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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Jul 03. 2022

09. AND JUST LIKE THAT,

she was gone for good.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09. AND JUST LIKE THAT,



「진짜? 진짜 그렇게 말했다고?」

「응. 서 팀장 표정 장난 아니더라.」

「대박. 박가영 너 대단하다! 나는 솔직히 옛날부터 네가 뭐라도 한 건 할 줄은 알았는데 그렇게 대놓고 말했을 줄이야…」

「좋은데? 나 왜 속 시원하냐 ㅋㅋㅋ 너 여기 와서 우리 팀장한테도 대신 말해주면 안 돼?」

「가능할 듯. 요새 그런 서비스도 있대, 대리로 사표 제출해 주는 거」

「박 대리의 대리 사표 제출 서비스, 좋네ㅋㅋㅋㅋ」


 그날 오후, 가영은 자리에 돌아와 앉자 마자 은수와 인경과 함께 있는 단톡방에 「나 오늘 퇴사 지름」이라는 폭탄을 투하했다. 이후 채팅창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이런저런 메시지와 짤과 각종 퇴사티콘이 뒤섞여 빠르게 메시지가 쌓이고 있었다. 구성원 전원이 직장인인 것을 고려해 봤을 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리젠 속도였다. 이런 들뜬 분위기에서 가영은 그녀들에게 채팅으로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막막함을 느꼈다. 그때,  인경이 불쑥 먼저 제안해 왔다.


「야야, 이런 건 솔직히 만나서 들어야 돼. 말 나온 김에 오늘 저녁 종로에서 어때?」

「콜.」

「나도 콜! 오늘 퇴근이 좀 늦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그럼 너네 먼저 보고 있어 봐. 나도 금방 갈 테니까.」

「ㅇㅋ」


 가영은 시원하게 ‘콜’을 날렸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직전까지 서 팀장을 따라 카페에 갈 때까지만 해도 천근만근 무거웠던 기분이 한없이 가벼워졌다. 그러면서 한동안 일에 치어서 잊고 살았던 감각이 되살아 났다. 


퇴근이 기다려지는 느낌.

회사 일이 끝나면 뭔가 저녁에 신나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기대감.


 인경의 말이 맞았다. 역시 이런 날에는 맥주 한 잔이 빠질 수 없었다. 여전히 가영의 앞에는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지만, 오늘은 일단 무조건 6시에 칼 같이 퇴근할 생각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이 뭐 내일로 좀 누적되겠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는 이제 퇴사 예정자였으니까.






***



“크-”

“아, 오랜만에 마시니까 진짜 맛있다.”

“너 요새 술 잘 안 마셔?”

“엉. 건강검진 결과가 좀 안 좋아서 요새 좀 자제 중이야.”

“뭐야, 늙었냐?”

“그러게. 우리가 나이를 좀 먹긴 했지.”



 퇴근 후, 가영은 은수와 인경과 함께 종로 3가의 한 술집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은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내부 인테리어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곳은 15년 전 가영이 처음으로 은수의 친구인 인경을 만나 합석하고, 인경의 친구가 된 곳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대학 시절부터 오래된 단골이었다.


  인파로 가득한 가게에 세 사람이 가게의 문을 짤랑 거리며 들어서면 주인 아주머니는 이제 척하면 척하고 알아서 대왕 계란말이 한 접시와 함께 소주 1병과 맥주 2병을 가져다주곤 했다.


 세 사람은 각자 한 잔씩 소맥을 말아서 시원하게 들이키며 그간의 근황과 안부를 나누었다. 은수는 최근 아랫사람들이 퇴사해서 일이 몰려 고생 중이었고, 이제는 중간 관리직이 된 인경도 윗 사람과 아랫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이리저리 치이며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의 메인 디쉬는 어디까지나 가영의 퇴사 지름 썰이었다.


 은수와 인경은 가영에게 서 팀장과 대면했을 때부터 퇴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장면을 세세하게 말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가영은 아직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당일 오후의 기억을 최대한 되짚어 가며 최대한 생생하게 당시 상황을 털어 놓았다. 중간 중간 서 팀장의 성대 모사까지 곁들이면서. 그 모습이 마치 1인 2역 연극을 하는 것 같았다. 


