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룸은 생각하지 말자
드디어 그날이 왔다.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인생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여보, 여보! 이리 와봐!"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해봐도 혼자서는 역부족, 결국 거실에서 TV 삼매경인 남편을 불렀다.
"왜애?"
달콤한 휴식시간에 강제소환 당한 남편의 목소리가 뚱하다. 하지만 그의 팔자 좋은 사정까지 헤아려줄 여유가 없다. 지금 내 머리카락이 '통째로' 빠졌는데 그깟 TV가 대수인가.
"가위 가져와서 내 머리 좀 잘라줘."
욕실을 들여다본 남편이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는지 후다닥 튀어 들어왔다. 다 잘라내려고? 그래도 어떻게든 빼내야지, 이걸 어떻게 다 잘라. 아무리 해도 안돼. 그냥 잘라내야 돼. 당황한 그의 질문과 나의 체념 섞인 대답이 몇 차례 오간다.
그렇다. 머리를 감다가 머리카락이 정말 통째로 빠져버렸다. 두 주먹쯤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공처럼 뒤엉키어서, 남은 머리 사이에 걸려버렸다. 대야에 물을 가득 받아 머리채를 흔들고, 린스를 잔뜩 묻혀 풀어보려 해도, 뭉친 머리카락 덩어리는 단단히 엉킨 실타래처럼 풀리지 않았다.
폴피리 항암을 시작한지 3회 차였다. 전조증상은 있었다. 2회 차부터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손으로 한참을 쓸어내려도 머리카락은 하염없이 빠졌다. 손에 감긴 검은 머리다발을 보며, 머리를 미는 걸 누구한테 맡길까 생각했다. 엄마한테 부탁하면 수월하게 진행될 터이지만 혹시나 암에 걸린 딸내미의 머리를 미는 엄마의 마음이 아플까 염려 됐다. 그래, 남편이 낫겠다. 환자의 배우자로서,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는 부부로서, 사랑의 노동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며. 혹, 눈물 많은 그가 내 머리를 밀며 울면 어떡하지, 나도 같이 눈물이 나면 어떡하지.
하지만 현실은 머리카락과의 이별을 애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3회 차 주사를 맞고 사흘을 내리 끙끙 앓으며 죽은 듯이 누워 지내다가 기운이 좀 나길래 머리부터 감기로 했다. 내 머리 냄새에 내가 질식할 거 같아서다. 그래서 더운물로 머리를 적시고, 샴푸를 하고, 헹구려는 찰나... 이 사달이 나고 말았다. 더운물에 모공이 열리면서 간신히 매달려 있던 머리카락이 일제히 빠져버린 것이다. 어깨가 조금 넘는 길이였는데 한데 뒤엉키기에 충분한 길이었나 보다.
남편은 나처럼 물을 가득 받은 대야에 머리채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린스를 부어 다시 흔들어 보고, 손으로 하나하나 푸르려고도 했다가 결국 잘라내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대야에 머리를 박고, 남편은 큰 가위로 머리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쓱싹쓱싹 가위질하는 소리와 함께 남편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왔다. 잠시 후, 남편이 건네는 검은 덩어리. 누군가의 가발 같기도 하고, 검은 실뭉치 같기도 하다.
한바탕 조용한 소동이 끝나고, 거울 속의 나와 조우했다. 마구잡이로 잘라낸 머리는 가관이었다. 남편이 왼쪽에서 머리를 잘라낸 바람에 왼편은 머리가 짧게 잘리고, 오른편은 귀 아래로 긴 머리가 남아있었다. 정수리 쪽은 다 잘려나가 짧거나, 아예 머리칼이 없어서 두피가 휑하니 드러나 있었다.
반곱슬에 숱이 많아 미용실에 갈 때면 늘 머리숱 많다는 얘기를 듣던 나였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너무 낯설어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반지의 제왕에 '골룸'까지는 생각지 않으려 애썼다. 골룸까지는 아니야. 그보다는 낫지. 그래도 이건 천하의 김태희도 못 이길 머리다. 평범한 내가 이 정도면 선방한 거다. 괜찮다. 괜찮아.
