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에 해낸 거라곤 겨우 사과 맛을 안 것뿐이었다.
사과, 그 단단한 과육과 사각사각한 식감, 혀에 가득 고이는 새콤달콤한 맛의 매력을 알게 된 건 스무 살이 훌쩍 넘어서다. 그전까지 나에게 있어 사과란 피치 못 해 먹는 과일이었고, 해서 맛없는 건강식품 정도로 치부되어왔다. 유치원에 다닐 적에 엄마가 직접 강판에 갈아 준 사과주스를 두 병씩 억지로 비워야 했던 기억이 꽤 오랫동안 혀끝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네 살 무렵의 나는 유치원에서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간에 가방에서 손수건에 둘둘 싸인 페트병을 꺼내 그 안에 든 사과주스를 마셔야 했다. 엄마가 강판에 직접 간 사과주스는 사실 주스라기보다는 억지로 꿀떡거리며 넘겨야 하는 잘잘한 과육들에 가까웠고 게다가 갈변되기까지 해서 마시기가 여간 역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린 나는 페트병에 생수를 넣어가며 좁은 입구를 미처 통과하지 못한 사과 덩어리들까지 모조리 헹구어 먹었다. 혹시라도 페트병에 과육이 남아있는 날이면 여지없이 엄마에게 혼이 났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소 집착적으로 나에게 사과주스를 먹이기 시작한 것은 언젠가 TV 건강프로에서 사과가 눈에 좋다는 방송을 보고 난 후부터였다.
그 무렵 엄마는 나의 눈에 대해 굉장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눈동자가 똑바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팔뜨기였다.
엄마는 내 사시의 원인이 내가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적 너무 가까이에 달아준 모빌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엄마는 내 눈동자가 하루빨리 평범한 방향을 되찾기를 바라며 매일 아침 사과를 갈았다.
그러나 슬프게도 사과는 눈동자를 움직이는 근육들을 곧바로 단단하게 해주는 마법의 묘약이 아니었다.
사과를 몇십 박스쯤 갈았을 때 엄마는 나에게 사과주스 먹이기를 그만두었다.
사과 갈기를 그만둔 엄마는 내 눈을 고치려고 두 살 배기 동생과 다섯 살짜리 나를 데리고 일주일에 한 번
시외버스를 갈아타가며 전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갔다.
시외버스 터미널에는 늘 같은 자리에서 쥐포를 굽고 계시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나는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쥐포를 사달라고 엄마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기어이 쟁취한 따땃한 쥐포를 조금씩 아껴먹으며 꾸벅꾸벅 졸다보면 어느새 전주터미널에 도착해있었다.
깊게 잠든 동생은 절대로 깨는 법이 없어서, 엄마는 늘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동생을 등에 업거나 품에 안고 있어야 했다. 엄마의 앞섶이나 등은 항상 땀에 젖어있었다.
나는 먹다 남긴 침에 젖은 쥐포를 쥐고 땀에 전 엄마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은 만날 때마다 나의 사시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하셨다.
내 나이 겨우 다섯 살이었고, 엄마는 작은 나를 수술대 위에 눕힐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엄마는 선생님께 다른 방도가 없겠느냐고 물었고, 선생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엄마는 동생을 업고 내 손을 쥐고 대학병원에서 나와 시내에 있는 한의원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 지역에서 침을 최고로 잘 놓는다고 소문난 할아버지 선생님이 계신 곳이었다.
크지 않은 한의원에선 약재들의 싸한 냄새와 오래된 건물의 콤콤한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엄마와 얼마간의 상담을 마친 후, 나와 엄마와 어린 동생을 진료실로 데려갔다.
할아버지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혀 눈을 감게 한 후 눈 위에 침을 놓았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눈에 바늘을 꽂다니..! 다섯 살 나의 상식선에선 이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정말이지 내 눈알이 터져버릴까 봐 무서웠다.
첫 침술을 받는 날 나는 한의원이 터져라 울었다.