 가영이 마침내 은수와 인경의 눈앞에 손바닥을 딱 펼친 채 ‘저 성장판 이미 닫혔다고요!’라고 치자, 은수와 인경은 크-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박수를 짝짝 쳐댔다. 세 사람은 낄낄거리며 각자 소맥 잔을 들어 테이블 가운데에서 짠하고 부딪쳤다. 

은수가 말했다. 


“나도 그동안 회사 다니면서 이런저런 퇴사 썰은 많이 들어봤지만 성장판 들이댄 건 또 처음 본다 야.”


 아직 이야기의 여운이 남아있는 그녀의 표정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경의 경우에는 대기업은 복지도 좋고 분위기도 안정적이어서 한 번 취업하면 다들 정년 퇴임까지 다니는 편이었다. 때문에 퇴사자가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은수는 이직과 퇴사가 잦은 출판계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업계의 온갖 기상천외한 블랙 기업 및 그에 얽힌 퇴사 썰들을 위키피디아처럼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있을 정도였다. 아마 곧 있으면 가영의 퇴사 썰도 은수의 퇴사피디아에 ‘성장판 퇴사’라는 항목으로 업데이트 될 것이다.


“맞아. 이거 블라블라에 올리면 댓글 꽤 달릴지도 모르겠어.”

“미쳤냐? 나인 거 바로 알 텐데.”

“하긴.”


 또다시 소맥 한 잔씩을 말아 들이키며, 세 사람이 키득거렸다. 평일인지라 인경은 H라인 정장에 구두를, 은수와 가영은 슬랙스에 셔츠를 입고 토트백을 들고 있었다. 누가 봐도 퇴근하고 벙개하는 직장인의 모습을 한 3인방이었다. 그래도 세 사람의 표정만큼은 십 몇 년 전 후드티에 청바지, 캡 모자와 뿔테 안경을 눌러쓴 채 슬리퍼를 끌고 해장술을 마시러 다니던 20대 때의 장난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서 팀장은 뭐래?”

“일단 오늘은 말고, 집에 가서 다시 천천히 생각해 보고 다음에 다시 말해보자더라.”

“회피형인가 보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가 보다.”

“그러게 진작 하는 말 좀 들어줬어야지. ”

“좀 안타깝긴 하다. 솔직히 그 사람이 요령이 없어서 그렇지, 여우같이 말만 잘했어도 너 계속 부려먹을 수 있었을 텐데.”

“맞아. 솔직히 네가 뭐 많은 거 바랬냐? 돈을 달랬어, 승진을 시켜달랬어? 그저 '수고했다, 요새 너 고생하는 거 안다.' 뭐 그런 따뜻한 말 한 마디면 또 알아서 소처럼 일하는 애를...”


 십 년 이상 지기의 내공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도 않으면서도 이렇게 자신과 상사의 관계를 꿰뚫어 보고 있다니. 가영은 친구들의 통찰력에 새삼스레 감탄했다.


“그러니까. 근데 그 말도 좀 웃겨. 나는 다시 생각할 게 없거든.”

“그것도 그렇네. 어차피 바뀔 것도 없는데…”

“냅둬 봐. 그 팀장 쪽에서도 뭔가 생각하고 새로 딜 걸어올 수도 있어.”

“그럴 거였으면 내가 여태까지 요청했던 건들 중에 진작에 뭐든 하나라도 들어주지 않았을까? 업무 분장이든, 경력직 채용이든.”


 갓 퇴사를 선언한 퇴준생 0일차, 가영의 냉소 레벨은 MAX에 도달해 있었다. 솔직히 서 팀장이 이제 와서 당황해서 어떤 카드를 급하게 준비해 오든지간에 가영으로서는 이미 먹은 마음을 바꿀 생각도 없었다. 그녀의 결심은 이미 확고했으니까.


“그래서, 기분은 좀 어때?”


