진 그런 감각이었다.
이건 '내 것'이었다. 가영이 혼자서 매일 짬을 내서 기를 쓰고, 갖은 용을 써서 이뤄 낸 결과였다. 이 소설이 잘 되든, 잘 되지 않든, 누가 그 사실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지 간에 그 결과는 가영이 혼자 오롯이 짊어지는 것이었다.
가영은 그 점이 좋았다. 성공이든 실패든, '내 것'으로 남는 결과물이 있다는 것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영이 최근의 회사, 회사, 회사의 일로만 가득했던 삶 속에서 악착같이 빈틈을 찾아 소설 작업에 몰두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허전하기도 했다. 그토록 몰두했던 소설 작업이 이제 끝났다는 것이 말이다. 이제 내일부터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버거운 회사 일과 몸이 세 개는 되어야 할 것 같은 스케줄에 다시 스스로를 욱여넣고, 탈출구 없는 날들을 기약 없이 살아가야 한다.
어쩐지 막막했다. 오늘 보았던 것들이 가영의 머릿속에 어지럽게 뒤엉켰다. 베스트 국민서점인 상 수상자 명단에 오른 정 과장의 이름과, 그 밑에 떠 있던 정년 퇴임 대상자들의 모습. 그리고 가영의 얄팍한 기억에 따르면 1년 365일 그 자리에 붙어 있었던 것이 확실한 다있소의 점원 채용 공고. 그리고 어쩌면, 혹시 어쩌면 수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그녀의 인생에 불확실성을 부여한 생애 첫 단편 소설.
‘내 것으로 남는 것과, 남지 않는 것.’
가영은 눈을 감았다.
어차피 지금 고민해 봤자, 당장 답이 나올 것도 아니었으니까.
***
다음 날 오후, 서 팀장이 다시 회사 앞 카페로 가영을 불러낸 것 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 범위였다. 서 팀장이 작년에 승진이 누락되었던 정 과장을 달래느라 이 카페에 상당한 돈을 지출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니까. 아마도 법인카드였겠지만 말이다.
가영은 아무래도 상당히 유력한 후보였던 모양이다. 평소에 그렇게 친근하지 않은 사이였음에도 이렇게 서 팀장이 따로 그녀를 불러 친히 위로까지 해 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서 팀장을 따라 카페 안으로 들어섰을 때까지만 해도 가영은 나름대로 제 마음을 다잡은 상태였다.
솔직히 가영이 최근 서운한 일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어차피 베국인도 물 건너 간 거, 금전적인 보상이나 직급 보상은 애저녁에 글렀고.
이렇게 된 이상 서 팀장의 입에 발린 입 연고 처방이라도 받으면 그나마 갈수록 사라져 가는 의욕에 심폐소생술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입 연고는 가영이 회사 생활 중에 만들어낸 말로, 확실한 보상 대신 대충 말로 위로하거나 격려하며 때우려는 상사의 행동을 의미한다.) 겸사겸사, 이 기회를 이용해서 파트장 대체 인력에 대해서 ASAP로 뽑아 달라고 강력하게 어필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모르는 척, 그러나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오늘도 1+1 아메리카노와 함께 상사와 자리에 마주 앉은 가영이었건만. 앉자마자 서 팀장이 꺼낸 말은 충격적이었다.
“박 대리, 기쁜 소식이 있어.”
“…네?”
저도 모르게 새된 소리가 튀어나갔다. 가영은 그만큼 깜짝 놀랐다. 서 팀장은 혼자 무슨 다른 세상에 사는 걸까? 이 상황에서 가영이 기뻐할 만한 소식이 과연 뭐가 있다는 말인가?
서 팀장은 마치 대단한 먹이라도 물어온 맹수처럼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영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런데 운만 띄워 놓고는 가만히 있는 게 아닌가? 마치 가영더러 자신에게 그게 뭔지 한번 물어봐 달라는 듯한 그 모습에 가영은 어이가 없었다.
‘그냥 먼저 좀 말해주면 좋으련만….’
