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헬스장이 새로 생겼다. 아니, 아직 운영하는 건 아니고, 공사 중이다. 완성도 안 된 헬스장이 오픈할 거라는 걸 미리 알게 된 건 트레이너들 덕이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사거리 길목에서 온종일 전단지를 돌린다. 오픈 이벤트, 한 달에 단 3만 원! 이런 내용이 적힌 전단지를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손에 쥐어준다. 다이어트와 운동에 관심이 많을 젊은이들은 물론, 헬스의 ‘헬’에도 관심이 없을 것 같은 꼬부랑 할머니에게까지 허리를 굽혀가며 전단지를 건넨다.
그런데, 이 트레이너들…
좀 약하다?
흔히들 입는 민소매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어도 트레이너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않은가. 무겁지 않을까 싶을 만큼 굵은 팔과 유달리 발달한 가슴근육, 땅땅하게 알이 붙은 다리 근육은 생활운동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굳이 운동에 관심이 없더라도,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트레이너를 보면 흘깃 시선이 가게 마련.
그런데, 이 새 헬스장을 이끌어갈 트레이너들은 ‘나 요새 운동 좀 해’하면서 은근히 팔에 힘을 주는 일반 남자 보다 조금 더 근육이 붙어있을 뿐, 거리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에는 영 부족해 보인다.
‘약하다 약해. 인물이 없네 그려’
그 누구보다 빈약한 몸을 하고서, 난 팔짱을 끼고 트레이너들의 몸을 평가한다.
헬스장이 들어설 건물의 1층에 빈 상가가 있다. 건물주에게 양해를 구했는지, 빈 상가의 유리창을 다 떼어내고 간이 사무실을 차려 회원을 모집하는 공간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오며 가며 본 사무실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어 직원들만 앉아 하릴없이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쯤 뒤, 혜성처럼 그녀가 나타났다.
사거리 건너편에 있는 마트에 가려던 나는, 주변의 공기가 뭔가 달라졌음을 눈치챘다. 어떤 묘한 호기심과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난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눈치챘고, 내 눈도 그 시선을 따라가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가고, 나도 마침 가려던 마트 앞쪽에서 김태리가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큰 눈과 살짝 각진 턱, 인형 같은 귀여운 얼굴이 배우 김태리와 똑 닮았다. 김태리 아니, 김태리를 닮은 트레이너는 딱 붙는 레깅스에 허리가 보이는 헐렁한 크롭탑을 입고 있었다. 그녀가 사람들한테 허리를 굽혀 인사할 때마다 크롭탑이 흘러내려 어깨선이 드러났다. 얼굴만 눈에 띄는 게 아니었다. 남자 트레이너보다 더 굵은 허벅지와 90도에 가까운 각진 어깨, 강해 보이는 팔, 납작하고 단단한 배는 트레이너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탄탄함이었다.
김태리 트레이너의 등장으로 사람들 반응이 달라졌음을 헬스장 측은 귀신같이 눈치챈 게 분명했다. 사거리를 지키던 남자 트레이너 둘이 없어지고 김태리 트레이너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녀의 옷차림이 달라졌다. 크롭탑 대신 가느다란 끈이 달린 브라탑으로 바뀌었다.
바뀐 상의 덕에 트레이너의 몸선이 더 드러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내가 지금껏 본 트레이너 아니, 여자들을 통틀어서 가장 비현실적인 몸을 가진 사람이었다. 동양 사람이 저렇게 굴곡이 심할 수 있다고? 볼륨 있는 몸으로 유명한 배우 김혜수만큼이나 심한 굴곡이 아찔할 지경이다. 와, 이건 진짜 반칙이다. 얼굴은 김태리인데, 몸은 김혜수라니.
횡단보도에 선 사람들은 미어캣처럼 일제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나도 한 마리의 미어캣이 되어 그녀를 따라 분주히 눈을 굴렸다. 더운 날임에도 그녀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그녀가 전단지를 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거닐 때마다 웨이브 진 머리가 파도처럼 넘실 거려 더욱 시선을 끌었다(머릿결도 예쁜). 남자 트레이너들이 주는 전단지는 귀찮다는 듯 안 받던 사람들도 어째 열심히 받아주는 것 같았다.
며칠 동안 온 동네 사람들이 김태리 트레이너가 나눠 준 전단지를 들고 다니는 듯하더니, 헬스장 임시 사무실이 이내 복작거리기 시작했다. 사무실 밖까지 상담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있고, 직원들은 바쁘게 서류를 쓰거나 결제를 하고 있다.
외출했다가 집으로 가던 길, 폭염에 정신을 반쯤 놓고 걷다가 문득 앞을 보니 김태리 트레이너가 앞에서 걷고 있었다. 헬스장으로 출근하는 중인 듯했다. 그녀는 출근할 때도 레깅스 차림에 탑 차림이어서 뒤를 걷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태를 보며 걸어야 했다. 코 앞 가까이서 본 그녀는 더더욱 비현실적이었다.
한 줌의 허리라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 저렇게 가는 허리 안에 7미터가 넘는 대장, 소장이 어떻게 다 들어가 있는지, 허리는 한 줌인데 힙은 왜 클 수 있는지, 어떻게 엉덩이가 완벽한 구를 이룰 수 있는지, 여자 허벅지 근육이 어떻게 저렇게 말처럼 크게 붙을 수 있는지.