 인경이 물어왔다. 그 목소리에서 약간의 부러움이 묻어났다. 그제서야 가영의 머릿속에, 인경 또한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 10년 넘게 장기 근속 중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 사람 중에 퇴사를 경험했던 것은 출판사에 있으면서 이직을 자주 했던 은수뿐이었다.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에 다니던 가영과 인경은 이런 일은 자신의 인생에서는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을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나마 이직이라면 모를까, 갈 곳 없는 무작정 퇴사라니.

 그랬기에 가영은 지금 자신에게 기분이 어떻냐고 물어오는 인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영은 잠시 생각에 잠겨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음… 뭐랄까. 식상하겠지만 일단 후련한 게 제일 크고.”

“응.”

“그리고… 솔직히 아직 퇴사를 안 해서 잘 모르겠긴 한데. '왜 진작에 이렇게 사표 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은 들더라.”

“…”

“왜, 인경이 너나 나나 그렇잖아. 우리 직장 둘 다 정년 보장되고. 너나 나나 처음에 합격했을 때 이제 60까진 됐다~ 했던 거 기억 나?”

“그랬었지.”


인경이 쓰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그러고는 갑자기 술이 땡기는지 눈 앞의 소맥 한 모금을 크게 들이켰다.


“20대 땐 진짜 다닐 만했는데, 10년 넘고 과장 다니까 이제 죽을 맛이다. 아무리 정년 보장이어도 이걸 어떻게 20년을 더 버티나 싶어.”

“그러니까. 솔직히 너나 나나, 안정성 보고 들어간 거잖아. 평생 월급 받고 싶었고,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고…”

“….”

“근데, 뭐 막상 퇴사를 해도. 어떻게든 먹고는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그러면서 가영은 집 앞의 다있소 이야기를 해주었다. 은수와 인경은 가영의 생각이 황당하다고 생각하는 듯 웃음을 터뜨렸지만, 가영은 진지했다.


“아니, 근데, 진짜. 돈은 뭐든지 해서 나 하나 먹고살 만큼은 벌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 근데 그게 회사는 아닌 것 같아. 회사는 이제 그만 다니고 싶어.”

“그렇긴 하지만… 아깝진 않아? 그래도 10년이나 되는 경력인데.”


막상 응원하러 나오긴 했지만, 현실주의자인 은수는 그런 가영의 무대책이 조금 걱정이 되는 것 같긴 했다.


“괜찮아. 뭐든 하면 하겠지 뭐.”

“그래서 앞으로는 어쩌려고?”

“일단은 좀 쉴까 해.”


 어느새 조금 취기가 올라온 가영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녀의 목소리는 곧 다가올, 아직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다.


“나 이번에 공모전 때문에 단편 소설 써봤잖아. 솔직히 제출 기한까지 너무 짧게 남았을 때 알게 돼서 제대로 못 쓴 것 같아서 좀 아쉬웠거든. 쉬는 동안에는 일단 글을 좀 더 써보고 싶어.”

“…”

“뭐 그러다 정 안되면…. 진짜 다있소나 쿠퐁 물류센터 알바 뛰어도 되고. 그리고 작년에 이것저것 뭐 많이 배워뒀잖아. 정 안되면 그때 배웠던 것들 중 하나 제대로 파봐도 되고 뭐, 할 건 많겠지.”


가영은 피식 웃었고, 인경은 ‘그래, 너 알아서 잘하겠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은수는 아무래도 맘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더 있는 듯했다. 은수가 물어왔다.


“근데 너, 아버님한테는 말씀드렸어?”


 그 말에 맥주잔을 다시 입에 가져가려던 가영의 동작이 멎었다. 잠시 버퍼링이 걸린 가영을 가만히 보던 은수가 다시 한 번 아픈 질문을 날렸다.


“오빠한테는?”


 가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점심시간 이후 준성으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가영은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들여다 봤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 


아까 회사에서 서 팀장에게 퇴사 통보를 한 뒤 완전히 들떠서 충전하는 걸 깜빡 해버린 것이다. 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잔여 배터리가 이미 간당간당했던 게 떠올랐다. 아차 싶었던 가영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런…. 완전 까맣게 잊고 있었네.’