그렇지만 말을 안하니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가영은 그가 원하는 대로 티키타카에 응해주기로 했다.
“무슨 소식인데요?”
“파트장 대체 인력이 정해졌어.”
“네? 진짜요?”
가영이 반색했다. 그것은 정말로, 정말로 기쁜 소식이었다.
‘존버 끝에 낙이 오는구나!’
가영은 반가운 마음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군데요? 어디서 오는데요?”
가영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최근의 서점 동향을 훑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L북스 MD 중에 과장급 한 분이 퇴사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 같은데, 설마 그분이 오시는 걸까?’
기대감으로 가득 찬 가영의 눈빛이 서 팀장의 입술을 향했다. 서 팀장 또한 기분이 좋은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아, 이번 공채 신입 중에 제일 똘똘한 애야.”
기쁨으로 한껏 들떴던 가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마치 누가 방금 전 가영의 웃는 얼굴에 그대로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그런 가영의 반응을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몰라도 서 팀장은 태연하게 뒷말을 이었다.
“내가 특별히 인사 팀장한테 부탁해서 끌어 온 거니까, 박 대리가 맡아서 잘 교육시켜 봐.”
“파트장 자리가 비었는데…. 신입을 주신다고요?”
대답하는 가영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영은 여태까지 서 팀장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말했다. 파트장이고, 과장 급 TO인 만큼 꼭! 꼭! 경력직이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가영의 반응이 서 팀장의 예상보다 훨씬 싸늘했는지, 그가 멋쩍어 하며 구구절절 설명을 시작했다.
“아 나도 인사팀에 어떻게든 경력직 달라고 어필하긴 했지. 나도 직접 백방으로 알아봤어. 그런데 동종업계 경력직 중에서 데려올 만한 사람이 없고, 다른 업계에서 데려오기엔 내부 규정상 경력을 다 인정해줄 수 없었어. 그러면 또 연봉이 깎이잖아? 이런 저런 상황을 생각하다 보니 부득이하게 신입으로 대체가 된 거고…”
그래서 서 팀장 본인도 나름대로 인사팀과 ‘딜’을 했다고 한다. 공채 신입들 중에서 우리 부서로 배정될 사람을 최우선으로 선택할 수 있는 드래프트 권을 말이다.
그 권리로 명문대를 나온 데다 면접 성적도 우수했던 최우수 신입 사원을 데려오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과장 급의 TO 였던 만큼, 이번에 받게 된 한 명 외에 사원 급 TO를 한 명 더 추가로 받아 내년 온라인 영업팀 사업계획의 인력 안에 추가하기로 했다고 했다.
과연, 서 팀장의 입장에선 '딜'이긴 했다. 그로서는 잃을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다만, 실무를 하는 MD 선임은 그가 아니지 않은가?
가영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노려보았다. 서릿발 같이 차가운 분위기에도 서 팀장은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말했다.
“박 대리가 직접 자기 사람 키운다고 생각하고 잘 가르쳐봐.”
그러면서 서 팀장은 덧붙였다.
“우리 MD들은 말이야. 다 좋은데 너무 각개전투야. 개인 플레이라 그런가 사수-부사수 개념도 명확하지가 않고, 끈끈하지가 않잖아?”
“….”
“그러니 이번 기회로 국민서점만의 MD들 분위기도 새롭게 한번 만들어 나가 보자고. 사람 하나 처음부터 제대로 국민서점 스타일로 키워내 보면서 말이야. 아마 분명히 박 대리한테도 좋은 경험이 될 거야.”
“… 팀장님.”
가영이 입을 열었다. 속에서 차오르는 뭔가를 간신히 억누르는 듯, 목소리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저에게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반항적인 뉘앙스에 서 팀장의 표정이 돌변했다. 서 팀장은 눈썹 끝을 올린 채로 가영을 주시했다.
