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에게는 가족이 있다.

by 뮤뮤


누구한테라도 매달리고 싶었다(지금의 나는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지만, 당시에는 믿음이 없었다). 기도하고 싶었지만 신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문득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고3일 때, 수능을 앞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할아버지가 황금 보자기로 싼 큰 상자를 내 방 앞에 두고 가시는 꿈이었다. 꿈에서 보자기를 끌러 보지는 못했지만 꿈 이야기를 들은 엄마가 대학에 합격하는 좋은 일이 생길 거 같다고 하셨다. 정말 난 수능을 실수하지 않고 그럭저럭 잘 봐서 대학에 무난히 합격하였다.


“할아버지, 저 암에 걸렸대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저 세상에 계실 할아버지가 들을 수 있도록 힘껏 기도했다. 고3 때 황금 보자기 상자를 주신 것처럼 지금 이 위기에서 날 꺼내 줄 무언가를 보내달라고 했다. 기도가 끝나니 어쩐지 친할아버지 만으로는 부족할 거 같았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에게도 똑같이 기도했다. 친할아버지든 외할아버지든 힘이 있는 누구 한 명이라도 내 기도를 듣기 바랐다. 그렇게 울면서 횡설수설 조상들을 소환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남편이었다.

“왜 안 와? 병원에서 무슨 얘기 들었어?”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정신이 좀 들었다. 다시 조직검사 결과지가 든 흰 봉투를 껴안고 집으로 향했다.




암이라는 결과지를 사이에 두고 남편과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치료받으면 돼. 요새 약이 엄청 많이 나왔잖아. “


얼어붙었던 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도 나처럼 이 병에 대해 무지할 터였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나처럼 막막할 것이다. 해야 할 게 많을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순서를 정하느라 머릿속이 어지럽다.

“야아아!!”

거실에서 아이들 장난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 또 벨이 올까 봐 신경이 쓰였다. 눈앞에서 지옥문이 열렸는데 층간소음 걱정을 해야 하고, 아이들을 봐야 하고, 저녁거리를 생각해야 했다.


“아울렛에 가서 키즈카페에 애들 넣어놓자. 그리고 생각 좀 하자.”


남편이 제안했다. 이 상황에 아울렛이라니, 실소가 나왔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것만 한 현실적인 대안이 없기도 했다. 우리는 집에서 가까운 아울렛 키즈 카페에 아이들을 들여놓고, 말없이 차 안으로 돌아왔다.


“미안해.”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나왔다. 결혼 후 우리는 한동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겉으로 큰 소리 나는 일은 없었지만, 각자 삶의 무게에 허덕이며 자신만의 굴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었다. 우울증을 앓으며 자주 그를 원망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고 보니 그런 미움의 이유들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그가 가정을 위해 애쓴 고생을 알아주지 않고, 탓하는 마음으로 그를 대했던 시간들이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시킬 미래의 고생에 대한 미안함과 더불어,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차 안에서 남편과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생각 좀 하자고 마련한 시간인데, 막상 둘만 있고 보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렀다. 사람 몸에서 그렇게 눈물이 계속 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두 시간 내내 울기만한 우리는 결국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아이들을 키즈 카페에서 데려와야 했다.




다음날, 가족들에게 소식을 알렸다. 바로 집으로 달려온 부모님과 동생들을 마주하던 순간, 이제 시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로 인해 가족들의 일상이 깨어지고, 앞으로 가족들의 돌봄에 기대서 살아가야 할, 병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구나 절감됐다.


엄마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무너지는데 네 마음은 어떻겠니" 라면서 위로했다가도, "이 지경이 되도록 왜 병원에 가지 않았냐"며 혼을 내기도 했다. 내 병을 알게 된 것으로 인한 무게감에 이어, 온 가족에게 폐를 끼치게 됐다는 자괴감이 그 와중에서도 들었다. 가족들은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채고, 한결 같이 말했다.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하라고. 애들 걱정마저 하지 말고 빨리 나을 생각만 하라고.


동생들은 "우리가 있으니 아이들 걱정은 하지 말고 치료에만 전념하자"며 여러 가지로 현실적인 대안들로 나를 안심시키려고 했다. 사실 나는 온전히 내 힘으로 병을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에게 조금도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성정 탓이다. 하지만 명의들을 알아보고 하루라도 빨리 병원 예약을 잡으려는 가족들과 남편을 보면서,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게 되었다. 막막함과 절망감, 동시에 살고 싶다는 열망으로 격렬하게 요동치는 마음이 조금은 잔잔하게 되었다. 내 옆에는 날 절대적으로 지지해 주고 공감해 주는 가족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절실히 와닿는 때였다.



이전 03화3. 마흔 다섯에 새롭게 태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