악을 써가며 울면서 자꾸만 침대 밑으로 흘러내리는 날 붙잡아 매고 분투 끝에 침술을 마치신 할아버지는 엄마를 보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술 때마다 이렇게 울면 효과가 없습니다”
엄마는 엄마가 운 것도 아니면서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엄마랑 할아버지를 보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눈물에 젖은 배갯잇이 뺨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그 날 후로 나는 엄마와 함께 ‘침 맞을 때 울지 않기’ 맹연습에 돌입했다.
엄마는 날 침대에 눕히고서 내가 눈을 감으면 감은 눈 위로 스탠드를 켰다.
제법 한의원에서 할아버지가 시술할 때와 비슷한 연출이었다.
엄마는 둥근 연필심으로 나의 감은 눈 위를 부드럽게 쿡 쿡 누르며 나를 달랬다.
눈 위를 누르는 것이 바늘이 아닌 부드럽게 깎은 연필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다정한 침술 연습 파트너가 엄마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이 나지 않았다.
몇 번의 연습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는 다음 침술 시간엔 울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나는 세상 씩씩한 걸음으로 한의원에 입장했고 침대에 누워 침을 맞을 때 한의원이 터져라 울었다.
할아버지는 엄마를 향해 또다시 고개를 저었고 엄마는 또 죄송하다고 했다.
몇 번의 침술 시뮬레이션이 수포로 돌아가고 엄마는 이제 회유책보다는 강경책을 써야겠다고 판단했는지 침 맞을 때 울면 집에 와서 종아리를 열 대 때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울지 않고 잘 참아낸다면 좋아하는 인형을 사주겠다고 했다.
그 후로 열몇 번의 침술 시간이 끝날 때마다 나는 집에 돌아와 종아리를 열 대씩 맞았다.
종아리를 맞을 때마다 나는 너무 억울했다. 바늘에 눈이 찔린 어린 딸을 이렇게 모질게 때릴 필요가 있나 싶었다. 맞고 싶지 않아서 엄마 앞에서 울어도 보고 애교도 부려보고 화도 내봤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세상에서 가장 냉정한 얼굴로 종아리 10대를 때린 뒤 안방으로 들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나는 서럽게 울면서 지켜보았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눈두덩이와 종아리가 골고루 아픈 날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다.
언젠가 한 번 엄마랑 사과를 먹다가 문득 서러워져서 엄마한테 따지듯이 물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나를 때렸느냐고, 안 그래도 낯선 할아버지한테 여린 눈두덩이를 사정없이 찔린 어린 애기가 안 불쌍했느냐고 물었다. 엄마는 그때를 떠올리는 듯 눈동자를 위로 데구루루 굴리더니 ‘불쌍했지’ 하고 대답했다.
엄마의 사과를 내심 바랐는데, 생각보다 건조하고 짧은 엄마의 대답에 괜히 심술이 나서 핏 하고 웃었다.
엄마는 ‘너보다 내가 더 불쌍했지 그 어린것이 뭘 알았겠어.’ 했다.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나?’ 하고 되물었다. 엄마는 ‘아니, 나’ 하고 대답했다.
엄마의 눈동자가 과거의 그 날들에 머무느라 초점을 잠시 잃었다.
그런 엄마를 보고 있자니 약간 아득한 기분이 들어서 나도 초점을 흐리고 그때의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는, 첫 아이의 성치 못한 눈을 매일 바라보며 죄지은 사람의 얼굴을 했던 엄마는, 아침마다 강판에 사과를 갈며 중얼중얼 혼잣말로 기도하던 엄마는, 갓난아기 악력에 목이 늘어난 티를 입고서 의사들의 숱한 한숨소리 앞에 고개를 조아리던 엄마는.. 우리 엄마는 그때 겨우 스물여덟이었다.
내가 그때의 엄마 나이에 해낸 거라곤 겨우 사과 맛을 안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