“제가 사실 그동안 말씀을 안 드려서 그렇지, 파트장님 퇴사하시고 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파트장님 업무를 급하게 받아서 하게 된 상황에서 미래사업전략 TFT에 들어갔고요. 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요. 다 일시적인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말을 계속할수록 떨림은 잦아들었다. 가영은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진작에 이 이야기를 서 팀장에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지금 이 타이밍이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래도 저 진짜 열심히 했어요. 1월부터 8월까지 8개월 연속 목표 매출 초과 달성했고, 9월도 이제 이틀 남았는데 제 분야 매출은 이미 100% 넘겼어요.”
여러 악조건이 겹친 상황에서도 가영이 착실히 매출 목표를 달성한 것은 사실이었다. 작년에도 9개월 연속 초과 달성까지는 못했었다. 가영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성과를 낸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다만 회사 쪽에서도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자부심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상사로부터 확인받고 싶었을 뿐이다.
어차피 이 놈의 회사, 성과급을 기대할 수도 없고. 승진은 어차피 가영의 차례가 아니고.
그러니까 이런 상황에서, 가영이 바랐던 것은 그저 가영의 성과를 인정하고 대우해 주는 상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뿐이었는데. 정말로 줄 수 있는 게 입 연고 뿐이어도 괜찮았단 말이다.
“파트장님 퇴사하시고 일 몰렸을 때. 그 상태에서 미래사업전략 TFT 합류하게 됐을 때. 팀장님이 PM 맡은 세부 프로젝트 땜빵 뛸 때.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버텼어요. 일시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팀장님은 그런 저에게 같이 일할 사람… 경력직으로 뽑아 달라는 부탁 하나를 못 들어주세요?”
생각하다 보니 가영은 울컥했다. 잠시 가영이 말을 멈추고 감정을 추스르는데, 서 팀장이 입을 열었다.
“알지, 지난 달부터 갑자기 상황이 그렇게 돼서 박 대리 많이 고생한 거.”
“…”
“매출 달성도 잘했어. 그런데 박 대리 분야는 원래 메인이고, 올해 소설 쪽은 특히 추세가 좋았잖아. 분기별로 대형 신작도 있었고. 우리뿐 아니라 경쟁사도 소설 매출은 다 기본적으로 예년의 10%는 올랐다고 하던데.”
서 팀장은 지금 9개월 연속 매출 달성을 목전에 둔 MD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차피 네가 아니었어도 오를 매출이었다.’
즉, 자연 성장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만큼 MD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말이 또 있을까?
서 팀장은 지금 MD에게 가장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었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가영의 마음에도 짙은 현타가 드리웠다.
자연 성장. 서 팀장의 말 대로라면 가영은 대체 왜 지금 MD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왜 바쁜 일과를 쪼개 출판사를 만나고, 합동 굿즈를 기획하고, 시즌 별로 통합 프로모션을 기획하면서 개발자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걸까.
그럴 거면 아예 지금 당장이라도 미래사업전략 TFT로 가영을 완전히 전배시킨 다음에 소설 분야도 다른 MD들한테 대충 하라고 나눠주면 될 것 아닌가?
어차피 여건이 좋아서 올해는 자연적으로 성장할 것이 뻔한 분야라면 말이다.
MD 업무를 한지 11년차다. 무엇을 하든, MD는 가영의 본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와서 상사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입증시켜야 한다는 사실은 허탈해서 쓴웃음이 날 정도였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지금 여기 앉아서 이런 구차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걸까?’
그 때였다. 상대방이 빡친 게 보이면 입을 적당히 좀 다물어줬으면 좋겠는데, 눈치 없는 서 팀장은 기어이 말을 한마디 덧붙이며 밉상에 쐐기를 박았다.
“오히려 에세이 분야 매출은 계속 미달이 나고 있잖아.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박 대리가 그 쪽에 더 신경을 써 줬으면 했어.”
그렇게 치자면, 에세이 분야는 소설 분야의 반대 케이스였다. 기대했던 신작의 성적이 저조하기도 했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경제/재테크 쪽으로 쏠리면서 에세이 분야의 성적이 대체적으로 저조했다. 작년 말부터 이어진 분야 침체 분위기가 회복되지 않아 담당 MD였던 파트장이 퇴사하기 전부터 목표 매출이 이미 꾸준히 미달인 상태였다.
