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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이슬 Jan 16. 2019

겨울이니까 총알오징어를 나누어 먹자

만날 땐 늘 호들갑스럽고 헤어질 땐 늘 덤덤한 우리의 기특함.

망원동의 낡아 무너져가는, 추운, 곰팡이가 있는, 곧 쫓겨날, 그럼에도 행복한 옥탑방에 친구들이 모였다. 

모임 이틀 전, 겨울에 먹어야 제 맛이라는 총알오징어와 과메기를 주문하였다. 

제철 음식을 잘 챙겨 먹지 못하는 자취생들끼리 돈을 모아 주문한 음식이었다. 

만 원씩 모아서는 여섯 명의 배를 넉넉히 채울 양질의 음식을 준비할 수 없었고 2만 원이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신념인 ‘놀 때 돈 쓰지 않기’에 맞지 않기에 적당히 타협하여 만 오천 원씩을 걷었다. 

참고로 우리의 신념은 하나언니의 말버릇 ‘놀 땐 돈 쓰는 거 아니야’에서 시작된 것인데, 

재미있는 것은 하나언니는 내가 살아본 세상 안에서 제일 확실하게, 제일 즐겁게 노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놂의 가성비는 정말이지 엄청나다.      


신년에 처음 모이는 자리를 특별히 기념하며 탁꾸가 모두에게 새해 카드 선물했다. 

2019년을 행복하고 야하게 보내라는 탁구의 응원 섞인 덕담이 마음에 들었다.

하나언니도 준비해 온 선물 꾸러미를 풀었다. 우리 집에 오기 전 책방에 들러 급하게 고른 책이었다. 

하나언니는 한 명 한 명에게 책을 나누어 주면서 각각에게 선물하는 책의 의미를 즉석에서 만들어냈다. 

오늘 처음 만나는 지원에게는 차나 한 잔 하자는 의미로 <차나 한 잔>이라는 책을, 

일과 사람들에게 지쳐있는 탁꾸에게는 <권태>라는 책을, 나에겐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라는 책을, 

키 작은 남자친구를 둔 지수에게는 <키 작은 프리데만 씨> 라는 책을 선물하였다. 

즉석에서 꾸민 이유 치고는 ‘넘나 찰떡’이었기 때문에 선물 받은 모두가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소소한 것이 내밀한 의미와 큼직한 마음을 머금고 선물이 되는 생생한 순간이었다.


평소에 여자 셋이 사는 집에 여섯 명의 남녀가 둘러앉았는데도 묘하게 집이 더 넓어진 기분이었다. 

자그마한 좌식 책상을 과메기와 뿔소라와 총알오징어와 매실주와 돈까스와 과일로 가득 채웠다. 

전부 9만 원에 마련한 음식이었다. 밖에서 먹으면 20만 원은 거뜬히 넘길 정도로 푸짐한 양과 훌륭한 맛이었다.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탁꾸에게 블루투스 스피커를 맡겼다. 우리는 탁꾸가 엄선한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큰 목소리로 대화하고 웃었다. 그러다가도 우리의 웃음소리보다 훨씬 크고 신나는 음악이 나오면 주저 없이 일어나 춤을 추었다. 좁은 거실에서 밥상과 술병들을 피해 조심조심 추는 춤이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나는 얼마 전 다친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음에도 우리가 오랜만에 모여 춤을 춘다는 사실이 너무 신이 나서 

다치지 않은 한 발을 바닥을 딛고 다친 다리를 허공에 흔들며 춤을 추었다. 

친구들이 그런 나를 보고 고개를 젖혀가며 크게 웃었다. 

“이슬이를 위해 상체로만 춤을 추자. 앉아 앉아”

지수의 제안대로 우리 여섯 명은 뜨끈한 전기장판에 엉덩이를 다시 붙이고 어깨와 팔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우리에겐 ‘만나서 얘기하자’로 끝냈던 수많은 근황들이 있었다. 

드디어 만났으므로 우리는 뼈대만 있던 얼기설기한 근황들에 바쁘게 살을 붙였다.

그중 가장 반가웠던 소식은 하나언니의 연애였다. 

꽤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이라고 했고, 이십 대의 연애와는 확실히 다른 삼십 대의 사랑이랬다. 

아직 이십 대의 끝자락을 사는 중인 우리는 알 순 없지만 왠지 알 것 같은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언니의 말을 들었다.

애인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언니의 두 눈은 반달 모양으로 구부러졌고 발그레한 볼은 예쁘게 씰룩거렸다. 

언니는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꾸만 혼자 부끄러워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내 팔을 가볍게 때리며 웃었다. 혼자서 웃느라 남자친구 이야기를 30초도 이어가지 못하는 언니를 흘겨보며 야유했지만 언니와 똑같은 모양으로 웃게 되는 입과 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듬뿍 사랑하는 중인 세 명과 듬뿍 사랑할 대상이 없는 세 명이 모인 자리는 어쨌거나 사랑이야기로 한참 동안 소란했다. 웃고 떠드는 동안 2차로 찐 총알오징어가 알맞게 익었다. 오징어를 내오기 위해 잠시 주방에 갔다. 

거실에서 단지 두 걸음 떨어졌을 뿐인데 다섯의 얼굴과 온몸이 한 번에 보였다. 

그들의 눈과 입과 콧구멍과 몸짓과 목소리가 하나같이 커다랬다.     


밤을 꼬박 새우고 응급실에서 바쁘게 뛰어다닌 간호사 탁꾸는 열몇 번째 건배 끝에 잠이 들었다. 

잠자는 탁꾸를 배경으로 오늘의 총알오징어 모임을 기념하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나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했다. 워낙에 친한 우리는 그렇기에 성심성의껏 인사하는 법이 없다.

그날도 친구들은 안녕, 두 글자를 말하고 현관을 나섰고 집주인은 거실에 앉아 가는 이를 대충 보냈다. 

만날 땐 늘 호들갑스럽고 헤어질 땐 늘 덤덤한 우리의 관계가 새삼 기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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