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1년 간의 여정이 끝난다. 병원 가는 마음이 이렇게 설레는 건 처음이다. 8개월 간의 장루 생활과 8회에 걸친 항암도 끝이 났다. 이제 정기적으로 추적검사를 하면서 보통의 삶을 이어가면 된다. 장루제거 수술날짜를 잡기 위해서 병원으로 만나러 가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8월의 하늘이 그 어느 때보다 농도가 짙게 느껴졌다. 마음마저 청량하고 창창해지는 것 같았다.
인사를 하며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 선생님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중 모니터에 집중하고 계셨다.
“코로나 걸렸었어요? 폐에 뭐가 보이네.”
1년 만에 찍은 CT 사진 앞에서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심각하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어 달 전에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코로나 걸리고 나면 폐에 흔적이 남기도 하는데… 검사 좀 해봐야겠다. 전이되었을 수도 있겠어."
가장 빠른 날짜로 장루제거 수술날짜를 잡고, 수술 전에 PET CT를 찍기로 했다. PET CT는 CT보다 더 작은 미세암세포도 관찰이 가능하다. 흉부외과 선생님과의 협진 여부를 알아보는 의사 선생님의 급한 모습에 불안이 더해졌다.
진료실을 나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남편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고 걱정하지 말자고 했다.
"그래, 설마 아니겠지?"
고통과 불행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고 싶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한 예감을 누를 수가 없었다. 수술 전까지 보름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시간이었다. 불안이 그림자처럼 종일 따라붙었다.
가족들이 장루 제거 수술을 하고 퇴원하면 요양원에서 쉬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다른 환자들은 항암 하는 기간 동안 요양원에서 좋은 음식에, 각종 영양주사도 맞으며 컨디션을 회복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보험에 들어둔 게 있어서 요양원 비용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덜한 편이었지만, 애들을 두고 가고 싶지 않아서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가족 누군가가 또 일상을 내려놓고 내 일을 대신하는 게 내키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퇴원하자마자 집이 아닌 경기도의 한 요양원으로 향하게 되었다.
장루제거 수술은 잘 되었다. 문제는 8개월 가까이 쓰지 않은 배변습관을 잡는 길이었다. 직장암 환자라면 모두 두려워하는 시간이다. 끔찍하게 힘들기 때문이다. 장 절제로 인해 변을 장에 담아두는 시간이 짧아져 수시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이게 몇 번 더 가는 수준이 아니다. 적게는 스무 번부터 많게는 백 번을 드나들게 된다. 이제 끝났다 싶으면 또 변의를 느껴 화장실을 가게 되고, 정말 끝났다 싶으면 또 신호가 오는 식이다. 항문이 남아날 리가 없다. 헐고 피나고 몸을 쥐어 뜯고 싶을 만큼 아파서 마약성 진통제 없이 버티기 힘들 정도가 된다.
시간이 가면서 익숙해지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각오를 했지만 역시 힘들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면도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숨이 막히고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었다. 1미터 앞에 진통제가 있어도 그 1미터를 걷기 위해 온몸을 쥐어짜야 했다. 하지만 이 기간만 버텨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전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고 PET CT 결과가 어떨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PET CT 결과를 듣기 전날은 마흔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1년 전, 마흔다섯 생일 때처럼 아무에게서도 축하 인사를 받지 않은 생일이 되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요양원 건물 안에 머물러야 했다. 창 밖의 비를 보며 마흔여섯 생일도 이렇게 가는구나 중얼거렸다. 내년 생일은 생일답게 보낼 수 있을까. 살아있기는 할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삶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가족들은 한 달은 푹 쉬어 보자고 했지만 일주일만 채우고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요양원의 심각해 보이는 환우들의 모습이 내 미래의 모습 같아 더 가슴을 옥죄이게 만들었다. 할 일이 없어서 편한 게 아니라 더 내 병에 집중하게 했다.
우두커니 앉아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며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었을 때 저절로 무릎이 꿇어졌다. 제발 이것으로 끝나게 해달라고, 더 이상은 이겨내기 힘들다고 기도하며 목 놓아 울었다. 가족들로부터 떠나 처음으로 혼자 있게 되니 그동안 꾹꾹 눌렀던 감정이 폭발하듯 쏟아졌다. 설움과 공포에 짓눌려 모든 용기가 몸 밖으로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눈물과 기도만으로 채운 생일밤이 되었다.
다음날 부은 눈으로 병원을 갔다.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처럼 초조한 마음으로 의사의 입만 보았다. "정확한 건 조직검사를 해야 해서 폐절제를 해야 하는데 전이된 게 맞을 거 같아." 크기는 7mm로 뾰족뾰족하게 각이 진, 전형적인 암의 모양이라고 하셨다. 대장 같은 경우는 내시경으로 조직을 떼어내서 암인지 여부를 알 수가 있지만, 다른 기관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수술을 해서 조직을 절제하는 수밖에 없다. 검사를 해야 정확하겠지만 여러 상황으로 보아 99프로 암이 맞다는 얘기였다. 전이가 된 것이다. 또 수술날짜가 잡혔다.
흉부외과 선생님을 만나니 쐐기 절제술이라는 걸 받게 된다고 했다. 여러 개가 보이면 수술조차 불가능한데, 하나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덧붙이셨다. 남편이 내 병원일정에 동행하느라 휴가를 다 써버려서 이번에는 엄마와 같이 병원에서 지냈다. 아이들은 다시 어머님이 올라오셔서 돌보고 주말에는 동생이 봐주기로 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암 환자 하나를 돌보려면 온 가족이 필요할 성싶다. 수술과 입원, 항암기간 동안 나 하나 케어를 위해 온 가족이 동원돼야 하는 일이 많았다. 가족 수가 적거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걸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지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수술 후 이틀 만에 조직검사결과가 나왔다. 암이 맞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추적검사해 보니 1년 전 병원에서 첫 CT를 찍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그때는 너무 작아서 혈관 중 하나로 보였던 것이 점점 커지면서 1년 만에 발견된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난 대장암 3기가 아닌 4기였다.
-암세포가 대장벽 전체를 뚫지 않은 경우 1기 (완치율 90%)
-대장벽 전체를 뚫은 경우 2기 (완치율 70%)
-대장벽의 침범 정도와 관계없이 림프절 전이가 있고 다른 기관으로의 원격전이가 없다면 3기(완치율 50%)
-원격전이가 있으면 4기 (완치율 1~2%, 암이 제거됐다면 47%)
출처: 서울삼성병원
이 고난이 그만 끝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다르셨던 걸까. 또다시 반년에 걸쳐 진행될 항암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폐절제로 전이된 암이 제거되어 더 이상 CT 상에서 보이는 암은 없지만, 일단 혈관을 타고 암이 전이되면 다른 곳에도 전이되었을 가능성이 높기에 아예 항암으로 사멸시켜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독하기로 악명 높은 폴피리라는 항암이었다. 너무 독해 머리카락과 손발톱이 다 빠진다 한다. 퇴원하고 집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다시 힘을 낼 수 있을까 자문했다. 하지 않으면 어쩌겠냐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이들의 이름을 나지막히 불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