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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May 29. 2024

가족이 아프다는 건


억울하니.

푸르게 물결치는 먼산을 바라보다가 나에게 묻는다. 억울한 거지?


억울한 것까지는 아니야.

시선이 땅에 떨어진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땅에 검은 그림자로 어른거린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대가를 치러야 할까.




“점점 좋아질 거야.”

내 말에 아빠의 눈에 잠시 힘이 들어갔다. 얼른 고개를 끄덕이시는 모습이 내 말을 약 삼는 것 같아 가슴이 시큰하다. 많이 좋아지셨다는 동생들의 말에 나도 모르게 기대했던 걸까. 병원에서 본 아빠의 얼굴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축 처진 입꼬리, 아빠의 입매가 저렇게 슬픈 느낌이었나 생각했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이 되어간다. 아빠는 끊이지 않는 기침 때문에 검진을 받으러 간 당일에 바로 입원처리 됐다. 가슴 엑스레이 사진에서 폐가 전부 하얗게 나온 것이다. 의사는 너무 힘들었을 텐데 왜 지금에 왔냐고 놀랐다고 했다.


입원 다음날 시티를 찍었고, 폐에 커다란 ‘무언가’가 보인다고 했다. 정확한 건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의사는 ‘무언가’의 크기를 말할 때 자신의 주먹을 들어 보였다고 엄마가 전했다.


“설마 암은 아니겠지? 암이 주먹만 하면 이미 살아있지도 못하는 거 아니야?”

엄마의 말에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생각에 빠졌다.

“그래. 결절인지도 몰라. 코로나 후유증이 여러 가지로 온다니까. “

동생의 말.

‘뭐가 보인다’, ‘정확한 건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말하자’, 너무나 익숙한 전개였음에도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이유는 티끌 같이 작더라도 ‘희망’이라는 게 있어서라는 걸 깨닫는다. 그렇게 호되게 경험을 했는데도 나는 또 희망했다. 또 ‘설마’에 기대었다. 먼저의 글에 ‘아빠의 병색에 간병인 보험을 들었다’며,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야 한다’고 담담한 듯 적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설마’를 읊조렸다.


설마, 설마 아빠마저 암일까. 식구 다섯 중에 셋이 암이라는, 그런 불운과 재앙이 설마 우리에게 올까. 아닐 거야. 우리는..


우리는 정말 평범하니까.


인생의 행복과 불행에는 총량의 법칙이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그 양은 누가 결정하는 걸까. 신이겠지. 인간인 나는 불행의 양을 다 채웠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희망이었다. 폐암 4기. 암 덩어리가 10센티 길이로 너무 큰 데다, 다른 곳에도 다발성으로 전이되어 수술은 불가한 상태. 항암으로 누르면서 경과를 보는 수밖에 없다. 1차 항암을 진행했는데 항암 효과로 아빠의 호흡은 한결 편해졌으나 독한 약의 영향으로 맥을 못 추시는 상황.


아빠의 결과를 듣고 첫 삼사일은 그저 멍하니 지냈다. 익숙하고도 두려운 병, 암. 눈물이 몇 번 났지만 크게 울지 않았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뼛속까지 말라버린 느낌이다. 울지도 한탄하지도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다.


아빠의 연세에 병이 있다는 게 그리 통탄할 일은 아닐는지 모른다. 다만, 그 병이 암이라는 게 마음을 저리게 했다. 특히 수술이 불가능해서 항암으로 누르는 상태, 그 진행이 어떻게 되는지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라는 단어 대신 무엇을 찾아야 할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생각했다. 별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두려움과 절망이 나를 덮치지 않도록 본능적으로 다시 일상을 반복했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나도 꼬박꼬박 끼니를 찾아 먹었다. 운동도 계속하고 아이들 공부도 거르지 않고 봐주었다. 브런치 발행일까지 맞춰 글을 썼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치 달라지는 건 없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똑같아지는 건 아니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우리의 일상은 또 달라졌다. 또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왔다. 나는 점점 서늘한 얼굴이 되었다. ‘다음’을 생각하노라면 무거운 돌덩어리가 가슴을 짓누른다. 아빠의 다음도 무섭고, 나의 다음도 무섭다.


한동안 그 무서움을 잊고 살 수 있었는데 아빠의 병에, 그 무게가 더해져 다시 어깨에 내려앉았다. 수술과 치료, 회복을 정신없이 겪은 지난 2년 반의 시간은 나의 최대치를 끌어올린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있는 힘껏 산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또다시 병, 치료, 상실감, 우울 이 일련의 과정 앞에 놓여 있다. 아빠의 병임에도 자꾸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텅 빈 집에 누워서 하얀 천장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라도 더 이상 아무 일이 없어야 한다. 나의 안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가족들을 위해서이다. 가족 중에 누군가 아픈 것은 이렇게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구나, 새삼 생각했다. 나의 소식을 들었을 때 동생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힘들었다는 말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한다.

‘설마’에 배신당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냥 우울감에 젖어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경험치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한다.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궁극적으로 이 모든 난리는 살기 위한 것이니까.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김훈, 목숨 1


하루하루의 순환,  그 자체가 감사임을 상기하자. 위기를 위기로, 불행을 불행으로 받아들이면, 정말 그것은 위기와 불행이 된다. 지금이야말로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 없는 때이다. 어쨌든 아빠가 살아있으니까.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을 시절이니까. 지금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아야 한다.


나는 또 걷고, 먹고, 웃을 것이다. 읽고, 쓰고, 청소하고, 요리를 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또 아무것도 안 한 채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감사할 거리를 찾을 것이다.


분명한 건 다시 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기억하려 애쓰고,

잊으려 노력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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