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병원일지 - 아저씨와 동물의 왕국

by 뮤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수술한 지 며칠 뒤에는 보조기구 없이도 걸을 만했다. 대신 절룩거려야 천천히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오른쪽 다리가 꼭 한 템포씩 느리게 따라왔다. 다리를 저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가족들은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복도에 걷기 연습하러 나갈 때면 파이팅 아주머니가 있는지 살펴봤다. 감사하지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파이팅”을 외치셨다. 한 번은 감지 않은 머리를 가리려고 모자를 눌러쓰고 나갔더니 “모자 쓴 모습도 예뻐요!”라고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주변의 이목이 집중됐다.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답하는 거였다. 아주머니에 맞춰 힘차게 파이팅을 외칠 만한 변죽은 없었다.


방사선 치료 때도 날 챙겨주시던 할머니가 계셨다. 방광암 환자이셨다. 달가워하지 않는 내색을 보여도 계속 말을 거시고 먹을 걸 나눠주셨다. 결국은 할머니와 친해져서 치료 때마다 만나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두 달 넘는 치료가 끝났을 때는 손을 마주 잡고 서로의 건강을 빌었다. 우리 둘 다 활짝 웃었지만 눈이 빨개진 얼굴이었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부터 가는 데마다 챙겨주시는 어른들이 계셨다. 친구들이 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냐고 묻고는 했다. 학교 다닐 때는 교수님들이, 직장에서는 이사급의 어르신들이 아껴주셨다. 친구들은 맏며느리감 같은 인상 때문일 거라고 했다. 맏며느리감 같은 인상이 싫은 나는, 할머니가 아니라 손주들의 사랑을 받고 싶다고 농담조로 응수하고는 했다.


어렸을 때는 어른들의 호의가 당연한 줄 알았다. 어른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른이 되고 보니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잡다한 병으로, 살면서 입원을 몇 번 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 암병동은 유난히 적막하다. 웃음소리가 들린다면 간호사실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생기가 그리울 때는 휴게실의 TV를 찾았다. 딱히 TV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병원에 오니 TV 소리가 가장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줬다. 나른하고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를 생각나게 했다.


한 번은 휴게실에서 모두들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헐레벌떡 들어오더니 이 시간에 꼭 볼 것이 있다며 채널을 바꾸면 안 되냐고 양해를 구했다. 모두들 흔쾌히 그러시라고 했다. 축구시합이라도 있나, 아저씨가 급히 찾는 프로그램이 궁금했다. 그것은 ‘동물의 왕국’이었다. 그날의 주제는 ‘동물들의 사랑, 짝짓기’ 편이었다. 새부터 시작해서, 사자에 이르기까지 각종 동물들의 짝짓기 향연이 펼쳐졌다.


사람들의 표정을 살폈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 것 같은 심각함이었다. 대화마저 중단되어 짝짓기의 동작과 의미를 설명해 주는 내레이션 소리만 휴게실을 채웠다. 아저씨가 그 프로를 즐겨보는데 우연히 주제가 그랬던 건지, 아니면 그 주제여서 꼭 부리나케 뛰어와야만 했던 건지,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뭔지, 진정 묻고 싶었다. 휴게실의 사람들이 다 함께 짝짓기 장면을 보고 있는 순간의 지나친 진지함과 엄숙함이 웃겨서 나는 중간에 나오고 말았다.


퇴원을 앞두고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 직장암 3기B. 관해는커녕 3기 중에 A도 아닌 B이다. 4기에 가까운 C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마음이 무거웠다. 퇴원수속 후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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