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국적으로 보이시네요. “
이십 대 중반이었나, 한 소개팅 자리에서였다. 소개팅남은 밥을 먹다가 대뜸 내 외모를 평했다. “그래요? 어느 나라요?” 처음 듣는 말이다. 난 전형적인 한국형 이목구비를 가졌는데, 이국적이라니 어느 나라일지 사뭇 기대가 되었다. “음, 북쪽이요. 머리에 핀을 꽂아서 그런가. 어딘가 북쪽 사람 같은 분위기가 있네요."
가끔 머리핀을 꽂는다. 그날은 꽃이 디자인된 작은 핀을 꽂았는데, 머리핀 하나에 북쪽 여자 같다니.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지만 미인이라는 뉘앙스는 아니었다. 다른 대화들이 좀 더 오갔지만 말본새가 그다지 좋지 않기도 했고, 그 남자와는 잘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난 예전부터 '~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대학생 때는 '서울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추석 같은 큰 명절이 다가오면, 학교는 지방에 가는 학생들로 분위기가 들썩거리고, 언제 어디로 내려가는지 묻는 게 그즈음 인사가 된다. 동기들은 내가 서울출신인 걸 알지만, 잘 모르던 선배들은 인사치레로 묻다가, ‘집이 서울이라 내려가지 않는다’고 하면 의외라는 표정이 돌아오고는 했다.
"아, 그래? 서울사람이었어? 지방에서 올라온 줄 알았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경기도에서 사는 삼 남매의 대사 중 삼대가 서울출신이어야 진정한 서울사람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야말로 진정 서울사람으로, 부모님 모두, 양가 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양가 고조할아버지 할머니 모두,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다. 서울사람이라고 뭐 그리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 없지만, 특히 나는 지역감정이 없는 사람이지만 선배들의 서울 사람 같지 않다는 말이 그리 좋은 말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이 말은 촌티를 벗은 고학년까지 들어야 했고, 한 번은 친한 친구한테 투덜거려 보았다. "네가 서울사람처럼 깍쟁이 같은 데가 없어서 그렇지. “ 마음씨 좋은 친구의 위로에도 내가 어딘가 세련되지 못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에 취업해서 사건기자로 일할 때는 '사건취재기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도, 친하게 된 사람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 ”문예지 만들 거처럼 보여요." "선생님이실 거 같아요." 착한 지인들은 "네 분위기가 차분한 데가 있어 “라고 해주었지만 어쩐지 진실을 파헤치려는 악착같은 끈기와 정의감 같은 강한 면모가 없어 보여 그러지 싶었다. 숨기고 싶은 자격지심을 들킨 거 같아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결혼하고 나서는 '결혼한 여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 엄마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퇴사하고 나서는 '전업주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암에 걸리고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암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 얘기했다. 환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 칭찬이다. 아픈 사람 같지 않게 생기 있고 건강해 보인다는 말이니까. 하지만 또 반대로 생각해 보면 암이라는 중병에 걸렸음에도 절박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포함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성인이 되고서부터 중년의 나이가 되기까지 그 자리. 그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들어온 셈이다. 처음에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오랜 세월 그런 얘기를 자주 들어왔으니, 이유가 뭘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몽상가적 기질이 있는 나는 항상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며 살았다. 직분은 취재기자여도, 마음으로는 아름다운 동화를 쓰는 동화작가를 꿈꾸었고, 아이엄마가 되었어도 방구석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으며, 전업주부가 되어도 언젠가는 자타공인 능력 있는 회사원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내가 진정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더 멋있고 근사한 다른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기대었다.
그런 생각이 태도나 눈빛, 말투에서 흘러나왔던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성실한 편이다. 학생일 때도 회사원 일 때도 내 인생에 조퇴는 없었다. 전업주부가 되서는 전생에 돌쇠였나 싶게, 몸이 힘들고 피곤해도 늘 쓸고 닦았다. 기분이 바닥인 날에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렇게 작은 불 하나가 타고 있었고 여기가 아닌 그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늘의 성실함으로 언젠가는 더 나은 미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작은 불 하나가 큰 불이 되게 할 정확하고 구체적인 목표와 추진력이 없었다. 꿈꾸는 것으로 숨통은 트였을지 모르지만, 그날의 성실한 하루에 만족해 큰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했다.