파트장이 퇴사할 때까지만 해도 에세이 매출로는 아무 말도 안 하더니, 가영이 임시로 대신 분야를 맡게 되니까 바로 매출 미달 지적이란 말인가?
‘매출 성장은 자연 성장이고, 매출 하락은 MD 책임이고?’
그 생각을 하니 가영은 숨이 턱 막히고 속이 메슥거렸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문득 생리적으로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에 박 대리가 파트장 대행까지 하게 된 것은, 그것이 박 대리에게 새로운 도전이 되었으면 했어서였어. 미래사업전략 TF에 박 대리를 추천한 것도 그래서였고.”
“….”
“박 대리야 이미 뭐 본인 일은 잘해주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하던 일만 계속하면 발전이 없잖아. 그리고, 언제까지 실무만 할 거야? 박 대리도 슬슬 관리자 될 준비 해야지.”
“….”
“박 대리가 그동안 힘들었다는 건 알아, 알겠는데…. 어쩔 수 없잖아. 이미 MD 선임이 되어 버렸고. 당분간 힘들겠지만 이런 시기를 겪어 보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땐 앞으로의 박 대리의 커리어에서 아주 큰 성장의 기회가 되어 줄 거야. 위기가 곧 기회라고, 어쩌면 이게 박 대리의 역량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난.”
가영은 기가 막혔다. 어디서부터 반박해야 할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는 빡친 것을 넘어서서 뭔가 좀 멍했다. 어이가 없는 것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답답해서 입을 벙긋거리던 가영이 겨우 한 마디를 쥐어짜듯 내놓았다.
“파트장님이 하시던 일을 임시로 받아서 하고 있긴 하지만 저는 아직 직급이 대리인데요…”
그러자 서 팀장이 눈을 부릅떴다. ‘어디서 감히 그런 생각을 하냐’는 듯 단호한 표정이었다.
“박 대리, 자꾸만 자신의 직급에 스스로를 한정 짓지 마! 일에 대한 열정이 중요한 거지.”
“…”
“내가 이렇게 박 대리에게 기대하는 것은, 박 대리를 장차 우리 회사를 이끌어 갈 기둥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야. 지금 당장 힘들다고 약한 소리 하면 안 돼. 나는 박 대리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아.”
“…”
“이게 다, 박 대리가 그만큼 훌륭한 인재라서 그런 거야.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박 대리가 좀 더 성장하길 바라는 내 마음을 모르겠어?”
성장.
‘성장이라….’
가영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고 생각했다. 가영의 나이가 서른다섯이다. 이 회사에 다닌지는 11년 차가 되었다. 문학파트 파트장이 퇴사한 뒤로 MD들 중에는 선임 급이 되었다.
사람이 없다고 대리에게 일은 과장 급으로 시키면서, 월급은 똑같이 대리 월급으로 준다. 인센티브도 없다. 그것을 서 팀장은 성장을 위한 시련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이 시련은 언제 끝나는 것일까?
서 팀장의 기준에 맞추려면 대체 언제까지, 어디까지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했다.
‘이 회사를 받치는 ‘기둥’이 될 때까지?’
가영은 다시 천천히, 조용히 고개를 들어 눈앞에 앉은 서 팀장을 쳐다보았다. 시선을 올리다 눈에 채인 그의 얼음 컵에 담겨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늘 그렇듯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가영은 생각했다.
‘기둥’이 된다는 것은, 관리자가 된다는 것일까?
‘서 팀장이 지금 말하는 대로 죽을둥 살둥 발버둥치며 노력해서 ‘성장’하면, 결과적으로는 내가 서 팀장처럼 된다는 것일까?’
… 그렇다면 나는, 기둥이 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영은 미래에 서 팀장이 된 자신의 미래를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서 팀장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과장, 대리 급 직급으로 가영처럼 실무를 보고 있는 국민서점의 직원들 모두가 나중에는 국민서점에 뼈를 묻고 싶어 할 거라고. 누구나 착실히 실무에서 존버하면서 관리자 루트를 밟아 서 팀장과 같은 ‘팀장’ 직함을 얻고 싶어 할 거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었다.
