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이슬 Jan 12. 2019

아빠와 술을!

몇 달 만에 시골 본가에 갔다.

급작스러운 나의 방문(?)에 당직 후 집에서 쉬고 있던 아빠와 강아지들이 대문 앞으로 뛰쳐나온다.

강아지들은 그렇다 치고, 아빠는 왜 맨발이지?

의문도 잠시, 나를 향한 아빠의 질문과 강아지들의 반가운 짖음이 한 번에 쏟아져서 정신이 없다.

치대는 강아지들에게 아낌없는 포옹과 뽀뽀를 퍼 부운 후,

아빠 품에 안겨 방금 전 강아지들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치대고 뽀뽀한다.

그렇게 데크에 서서 한참이나 서로 반가워 한 뒤 겨우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몇 달 만에 찾은 집에 그새 가구가 늘었다.

아빠가 만든 커피 테이블, 아빠가 만든 원목 식탁, 아빠가 만든 화분 받침대, 하나같이 견고하고 멋스럽다.

뜨거운 보이차를 내려 아빠가 만든 식탁에 앉아 홀짝대며 아빠를 구경한다.

흰색 메리야스와 편한 잠옷 바지를 입은 덩치 좋은 아빠는 고무장갑을 낀 채 엉덩이를 약간씩 쌜룩 대며 설거지를 한다. 내가 와서 기분이 좋은가보다, 아빠에게도 강아지 꼬리가 있었다면 필히 바람개비처럼 쌩쌩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설거지하는 아빠의 뒤통수에 대고 그동안의 서울생활을 말한다.

아빠는 내 목소리를 잘 들으려고 설거지물을 약간 줄인다.     


설거지를 끝낸 아빠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 두 캔을 꺼내 식탁에 올린다.

안주로 꺼낸 사과를 깎는 아빠의 맥주 캔은 내가 대신 따준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과육을 나에게 건네준 뒤, 아빠는 사과 갈비에 붙은 살을 삭삭 베어 먹는다.      

“엄마는 어디 갔어?”

“시내에 친구 만나러, 밤에나 들어올걸?”

“오예”

“왜?”

“엄마 없으면 술 많이 마실 수 있잖아”     


한 캔으로 시작했던 맥주가 두 캔이 되고, 세 캔이 되다가 어느새 소주로 바뀐다.

“나 아빠 닮아서 주량은 어디 가서 안 지잖아. 대학 때도 남자 선배들 내가 다 집까지 데려다줬어”

“그려 역시 내 딸. 지지마! 다 이겨버려”

“아빠, 내가 만날 천날 이기기만한게 내가 인기가 없자녀. 남자들이 다 나 안 좋아해 기 세다고”

“그런 쪼~올보 새끼들을 만나서 뭐더냐. 등빨 좋고, 네 말 잘 듣는 그런 남자를 만나야지.

쓰잘데기 없이 여자한테 자존심 세우는 남자를 뭐달라고 만나. 만나주지 마”

“맞어. 아, 아빠! 은혜한테 얘기 들었어? 걔 남자친구가 엄청 속 썩인다는디”

“들었지. 아빠가 먹고 버리라고 했어”

“딸한테 남자친구 먹고 버리라는 아빠가 어딨어 진짜”

“그럼 그런 남자를 먹고 버려야지 뭐덜라고 만나냐 뭐덜라고”     


명쾌 통쾌 상쾌한 아빠의 대답에 가슴이 뻥 뚫려 건배를 외친다.

‘챤-!’ 경쾌하게 소주잔이 부딪히는 소리, 한 입에 꼴깍 털어 마시고 동시에 ‘크-!’     


등에 꽂히는 시선이 느껴져 뒤를 돌아보니 데크에서 강아지 세 마리가 쪼르륵 앉아 나를 쳐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30킬로도 넘는 형통이가 샷시에 왕 발을 턱 기대서 일어선다.

좌우로 요란하게 흔들리는 형통이 꼬리에 소망이와 해피가 치인다.     


“아빠, 나가서 마시자”     


아빠가 커다란 쟁반에 안주거리와 술병, 술잔을 올리는 사이 베란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복슬거리는 형통이 얼굴을 다소 거칠게 쓰다듬어 준다. 헥헥거리는 형통이의 따뜻한 입김이 얼굴에 닿는다.

제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소망이와 해피의 이름을 부르니 신이 나서 춤을 추듯 팔짝거린다.

강아지들에게 인형을 던져주며 좀 놀고 있으니 어느새 뒤쪽 데크 테이블 위에 새 술상을 차린 아빠가 나를 부른다.

강아지들을 뒤에 줄줄 달고 아빠가 있는 곳으로 가 앉는다.

바람도 시원하고 노을도 예쁘게 지기 시작했다.     


“아빠 나 예전에 남자친구랑 동남아 갔던 거 엄마한테 아직 말 안 했지?”