도전의식 부족과 안정주의 지향으로 그저 꿈만 꾸다 세월만 흐른 듯싶다. 마치 물은 열심히 길어 올리지만 늘 그 자리인 수레바퀴처럼 말이다. 이제는 가능성이 없는 꿈 꾸기는 멈추려 한다. 현실적이고 뚜렷한 목표를 몇 개 두고, 무소의 뿔처럼 씩씩하게 전진만 하기로.
첫 번째 목표는 5년 후 완치판정을 받는 것이다. 초반에는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나, 지금은 머리가 다 빠진, 빼도 박도 못하는 4기 암환자이다. 3기 일 때만 해도 병원 치료 잘 받고 스트레스와 음식 조절하고 지내면 이대로 완치될 줄 알았다. 당연히 나을 거라는 믿음에 운동하다가 숨이 차면 바로 쉬고, 기분이 내키지 않으면 하던 운동을 그만두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몸에 좋은 음식도 물리면 잘 먹지 않았다. 억지로 해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더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일 년이 흐르고 상황은 안 좋아졌다. 이제는 절실함과 절박함을 가지고 하루하루 건강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티브이에 나오는 암 생존자들의 일상처럼, 철저하게 운동하고, 입에 맞지 않은 음식도 약이다 생각하며 먹는다. ‘암환자답게’ 말이다. 운동량을 늘려 하루에 두 시간씩 운동하고, 먹거리에도 두 배 신경 쓰고 있다. 기분 내키는 대로 지낸 시간이 단 하루도 없다. 운동선수처럼 똑같은 일상이 지겹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지금은 그럴 때라고 자신을 다독인다.
두 번째 목표는 글쓰기이다. 전에는 인생의 위로나 격려의 내용이 담긴 책을 읽지 않았다. 사람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이 있는데, 섣부른 위로의 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아프고 보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글이 절실하게 와닿았다. 너무 힘들었던 어떤 날은 인스타에 올라온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떤 외국인 트레이너가 하는 말이 마음에 와닿아, 울면서 받아 적고 우울함이 올라오려 할 때면 꺼내서 읽어보고는 했다. 환우회 카페에 올라온 나랑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이 활기차게 극복하는 일상을 그린 글을 보며 힘을 내곤 했다.
절벽에 서고 나서야 하느님을 찾게 되었고 나처럼 아프거나 힘든 상황에서도 의지를 가지고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의 저자 김혜남 작가는 온몸이 굳어져 가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데 하루에 한 번 약을 먹고 약 3시간 정도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며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다.
항암 하느라, 후유증을 견디느라 많은 시간을 아무것도 못하는 나는 항상 시간이 부족해서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3시간 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하고, 그 시간을 충분히 누리기로.
나 또한 이렇게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몸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잃고, 얻는지, 아픔과 슬픔을 공유해 위로를 전하고 싶다. 인생은 어쩌면 무언가를 잃어가는 여정 같지만 끝내 그 안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찾을 수 있음을 알리고 싶다. 힘든 상황에 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통해 잠시나마 위안이 되거나 힘이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거 같다.
이제는 ‘언젠가', ‘어느 곳'을 꿈꾸는 게 아니라, ‘지금’ , ’ 여기서’ 두 발을 땅에 단단히 딛고, 이 목표만을 생각하려고 한다. 지금으로서는 이 것만 잘 해내도 성공한 인생이다. 사실 항암과 병행하며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다. 그동안 글쓰기를 꾸준히 해왔다면 지금과 같은 시기에 혼을 불사르는 글이 나왔을 텐데 하고 혼자 웃고는 한다.
두려움 한가운데서 희망을 보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내 건강을 회복하는 것, 나의 페이스를 세심하게 지켜가면서 조금이라도 더 깊이 있는 글을 조금이라도 더 자주 써나가는 것. 이 두 가지만을 보고 나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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