 조금 전까지 가영을 응원하는 자세였던 인경 또한 가영에게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게. 너 주식, 코인으로 돈 날린 것도 아직 말 안 했다며. 직장까지 없으면 진짜 안 데려가는 거 아니냐?”


 그제서야 가영은 자신의 퇴사 선언이 불러 후폭풍의 종류가 얼마나 될지 떠올렸다.

 솔직히, 지금 바로 이 순간까지 그것들은 가영의 생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다.


 오늘 팀장 앞에 홧김에 손바닥을 들이댔던 그 순간, 가영의 머릿속에는 아버지도, 남자친구도, 결혼도 … 그 어떤 것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그야말로 뒷일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질러버린, 홧김퇴사였으니까.







***




 그날 밤, 종로에서 술을 마신 가영이 향한 곳은 제 집이 아니었다. 가영은 은수와 인경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굳이 취한 몸을 이끌고 끊기기 전의 지하철 막차를 잡아 탔다. 그녀가 향한 곳은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준성의 집이었다. 


 맨 정신은 아닌 상태였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7년 사귀면서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집이었으니까. 비척비척 움직여 준성의 집까지 도착한 가영은 현관문 초인종을 눌렀다.


 밤 12시가 넘은 늦은 시간이었다. 방의 절반을 채우는 작은 슈퍼싱글 침대에 누워 있던 준성은 갑작스러운 벨소리에 놀라 발가벗은 몸을 대충 트레이닝팬츠에 구겨 넣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현관문 너머의 소음으로 대충 짐작할 수 있는 비몽사몽의 사투 끝에 준성이 문을 열었다. 자다 깬 듯한 눈에는 졸음이 잔뜩 배어 있었다.


“가영이 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오빠.”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가영이 준성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솔직히 지금 가영의 모습은 최근 준성이 본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가영은 지금 정말로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용감하게 퇴사도 질렀겠다. 친구들과 기분 좋게 퇴사 축하주도 거하게 마신 참이었다. 


 반면 강준성은 지금 무척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이렇게 느슨하게 풀어진 가영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로서도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신기하긴 했지만, 평소의 가영 답지 않아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특히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적은 7년 사귀면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특히 이렇게 소주 냄새가 진동하는 것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준성이 코를 킁킁거렸다.


“너 술 마셨어?”

“응. 쪼끔.”

“조금? 이게 어디 봐서 조금이야?”


 준성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 모습이 마치 가영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 


“너 아까 전화는 왜 안 받은 거야? 내가 몇 번이나 했는데. 안 받아서 메시지 남겼는데 읽지도 않고.”

“폰 충전 깜빡해서 꺼졌어. 나중에는 또 술 마시느라고…”

“뭐? 지금까지 마신 거야? 누구랑?”

“은수랑… 인경이랑….”


 준성은 어쩐지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어차피 걔네 말고 같이 마실 사람도 없긴 했다. 지난 7년 간의 교제 기간 동안 준성이 파악한 박가영의 인물관계도는 평소 지극히 협소했기 때문이다. 


“일단 들어와.”


 가영은 준성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준성의 방 한 구석에 놓인 서랍에서 익숙하게 자신이 예전에 가져다 둔 여벌의 옷을 꺼냈다. 그리고는 욕실에 들어가 옷을 벗고 이를 닦고 씻고 나왔다. 다행히 씻는 동안 취기가 좀 가신 것 같았다. 가영은 젖은 상태로 나와 원룸 바닥에 앉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톡톡 말렸다.


 준성은 이 상황이 기가 막혔다. 사실 오늘 퇴근 시간에 가영이 연락이 안되긴 했지만 그래도 가끔 이런 상황이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던 참이었다. 가영이 요새 회사 일이 많이 바빠져서 그런지 평소보다 정신이 없어 보였으니까.  


 가끔씩 이렇게 가영이 연락이 안되는 경우에는 다음 날 아침에 확인해 보면 메시지가 와 있고는 했다. 그래서 준성은 일단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박가영 본인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직접 벨을 누르고 등장할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지금 시간 새벽 1시. 준성은 가영의 돌발 행동이 뭔가 불길했다. 일단 재워야 할 것 같았다. 


