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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an 06. 2019

보증금, 너에게 청춘을 바친다.

내가 모을 수 있는 돈이긴 한걸까?

이번 겨울에도 영락없이 수도가 얼었다.

낮에 깜빡하고 두 시간 정도 물을 틀어놓지 않았는데 그새 꽝꽝 얼어버리고 말았다.

해빙 업체 사장님 말에 따르면 오래된 이 빌라의 수도관은 열전도율이 높은 구리로 되어 있어서 영하의 날씨에 잠시라도 물을 틀어놓지 않으면 금세 꽝꽝 얼어버리는 것이랬다.

룸메이트 박과 함께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했다.

마침 올해 2월이면 집 계약도 끝나는데 겨울이면 수도가 얼고, 여름이면 하수구에서 똥냄새가 올라오고, 

수압은 형편없으며 바닥 여기저기가 꺼지고 외벽 곳곳이 금 가있는 이 집을 정말 떠나버릴까. 

“너 돈 있냐?” 

“아니, 너는”

“있겠냐”

“그럼 한 일 년만 더 살까?”

우리는 2L짜리 빈 페트병 8개를 챙겨 1층에 있는 술집 화장실로 물을 받으러 갔다.

물을 받는 동안 생각했다. 내년에도 이 짓을 해야겠지. 

    

수도가 얼면 변기 물도 내려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1층 화장실에 온 김에 마렵지 않은 오줌도 미리 싸야 했다. 한 겨울날 오줌 한 번 싸자고 벗어놓은 브라와 니트와 패딩과 바지와 양말을 챙겨 입고 

4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것은 죽기보다 귀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몇 명의 엉덩이가 닿았는지 모를 술집 변기에 엉덩이를 붙였다. 엄청나게 차가웠다. 

소름과 비참함이 등줄기를 타고 몰려왔다. 내 집에서 오줌도 맘 놓고 쌀 수 없다니. 


뒤지게 무거운 생수병을 이고 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받아온 물을 전기포트에 데웠다. 

그 물로 세수와 양치를 한 다음, 남은 물로 발을 씻고 욕실 바닥의 비눗물을 헹구었다. 

로션을 바르고 침대에 누우니 오줌이 마려웠다. 죽고 싶었다.     


2년 전, 지금 살고 있는 보증금 2000만 원에 월세 68만 원짜리 옥탑으로 이사를 왔다. 

100만 원도 안 되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 3년간 바득바득 모은 돈 800만 원과 

박이 회사에서 대출받은 1500만 원을 모아 마련한 월세집이었다. 

전에 살던 보증금 300에 월세 25만 원짜리 반지하에 비하면 궁궐 같은 집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를 오던 날 박과 나는 축배를 들었다.

비록 옥탑이긴 했으나 전에 살던 반지하랑 비교하자면, 

이 곳은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천국과 훨씬 더 가까웠으므로.     


반지하에 비하면 해도 들고, 평수도 넓긴 했으나 옥탑은 옥탑이었다. 

여름이면 숨이 막히게 더웠고, 하수구에선 똥냄새가 올라왔다. 겨울이면 영하 5도만 되어도 수도가 얼었고, 

전기장판과 보일러를 아무리 빡세게 틀어도 외풍 때문에 코가 시렸다. 

오래된 이 빌라는 무너져가는 중이기라도 한 것인지, 한 달에 한 번씩 새로운 바닥 꺼짐 자국이 생겼고, 

노후된 수도배관이 터져 공사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보일러 배관이 터져서 거실 바닥에 송골송골한 물방울이 올라왔다. 계단 벽에 생긴 균열도 심상치 않게 길어지거나 벌어지고 있었다. 

이 건물의 구석구석이 목숨 건지고 싶으면 빨리 나가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우리는 돈이 없었다.      


태풍이 불던 날, 지진이 났던 날, 강풍이 몰아치던 날.

아무튼 그런 종류의 날이면 박과 나는 두려움에 떨며 진지하게 생존방법을 모색하였다. 

야, 시발 진짜 이 집 무너지면 어떡하지? 옥상으로 나가야 되냐?

아니 옥상으로 나가면 백퍼 뒤져. 옥상도 존나게 꼬랐잖아.

만약에 지진 나면 나는 호랑이(강아지) 챙길게, 너는 집문서 챙겨. 

이런 식의 이야기는 늘 돈 열심히 벌어서 빨리 이사 가자로 마무리되곤 했는데, 

사실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촌에서 크고 자란 우리가 상경한 뒤로 최선을 다 해 한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보증금 모으기’였다. 

한 달 월급으로 월세 내고, 부모님 용돈 드리고, 보험 및 핸드폰 등 고정비를 지출한 뒤 남은 돈으로 적금 들고 

다음 달 카드 값을 당겨 치킨 집에 가서 기분이나 좀 냈을 뿐이다. 

우리는 맹세코 무료입장이 아닌 클럽에는 발 들인 적도 없고, 사치품도 하나 없다. 

나는 샤넬 가방은 고사하고 립스틱도 없단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보증금을 모으는데, 통장에 구멍이라도 난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노력이었는지 

나의 잔액은 늘 보증금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이제는 가난한 자들은 원래 노력으로는 보증금을 모을 수 없는 건지 

아니면 보증금이 안 모여서 가난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는 건지 뭐가 뭔지도 잘 모르겠다.


작년 연말, 술은 당기는데 밖에서 마실 돈은 없었던 우리는 냉장고를 털어 안주를 만들고 

편의점에서 사 온 싸구려 와인을 맥주 글라스에 따라 마시며 기분을 냈다.

얇은 벽을 뚫는 외풍에 시렸던 손발도 취기가 알딸딸하게 오르니 금세 뜨끈해졌다.

열 시가 조금 넘었을까, 박이 화들짝 놀라며 다음날 출근용 알람을 맞췄다. 

오전 5시 30분, 31분, 32분, 33분, 34분, 35분 알람을 설정 한 뒤 아까 1층에서 받아 온 물로 양치를 마친 박은 “나 또 자러 갈게”하고 말했다. 

퇴근하고 집에 온 지 4시간 만에, 박은 ‘또’ 자러 갔다. 

내일의 해가 뜨면 열심히 보증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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