거실로 나오니, 남편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비위가 유난히 약간 그가, 여자 머리를 통째로 잘라내는 경험을 해야 했으니, 그도 참 안 됐다. 나는 부러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머리발이라는 게 하나도 없었네. 전이랑 똑같지 않아?"
내가 '쿵'을 날렸으니 남편은 '짝'을 잘 날려주면 되는 순간
"그렇네 진짜. 별차이 없다" , "우리 마누라 오히려 이목구비가 살아 보인다" 같은 말을 해주면 이 무거운 공기를 조금은 떨쳐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남편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듯 눈이 똥그래졌다. 그러더니 이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마인드가 좋네" 부부가 이렇게 쿵짝이 안 맞아서야. 구국열사 나셨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나의 조국은 오로지 대한민국이다라고 엄청난 진실을 말하랬나. 센스라고는 일도 없는 인간 아니 그대여.
얼마 전에 본 TV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가 인상적이었다. 자연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특허 관련 사업을 했다는 자연인은 본인이 딴 특허권만 수십 개라고 했다. 그러나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은 그는 결국 모든 걸 내려놓고 산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거만과 아집을 내려놓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달마상 앞에서 백팔배를 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베인 생각과 습관들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며 더 깊은 수행을 위해 절식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자신 안에 그런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걸 아는 걸까. 끊임없는 수행 속에 자신을 들여다보면 알게 되는 것일까. 그 방송을 본 이후로 산책할 때마다 자연인의 마음을 헤아려 보곤 했다. 왜냐면 나 역시 내 마음속 오만과 아집이 얼마나 깊었던지, 몸이 아프고 나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교만하고, 이기적이며, 고집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일상에서 뚝 떨어진 자리에 완전히 홀로 서게 돼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깨달음도 잠시뿐, 인간은 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살면서 베인 생각과 습관이 무조건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다. 내가 옳고 너는 틀렸으며, 내가 낫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고의 회로. 그러기에 인간은 평생 끊임없는 기도와 수행이 필요한 걸까.
거울을 보며 겸손함에 대해 생각한다. 겉모습은 정말 껍데기일 뿐, 그 안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결혼 전에도, 아이 엄마가 된 이후에도 멋진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미고 다니길 좋아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한없이 초라해 보일지 모른다. 볼품없이 말라버리고 여러 수술자국으로 흉해진 몸, 마음고생 때문인지 10년은 확 늙어버린 얼굴, 골룸 같은 머리.
몸은 이렇게 늙고 병들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정신만큼은 그 전보다 건강하다고 믿고 싶다. 적어도 그때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의 거만에 대하여. 이 정도면 배려 깊고, 인성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더 깊숙이 들여다본 나의 내면은, 어렴풋이 알면서도 끝내 외면했던 나의 내면은, 나약함과 자만심이 이중적으로 쪄들어 있음을, 나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고 끝내 누구 하나를 소환해서 네 탓을 하고야 마는 파렴치함으로 가득했음을, 눈물로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괜찮다. 더 늦기 전에 나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으니 말이다. 마흔일곱에 이런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10년 뒤 쉰일곱의 나는 좀 더 괜찮은 인간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나는 어제보다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다. 항암이 끝난 내년 여름을 생각해 볼까. 좀 자란 머리로, 아이들과 초록 잔디를 뛰고 있는 밝은 모습의 나를 생각해 본다. 두 아이의 해맑은 얼굴을 생각하니 미소가 저절로 띠어진다. 미소 짓는 김에 활짝 웃어보자. 거울 앞에서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려 했다. 확실히 웃는 얼굴이 보기에 좋다.
아, 그런데... 눈물이 난다. 웃고 싶은데 뜨거운 눈물이 멈추지 않고 뺨을 타고 흐른다.
왜, 몰랐을까. 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을까.
모든 게, 모든 게 말이다.
뒤늦은 후회와 어쩔 수 없는 서러움과 밑도 끝도 없는 슬픔에 복받친 나는 거울 앞에서 한참을 울고야 말았다.
*메인사진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