“다 씻었어? 얼른 머리 말려. 나 내일 6시 반 출근이야.”


그 때였다. 가영이 갑자기 동작을 뚝 하고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준성을 향했다.


“오빠, 나 할 말 있는데.”


 가영의 표정과 명료한 말투를 보니 그녀는 어느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술은 다 깬 것 같았다. 이건 이제, 상황이 더 좋지 않았다. 저 말은 가영이 준성과의 관계에서 어떤 불만이 있을 때, 속에 꾹꾹 담아놨다가 용량이 한계치에 다다랐을 때 폭발하듯 쏟아내기 직전에 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즉, 싸움의 전조였다. 준성은 긴장했다. 무엇보다 지금 이 시간에 싸우고 싶진 않았다. 이 원룸은 벽도 얇았기 때문이다.


“너 취했어. 일단 자고 내일 얘기하자.”

“아냐, 나 지금 말할 거야.”


 어떻게든 상황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가영은 남의 속도 모르고 고집을 부렸다. 준성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얘가 오늘따라 왜 이래?’


 그렇지만 지금 준성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영의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이 상황을 스무스하게 넘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았다. 


 ‘뭔지는 잘 몰라도 대충 들어주고 빨리 재워야겠다.’


 체념한 준성이 물었다.


“그래, 뭔데?”

“나, 퇴사하려고.”


 그 말을 들은 준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제 손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눈 앞에 두어 번 흔들어 보였다. 


‘얘가 아직 취했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영의 눈빛도 말투도 너무나 또랑또랑한 평소의 그녀였다. 그리고 박가영은 결코 장난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 강준성은 가영과 7년을 만나온 남자친구였다. 

 그의 추측대로 가영은 정말로 진심이었으니까.


 사실은 가영도 잘 모르겠다. 준성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저 가영은 오늘이 가기 전에 준성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오늘 가영은 은수, 인경과 술을 마시면서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가영의 삶이 핀치에 몰려 퇴사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을 때,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그 선택을 응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인생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인 준성도 어쩌면 그렇지 않을까.

 조금 놀랄 순 있지만, 결국은 그녀를 응원해 주지 않을까?


 그녀는 술기운을 빌려 그렇게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여기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렇지만 가영은 그녀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술기운이 필요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애써 간과했다. 보호막으로 둘렀던 그 술기운조차 찬물을 뒤집어쓰고 샤워를 하는 과정에서 이미 다 깨버렸지만 말이다.


“뭐? 퇴사?”


 준성의 목소리가 마치 입안에 머금었던 개구리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가영은 애써 그 떨림을 모른 척하며,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응. 오늘 팀장님께 말씀드렸어.”

“하아….”


 가영의 말에 준성은 한숨을 쉬며 커다란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잠시 그러고 가만히 있던 그가 이내 거칠게 마른세수를 해댔다. 그리고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가영에게 물었다.


“어디 이직… 뭐 그런 거야?”

“아니. 그냥 퇴사하는 거야.”

“너 미쳤어?”


가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속으로 가만히 생각했다.


‘왜 내가 퇴사한다는데 미쳤냐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가영이 입술을 깨문 채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자, 준성의 안색이 도리어 하얗게 질렸다. ‘진짜구나’ 싶었는지 순간 확 화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퇴사하고 뭐 하려고?”

“아직 안 정했어. 그냥 좀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려고.”


 가영은 준성에게 굳이 오늘 그녀가 친구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앞으로 쉬면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얘기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에서 그걸 설명하기에는 그동안 둘 사이에 생략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다 한번에 업데이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컴퓨터를 자주 켜지 않아 몇 달 치나 밀려 버린 윈도우즈 운영체제를 업데이트하는 것처럼 한참의 시간과, 그에 비례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소요될 것이었으니까.


“너 진짜 제정신이야? 어떻게 그런 중요한 문제를 너 혼자서 결정할 수가 있어?”


