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중에 가장 먼저 결혼한 S가 결혼한 지 5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한 말은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어”였다. 결혼하자마자 남편을 따라 낯선 지역으로 간 그녀는 지인 한 명 없는 곳에서 외롭게 아이를 키우는 일이 우울해 보였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이제 겨우 서른 하나인데. 이 아까운 젊음을 건너뛰고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S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 나이 마흔일곱, 이제야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
자고 일어나면 예순 살 정도 되었으면 좋겠다.
예순 살이어도 살아있다는 말은, 5년 완치 판정 기간을 넘고도 재발 전이 없이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암 판정을 받은 지 이제 2년이다. 암 환자는 영원히 암에 묶여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수술과 항암을 받았어도 암이 재발되거나 전이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첫 수술과 항암도 힘들지만, 재발과 전이로 인한 수술과 항암은 더더욱 힘들고, 치료 자체가 안 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 상황이 내 일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가 매일마다 질기게 따라붙는다. 아무리 내가 암환자임을 잊으려 해도, 마음의 평화를 도모하려고 해도, 마치 검은 구름 한 조각이 머리 위에 늘 따라다니는 것 같다. 구름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시간을 훌쩍 넘기고 싶은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젊음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죽음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들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다면 기꺼이 할머니가 되리라! 예순 살이 되고 싶은 건, 그래도 제2의 삶(?)을 누릴 체력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아프면서 외롭게 보낸 삶을 보상받기 위해서라도 예순의 삶을 즐겁게 누리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멋진 할머니란 어떤 할머니일까. 일단 외모부터 생각해 보자. 젊어 보이고 싶은 건 모든 이의 바람일 터,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은 외향이 있다. 며칠 전 일이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맞은편에 서있는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젊은 남녀인 줄 알았는데, 이내 여자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젊은 여자가 아니라, 할머니였다.
얼굴은 예순 초반으로 보이는데,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양갈래로 따서 묶고, 배꼽이 보이는 탑에 주름이 잡힌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등이 곧고 다리도 11자로 매끈하게 빠져서 언뜻 아가씨인 줄 알았다. 옆에 있는 남자는 남자친구가 아닌, 아들인 것 같았다. 할머니가 그런 옷을 입은 이유를 이해는 하겠다. 몸매가 정말 웬만한 아가씨 보다 곧고 탄탄했다.
하지만 아무리 옷을 그렇게 입고 화장을 해도, 잠깐만 젊은 사람처럼 보일 뿐이지 이내 그 사람의 나이가 보이는 법이다. 아무리 그 패션을 소화한다고 해도, 아무리 입는 건 그 사람의 자유라고 해도, 아무리 패션은 자신감이라도 해도…. 그건 아닌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남편에게 그 얘기를 하니, 무엇을 입건 그 사람의 자유의지라고 반박했다. 남편의 초개방적인 생각에 놀라 "그럼 나도 그 나이에 그렇게 입고 다녀볼까."라고 했더니 돌아온 답. "그래. 하지만 같이 다니진 않을 거야." (뭐니)
나도 지금의 내 나이에 비해 젊게 입고 다니는 편이라, 그 할머니를 보고 새삼 다짐했다. 무조건 젊게만 보이려고 애쓰지 말자고.
내가 추구하는 패션은 우아하면서도 위트 한 방울 섞인 분위기이다(적고 보니 좀 웃기는 이유는 뭘까). 그런 나만의 감각이 담긴, 패셔너블하고 감각 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런 패션이 어울리는 몸과 얼굴을 가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멋쟁이 할머니에 이어 또 다른 꿈이 있다. 그림책을 만드는 할머니이다. 동화를 쓰고, 그에 맞는 그림도 직접 그리는 동화 작가 할머니. 그리고 매우 바쁜 할머니이다. 인터뷰 요청과 각종 매체에서 오는 연재 의뢰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어린이들을 위해 꾸준히 해온 봉사가 확장되어 여러 시설의 요청도 산적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스케줄을 소화할 만큼 건강하다. (상상이지만 참 달콤하다)
작업실도 구상해 놨다.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좋은 원목으로 만든 책상과 책장이 있고, 벽에는 직접 그린 그림들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작업실 중간에는 큰 테이블이 있는데 책과 미술도구, 도화지들이 항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옆에는 이젤과 의자가 놓여 있는 작업실. 예순 살의 나는 흰머리를 아무렇게나 묶고 가느다란 은색 안경을 끼고 글을 썼다가 그림도 그린다. 문득 샴 고양이가 쓰윽 다리를 스치며 지나가면 미소를 띠고 고양이를 불러 쓰다듬어 준다.
잠시 후에는 아이들이 작업실에 놀러 온다. 그쯤이면 아이들은 성년이 되었을 게다. 여전히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남매는 그 나이에도 장난을 치며 작업실을 어지럽힌다. 그럼 나는 한소리 하겠지. "아유, 정신없다!"
예순이 되어서 제일 좋은 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큼이나 애들이 다 컸다는 것이다. 이제 열한 살, 일곱 살인 남매들이 성인이 되는 날을 볼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하는 나의 마음, 부모라면 십분 이해할 것이다.
예전에는 거리를 다니다 젊은 친구들을 보면 그 싱그러운 젊음이 부러웠지만 지금은 반대이다. 공원에서 쉬고 있는 할아버지, 부지런히 등산길을 오르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 그 연세까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워 물끄러미 쳐다보곤 한다.
빨리 할머니가 되고 싶다. 그것도 일과 가정에서 모든 걸 이룬 이후의 할머니가 되고 싶다.
물론 그럴 리는 없다. 그저 몽상에 불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늘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종 느껴지는 행복감을 간직하고자,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싫어서, 필사적으로 애쓰면서 살 것이다. 때로는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크게 울기도, 하염없이 걷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내가 꿈꾸는 모습의 할머니가 되기 위한 여정이 될지 모르겠다. 영민해 보이는 은테 안경에, 우아하면서도 위트 있는 룩을 하고, 열심히 글을 쓰고 있을 할머니 말이다.
그리고 꼭, 매우 매우 바쁜 할머니여야 한다.
=> 92세의 세라믹 아티스트 리사 라르손(사진출처 : ELLE)
= 메인사진 :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