마치 게임의 여주인공이 현실계로 튀어나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녀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면서(내가 걸을 때는 못 느꼈던), 사람들의 뜨거운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파블로의 개처럼 즉각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런 자신의 주책맞은 모습을 그녀가 봤을까 봐 얼른 시선을 거두었으나 그녀가 지나가는 순간 즉시 고개를 꺾어가며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다.
온 동네 사람이 그녀에게 반한 듯했다.
어제는 헬스장 간이 사무실 앞을 지나는데 트레이너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 트레이너들이 열중쉬어 자세를 한 채 일렬로 서있고 그 앞에 김태리 트레이너가 서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160 정도의 크지 않은 키지만, 자기보다 머리 하나 더 있는 트레이터들 앞에서 회의를 주도하는 모습은 섹시한 카리스마 그 자체였다.
나는 바르고 고운 말을 지향하는, 욕도 할 줄 모르고, 상스러운 말은 더더욱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은 “아 존나 멋있어!" 였다. 그렇게 귀여운 얼굴을 하고, 그렇게 섹시한 몸을 하고, 하다 하다 카리스마까지 있다니.
어쩌면 이 동네에서 그녀에게 제일 반한 사람은 나일지도 모르겠다.
암투병 중인 나는 원래도 약간 마른 몸에서 8킬로가 빠지게 되었다. 2년에 걸쳐 빠진 살인데도 나이 때문인지 뱃가죽이 할머니처럼 축 늘어졌다. 어깨와 등도 조금 굽어졌다. 항암약에 머리가 다 빠진 후 요새 다시 자라고는 있으나 머리숱마저 예전 같지 않다. 요즘 거울을 보면 웬 삐쩍 마른 할머니 한분이 서있나 싶다. 나도 한때는 운동 뭐 하냐는 말을 자주 들을 정도로 제법 탄탄했는데 말이다.
살길이 바빠서 달라진 외모 따위에 마음 상할 겨를도 없었으나, 언젠가부터 건강미가 넘치는 사람을 넋을 읽고 보게 되었다. 몸 안도 건강한지 그 사정까지는 알 수 없고, 일단 외모에서 건강한 기운이 넘치는 사람을 보면 진심으로 부럽다. 햇볕에 그을린 갈색 피부에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힘차게 뛰고 있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 뛰어도 숨차지 않은 심장과 체력이 부러워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보곤 한다. 너무 부러운 나머지 가서 알려주고 싶다. 이렇게 건강한 게 얼마나 축복인지 알고 있나요 하고 말이다.
그래서 난 김태리 트레이너에게 유난히 시선이 가는 건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새삼 그녀의 예쁜 외모가 부러운 게 아니고, 압도적인 그 건강미가 부럽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을 때 느꼈던 에너지는 그저 예쁘장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녀는 곧은 등과 늠름한 어깨로 세상의 어떤 풍파도 거뜬히 헤쳐나갈 것만 같다. 병에 걸려도 나처럼 소리 죽여 울지 않고, 그까짓껏 하며 이겨낼 것만 같다. 그 힘찬 발걸음으로 어디든 쭉쭉 전진할 것만 같다.
마음과 몸은 너무나 밀접하게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몸이 병들었는데 마음이 건강할 리 만무하고, 반대로 마음이 곪아가고 있는데 몸에 기운이 넘치기 힘들다. 둘은 하나이기 때문에 그중에 뭐가 더 중요하냐는 말은 그래서 어리석을 것이다. 그런데, 아프고 난 후 나는 간혹 이런 생각을 한다. 마음이 건강해도 몸을 돌보지 않으면 그 건강이 오래갈 수 있을까. 반대로, 마음이 나약한 상태라도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다 보면 마음도 따라 강해지지 않을까. 어떤 우울감이나 정신적 고통이 나를 덮치는 일이 생기더라도 힘찬 운동으로 어느 정도는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마음 다스림도 중요하지만, 운동과 식이요법은 더더욱 중요하다는 게 등산을 1년 넘게 하면서 얻은 나름의 결론이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뚜벅뚜벅 걷다 보면, 나 이렇게 건강한데? 영원히 건강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며 기분 좋은 자신감이 차오르곤 한다. 그렇게 생긴 에너지로 그날을 버티고, 다음날을 더 쉽게 버텨본다.
김태리 트레이너의 외모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나도 자신의 몸을 꾸준한 관심과 사랑으로 트레이닝한다면 그녀와 비슷한 단단함은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문득 달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흰색 러닝화를 신고, 산뜻한 복장을 하고서 파란 하늘 아래를 하염없이 달리고 싶다. 어깨가 예전처럼 벌어지고, 배에 힘이 생겨 허리가 곧추설 때쯤, 힘겹게 이겨내고 있는 병도 사라지고 없어졌을 것만 같다.
장바구니에 아무렇게나 욱여넣었던 피트니스 센터 전단지를 찾아본다. 지금은 뒷산 등산으로 체력을 조금씩 올리는데 만족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김태리 트레이너한테 PT를 받아 본격적으로 근력을 붙이고 싶다.
아주아주 강한 여자가 되고 싶다.
1년 뒤에는 딴딴한 복근을 하고서 힘차게 한강변을 달리고 있는 나를 상상해 본다.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