준성의 얼굴이 점점 울그락푸르락 해졌다. 하얘졌다가, 빨개졌다가 하는 모습이 보통 충격을 받은 게 아닌 것 같았다. 가영은 그런 준성의 모습이 신기한 듯 그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을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가영도 준성과 오래 사귀었지만, 그 동안 그가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우리 곧 결혼 계획도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어떡해?”

“…”

“아니, 백 번 양보해서. 퇴사 고민이 있었으면 미리 나하고 사전에 얘기해 볼 수도 있었던 거 아냐?”

“…”

“넌 왜 항상 네 생각만 해? 너무 이기적인 거 아니야?”


 준성은 이제 말을 하면서 중간 중간에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가영이 침묵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쏟아지는 그의 말은 마치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었다. 가영은 이제 그의 말이 가영을 향해 있는 것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준성의 말은 어느 순간부터 혼잣말에 가까워졌고, 그 말은 오히려 준성 자신을 향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말들이 지금 준성이 느끼는 스스로의 분노를 그라데이션으로 증폭시키고 있었다. 


 급기야, 그는 자신의 솟아오른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런 말을 내지르고 만 것이다.


“모르겠다, 정말. 너같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애랑 결혼해서 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지.”


 순간.

 쏟아지는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던 가영의 안에서 뭔가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얇은 끈이 끊어졌다.


 지금까지 가영이 준성이 당황한 상태에서 머릿속의 생각을 필터 없이 그대로 드러내는 방백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던 것은 그녀도 어느 정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성의 말에도, 그가 지금 느끼는 서운함과 분노에도 그렇게 틀린 구석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금 전의 말은 선을 넘은 것이었다.


 그것은 뭐랄까, 마치 뭔가에 씌어 있던 마법에서 막 풀려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가영은 이 지저분한 원룸 한 가운데 서서 얼굴을 붉힌 채 자신에게 윽박을 지르고 있는,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은 준성의 모습이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이 느낌은…. 

 그래. 맞다.

서 팀장을 앞두고 있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7년이나 사귄 남자친구 앞에서 느끼는 기분이 회사의 상사를 마주한 기분과 똑같다니. 

가영은 허탈한 마음에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삼켰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일까?’


 준성은 뭐라 더 말을 이으려다 입을 막아버렸다. 그리고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가영을 쏘아보았다.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방 안에는 침묵이 흘렀고, 침묵 속에서 가영의 생각도 고요히 흘렀다.


나는 이제 곧 백수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이대로 이 남자와 결혼을 해도 될까?


벌써 상대로부터 저런 말을 들어 버렸는데.


 갑자기 눈 앞에 보이는 준성의 모습에, 예전에 차 안에서 ‘장모님 밥상’을 운운하던 준성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 다음에는 주기적으로 아버지의 식당에 메뚜기 떼처럼 몰려드는 준성의 식구들이 떠올랐다.


 준성은 항상 그랬다. 말로는 ‘다 좋다’고 하면서도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가영으로 하여금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상기시키게 했다.


 그는 항상 가영에게 ‘어머니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 하나로 많은 것을 유추해내곤 했다. 여자 어른과 친근하게 지내는 법을 모른다거나, 차갑다거나, 이기적이라던가. 


 그는 그런 생각을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은 했다. 다만 자신의 생각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하고 꼭 조금씩 이렇게 무심코 티를 내어 가영에게 상처를 주곤 했다.

 가장 최악인 것은, 가끔씩 그가 그럴 때마다 가영은 연인 앞에 선 스스로를 구제불능의 결점 투성이 존재인 것처럼 느꼈다는 것이다. 


 그때, 왜 갑자기 가영의 머릿속에 병호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영은 병호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 병호가 빚쟁이들을 피해 도망을 다니며 노숙을 하던 시절. 추적을 피하기 위해 매번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오던 병호와 지하철역이나 으슥한 상가에서 마치 어둠의 조직처럼 접선했던 어린 시절. 

 그래도, 병호는 가영을 버리지 않았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상황이 아무리 절박했어도, 그는 어떻게든 틈을 내어 가영을 만나러 왔다.


