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다가 이젠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이 행복한 순간
가을과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고 각자 할 일을 하던 중에 문득 행복해졌다.
바쁘게 두드리던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기지개를 켰다.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 일에 집중하는 가을에게 들뜬 얼굴로 나 지금 행복하다고 말했다. 가을이 왜냐고 물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격 걱정 않고 매일매일 커피를 주문하는 요즘을 살고 있기 때문에 몹시 부자가 된 것 같아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가을이 웃으며 말했다. “성공했다 얘.”
요즘 나는 합정동에 있는 카페에 거의 매일 와서 글을 쓴다. 예전에는 커피 값이 부담되어서 좁고 불편한 탁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몇 시간이고 업무를 하느라 다리에 쥐가 나기 일쑤였는데, 얼마 전 브런치에서 받은 상금과 출판 계약금 덕에 팍팍한 삶에 여유가 생겨 커피 값 정도는 고민 없이 지불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덕분에 넓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탄탄한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두고 허리를 편 채로 오랜 시간 동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가을에게 역시 돈이 좋긴 좋다고 말했다.
몇 달 전, 늦은 졸업시험을 치러 오랜만에 학교에 갔다. 이른 아침인지라 잠이 깨질 않아서 학교 안에 있는 아름다운 커피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아웃했다. 3천 원도 안 하는 뜨거운 커피를 들고 조용한 강의실에 들어가 앉았다. 커피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셨을 때, 새삼 성공했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대학 때 단 한 번도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 돈 주고 사마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렇게 커피 값이 부담스럽고 아까웠는데 지금은 단지 잠이 안 깨서 이렇게 커피를 마시고 있다니 대단한 부의 성장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참 일하는 중인 가을 옆에서 턱을 괴고 시원한 커피를 홀짝였다. 할 일을 끝마치려면 아직 멀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을 정도로 행복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커피 맛도 모르는 주제에 커피 향을 즐겨볼까 하고 코 평수를 한껏 넓혔다. 찬 커피에서는 커피 향이 나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카페 책장에 꽂혀있는 책을 한 권 뽑아 펼쳤다. 기가 막히게 환상적인 시가 수록되어있었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간지러운 음악에 절로 고개가 까딱여졌다. 잔뜩 쌓인 할 일을 미뤄놓고 오래오래 빈둥대며 심심해지도록 시간을 낭비했다. 5500원으로 산 무료함은 빈틈없이 완벽하게 좋았다.
가을 옆에 앉아 빈 벽을 보고 골똘했다. 이 전엔 맘 놓고 커피를 마실 수 없어서 속상했던가? 그건 아니었다. 커피 값을 아꼈을 뿐, 커피를 못 마셔서 속이 상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런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다가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는 사실에 새삼 행복한 순간’이었다. 이건 좀 뭐랄까, 그야말로 개이득이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덮었던 노트북을 다시 펼쳤다. 무엇을 쓰더라도 괜찮은 글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