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알람이 온다. 알아두어야 할 소식일까 싶어 열어보니 영재교육원에 대한 모집요강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제목만 보고 바로 학교앱을 닫았다. 그날 오후, 11살 된 딸애는 하교하자마자 나를 찾았다.
“엄마, 나 영재원 가고 싶어.”
“영재원? 진짜? ”
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게 웬일이야,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싶다. 그래, 진즉에 그쪽에 관심을 두었어야지.
혹시나 아이가 영재원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기에 일단 겁을 줘봤다.
“영재원 가면 과제가 엄청 많아서 바빠질 텐데, 그래도 괜찮아?”
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가고 싶으니 알아봐 달라고 한다. 선생님께 지원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과 먼저 얘기하라고 말씀하셨다면서.
“하고 싶으면 해야지. 지원분야를 어디로 할까? 과학?”
“아니, 체육. 체육 지원할래.”
"체육? 웬 체육?"
부풀어 올랐던 풍선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큰 애는 어릴 때부터 과학을 꽤 좋아했기 때문에 당연히 과학 분야에 관심이 있을 줄 알았다. 과학이 여러모로 도움도 되고 흥미롭지 않겠냐고 설득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체육을 지원하고 싶다고 한다.
“영재원 가려면 준비기간이 1년 정도는 필요해. 넣는다고 다 되지도 않고. 준비 안 했는데 어떻게 들어간다 해도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
내 목소리에는 이미 생기가 사라졌다. 아이는 "그러면 1년 뒤에 지원할 테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봐 달라"라고 했다. 짜증이 올라왔다. 매일 하기로 한 수학 문제집 2장도 일주일에 두세 번 겨우 하는 애가 무슨 영재원 체육 준비를 1년이나 하겠다고 하는지 말이다.
“너 체육인이 될 거야? 그렇지도 않은데 뭘 1년이나 준비를 해서 들어가.”
이미 내 목소리에는 화가 배어 나온다. 지금 다니고 있는 피아노, 태권도 학원도 모두 본인이 하고 싶다고 해서 시작했지만 아이는 종종 가기 싫다며 빠지는 날이 태반이다. 영재원 준비를 한다 해도 분명 얼마 못 가서, 하기 싫다고 할 게 뻔하고 무엇보다 영재원 체육을 지원할 정도로 체육에 소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아이가 하고 싶다는 게 있는데 면전에서 묵살할 수는 없어서, 알아는 본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예전 같으면 아이가 하고 싶다는 게 있으면 되게 하기 위해 힘쓸 나였다. 체육인이 될 목표가 없다고 해도, 준비과정과 입학 후 교육과정에서 아이가 깨닫고 배우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알아볼 생각이 전혀 없다.
큰 애는 독서광이다. 책에 미쳐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읽을 책만 있으면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책만 보는 애다. 애기 때부터 그랬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기특하다가도 몇 시간이고 읽어주다 보면 어른인 내가 먼저 지칠 정도였다. 아이가 책을 들고 나를 찾으면 종일 읽어줄 엄두가 안 나서 장롱이나 문 뒤에 숨어있을 때도 있었다. 책을 많이 읽으니 한글도 저절로 깨치고 문해력도 자연스레 높아져 자기 연령보다 몇 년은 높은 두꺼운 책도 무리 없이 읽어냈다. 영어에도 감각이 있어 5살에 시작한 영어를 빠르게 배워나갔다. 아이의 영어 발음이 괜찮아서 영어학습지에 홍보 모델 영상을 찍기도 했다.
- 책을 읽기 위해 우산을 안 쓰겠다던 딸
유치원, 영어 학습지 선생님으로부터 영재 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자주 듣게 되었고, 그 정도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는 했다. 피아노며 그림이며 하는 것마다 잘하고, 나가는 대회마다 상을 받아서 큰 애는 동네에서 '다 잘하는 애'로 소문이 났다(계속되는 자식자랑 죄송합니다. 곧 끝납니다).
동네 엄마들이 아이의 학습법이나 읽고 있는 책들을 은밀히 물어오기라도 하면 나는 선생님이라도 된 양 차분하게 조목조목 노하우들을 알려주었다. 그랬다. 엄마로서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동네 엄마들의 질시 섞인 축하와 부러움을 즐기면서 도도한 미소를 짓고는 했다. 자식이 똑똑하면 이렇게 대우를 받는구나 실감하면서 성공한 자식이 왜 엄마들의 자랑거리가 되는지 나에게 올 미래인양 그 마음을 미리 짐작해보고는 했다(자랑은 이제 끝났습니다).
영민한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아이의 영재성을 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기로 나는 비장하게 결심했다. 아이에게 영재성이 있어도 적절한 시기에 그 능력을 살려주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는 한 영재학원의 글을 읽고 나서 더더욱 결심을 굳혔다. 모든 일상을 아이의 영재성 발달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문제집을 붙들고 앉아 선행 같은 진도에 매달리는 것은 나에게 1차원적인 교육법이었다. 4차선 도로가 고속도로가 될 수 있도록 사고의 폭을 확장시킨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2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