 비록 남들과 같은 형태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하나뿐이었지만. 

 그것은 가영에게는 평범한 가정의 부모 두 사람 분을 넘어서는 사랑이었다.


가영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둔 손등을 들여다보았다. 그 위로 마치 잔상처럼, 어린 시절의 어느 날엔가 봤던 손등의 모습이 겹쳐졌다.


 얼굴을 보이지 않게 캡 모자를 꾹꾹 눌러쓰고,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만원 짜리 몇 장을 꺼내 꼭 쥐어주던 그 꺼칠하던 손. 지금의 가영과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던 그 손은 갖은 고생으로 인해 30대 후반에 이미 나무껍질처럼 말라 있었다.


 그에 비해, 가영의 손등은 이렇게나 깨끗했다. 병호가 자신의 고통을 가영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던 증거가 바로 이것이었다.


 가영은 생각했다.


‘내 아버지가, 내가 이렇게 살기를 원했을까?’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키워낸 딸이 남자친구한테 이런 소리 들으면서 만나는 걸 알면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


 그녀는 한때 궁지에 몰렸던 아버지가 끝끝내 제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니까, 지금 가영을 향해 ‘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누군가의 삶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이 남자와 일생의 동반자가 되는 것은 그런 아버지의 삶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그 생각에 가영의 정신이 마치 최면에서 깨인 것처럼 명료해졌다. 


그냥, 그만하련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30대 중반에, 이젠 직장도 없어질 예정인 주제에.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장모님의 밥상을 차려줄 수 없는 집안의 딸인 그녀와 ‘결혼해 주겠다’고 말하는 남자친구까지 차 버리는 것.


이것은  30대 중반에 애써 일궈놓은 인생 스탯을 다시 디폴트 값인 0으로 돌려버리는 말도 안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여태까지 이런 것들을 다 묻어두고, 억눌러왔던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니까, 일단은 질러야겠다.


 일단 한번 질러놓고 나면, 인생이란 것은 어떻게든 흘러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박가영이 인생을 너무 낭만적으로 보는 걸까? 


홧김에 퇴사를 선언했던, 오늘 낮의 박가영처럼 말이다.


 어쨌든, 박가영은 제 직관을 따르기로 결심했다. 여태까지 그녀의 인생은 너무도 과하게 안정 지향적이었던 측면이 있었다. 그러니까 때로는 그녀의 인생을 구원할 직관적인 결정이 이렇게 한 번에 몰려들 때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럼 우리 헤어지자.”


 가영은 그렇게 산뜻하게 이별을 통보했다. 입을 떡 벌리는 준성의 표정은 서 팀장을 닮아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느낀 감정도 그때와 마찬가지였다. 가영은 지금 그에게 던진 이 말을 사실은 오래전에 진작 말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가영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알고 있다는 확신을 느꼈다.








***



 

 흔히들 말한다. ‘퇴사’는 직장인들이 회사에 대항하여 내밀 수 있는 최후의 카드라고. 그리고 그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그녀가 ‘퇴사하겠습니다’는 말을 꺼낸 직후. 이후 서 팀장은 갑자기 입장을 바꿔 뭐든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다만 본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개선에 대한 그의 의지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의 설득은 무려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니까.


 그러나 가영의 입장은 확고했다.


“한 달이에요. 딱 한 달 동안 인수인계하고 나서 10월 말에 퇴사하겠습니다.”


 결국 서 팀장이 설득을 포기하고 가영의 퇴사를 공론화 한 것은 10월 첫 주가 되어서였다.


 이후 국민서점의 문학파트 MD가 하필 노벨문학상 발표 직전에 사표를 냈다는 사실은 한동안 업계에 소소한 이야깃거리로 돌았다. 어쩌면 이것 또한 은수의 퇴사피디아에 올라갈 만한 일일지도 모른다. 


 인수인계를 전부 마친 뒤 퇴사하던 그날은 화창하기 그지없는 10월 말의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박가영은 35살의 나이에 백수가 되었다.









-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 1부. 낭만적 퇴사 마침.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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