가영은 서 팀장처럼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싫었다. 서 팀장이 국민서점의 기둥이라면, 가영은 심플하게 기둥의 재질이 아니었다. 재직 인원 몇 백 명 규모의 기업을 받치는 기둥이 되기에는, 인간 박가영은 너무 얄팍한 사람이었다.
가영이 원한 것은 ‘넌 장차 우리 회사의 기둥 급’이라는 원대한 비전이 아니었다. 그저 ‘힘든 상황에서도 매출 달성하느라 수고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어렵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따뜻한 말 한마디 뿐이었다. 정말로, 그것만 들었어도 가영은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대신 그녀에게 돌아온 건 무엇인가?
분야 매출 9개월 연속 초과 달성을 해놓고도, 꽁무니가 빠질 정도로 서 팀장이 저질러둔 미래사업전략 TFT의 수습을 해도. 더 많은 일을 쳐낼수록 비례해서 계속 높아지는 기준과 ‘성장’에 대한 요구다. 거기에 이제 완전 0부터 시작하는 신입 사원의 사수 노릇까지.
열심히 일해봤자 뭐하나? 인정도 못 받는 기분인데.
자꾸만 자꾸만 더 많은 것을 요구해 오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만큼 앞으로도 살아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여태까지 살아오던 대로 살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노력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서 팀장의 ‘성장’의 기준에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순간, 가영의 머릿속에 홀연히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빨간색 프레임으로 테두리가 그어진, 하단에는 익숙한 로고가 그려져 있는 A4 사이즈의 이미지. 바로 어제 보았던 그 이미지.
「다있소 XX점 점원 상시 모집 : 최저 시급, 휴일 근무 수당 보장」
격하고, 충동적인 생각이 뒤따랐다.
여기서 이렇게 ‘미래의 기둥’, ‘장차 우리 회사를 이끌어 갈 훌륭한 인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혹사당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월급은 똑같고, 나는 회사 일에 더욱 숙련된 사람이 될 뿐인데. 그게 정말로 ‘나’의 ‘성장’일까?
회사 입장에서는 물론 기쁘겠지만, 그게 나에게도 ‘내 것’으로 남는 무엇이 되어줄까?
차라리 그 시간에, 회사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한다면, 인생에 더욱 가치 있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있소에서 일하면서 회사 월급보다 절댓값은 작은 월급을 받더라도, 적어도 시간이 흘러도 ‘내 것’으로 남는 뭔가를 찾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더 이상 서 팀장에게 말대꾸하기도 싫었다.
어차피 끝나지 않는 담론이었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언젠가 인터넷에서 본 직장인의 무한궤도 짤처럼. 이것은 도저히 뚫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다.
가영의 목에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걸려있었다. 그녀가 직접 칼로 이 고리를 댕강 끊고 나서지 않는다면 지금 이 대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고 맴돌 것이다. 서 팀장은 그 매듭을 쥐고 가영을 계속해서 흔들 것이다. 가영이 그 매듭에 스스로 묶여있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가영은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팀장님, 저 언제까지 성장하나요?”
서 팀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묻는 가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또박또박했다. 그런 가영의 모습에 서 팀장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너무 놀랐는지 가영의 물음에 뭐라 대꾸도 못했다. 가영은 지금 막 제 목에 묶인 매듭에 칼을 가져다 댄 참이었다.
“제가요. 2차 성징이 남들보다 좀 빨리 온 편이거든요?”
가영은 제 손바닥을 쫙 펼쳐서, 맞은편에 앉은 서 팀장의 눈앞에 들이댔다.
“보시다시피 제 성장판이 닫힌 지 이미 오래라서요. 더 이상 팀장님이 원하시는 만큼 성장을 못하겠어요.”
가영의 손바닥을 눈앞에 마주한 서 팀장은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그저 눈썹만 꿈틀거렸다. 하얗게 질리는 안색으로 보아, 그는 이미 다음에 이어질 가영의 말을 직감한 것 같았다.
“저, 퇴사하겠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