“당연하지 엄마 알면 난리 나는데”

“절대 말하지 마. 엄마 알면 뒷목 잡고 쓰러져.”

“너도 아빠 드론 5만 원짜리라고 뻥친 거 엄마한테 말하지 마”

“아니 아빠, 아빠는 진짜 너무했어. 누가 30만 원짜리를 5만 원이라고 뻥을 쳐”

“엄마 알면 아빠 용돈 깎인단 말여”

“아빠 용돈 얼마 받는데?”

“5만 원”

“한 달에?? 나 초딩 때도 아빠 한 달에 5만 원 받았잖아”

“안 올려줘”

“엄마도 진짜 엄마다”     


아빠는 출출하다며 뚝딱 고추장 불고기를 만들어 내온다.

요리 잘하고 자상하며 덩치 좋은 남자를 만난 엄마는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는가.

비록 30만 원짜리 드론을 5만 원이라고 뻥치긴 했지만, 그 정도는 귀여울 것 같기도 하고...     


김이 펄펄 나는 고추장 불고기 한 점을 막 집어먹으려는데 아빠가 뭔가 생각났는지 ‘아!’ 하더니 집 안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내 신난얼굴로 뭔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귀해 보이는 담금주를 들고 나온다.     

“그게 뭐야?”

“산삼주. 선물 받았어. 지금 딱 맛있겠다”

“오..!”     


아빠가 담금주 병을 조심스럽게 들어 머그컵에 옮겨 담는다.

어째 담는 술보다 버리는 술이 더 많은 것 같다. 컵을 타고 떨어지는 몇 방울의 술도 살 떨리게 아깝다.

머그컵 하나를 산삼주로 가득 채운 아빠가 담금주 뚜껑을 닫는다.     

“딱 요것만 마시자잉. 담금주는 적당히 먹어야 약 되는 거여”     

보리차 빛깔 산삼주를 소주잔에 따라 호로록 마신다.

쌉싸래한 향긋함이 입과 코에 퍼진다. 안주 먹기가 아까울 정도로 향이 좋다.     

“캬- 좋다!”     

아빠가 넣어주는 고추장 불고기를 날름 받아먹는다. 음, 이 맛이지!

      

“아빠, 내가 원래 숙취가 진짜 없었거든?

대학 다닐 때도 아침 7시까지 술 겁나 퍼마시고 한 시간 자고 1교시에 시험 치러 갔었단 말이야,

근데 내가 없던 숙취가 생긴 게 언제인 줄 알아?”     

아빠도 산삼주를 털어 마신 후, 고추장 불고기를 한 점 먹는다.     

“언제?”

“왜, 나 어학연수 갔다가 일 년 만에 귀국해서 아빠랑 술 마신 날. 그 날 술병 제대로 났잖아.

그 뒤로 과음했다 싶으면 다음날 힘들어. 간이 약간 썩은 것 같아”

“그 날 솔찬히 마셨지. 둘이서 보드카 1L짜리를 한 병 다 비우고, 데낄라도 한 병 마셨으니까”

“그거 마시기 전에 고량주도 두 병 마셨어”

“맞네. 야 너 그날 술주정해가지고 아빠가 얼-마나 짜잉났는 줄 아냐?”

“내가? 뭔 술주정?”

“가시내가 한 말 또 해싸코 또 해싸코, 들어가 자라고 방에 띠밀어 놔도 벌컥벌컥 나와 가지고

아빠 사랑한다고, 한 잔 더 하자고. 어휴”

“참나, 아빠랑 술주정 똑같고만. 아빠도 한 말 또 하고 또 하거든?”

“긍게 니가 내 딸이지”

“아빠, 은혜도 한 말 또 하고, 또 한다? 걔 취한 거 보면 좀 소름 끼쳐. 아빠랑 술 먹는 것 같아. 얼굴도 아빠랑 닮았잖아”     


아빠가 프라이팬 가득 만들어 왔던 고추장 불고기도 어느새 바닥이 보이고,

강아지들은 테이블 밑에 엎드려 서로를 베개 삼아 잠이 들었다.

노을 졌던 하늘은 서울 하늘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깊게 어두워졌고 대신 잘 닦아놓은 은수저 같은 별들이 반짝거린다.     


어렴풋하게 엄마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고.


다음날 아침, 방문 너머로 들리는 엄마 아빠 대화 소리에 설핏 잠이 깬다.     

“아니, 얼마나 마신 거야. 당신이랑 이슬이랑 데크에 마주 앉아서는 둘이서 한 얘기를 또 하고~ 또 하고,

강 씨 아니랠까봐 둘이 똑같아가지고서는.....”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마무리가 뻔하게 그려져 웃음이 난다.

화장실은 좀 참았다가 나중에 가는 게 좋겠다.

푹신한 이불을 큼직하게 뭉쳐 다리사이에 끼우고 다시 눈을 감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증금, 너에게 청춘을 바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