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The Path>展
.
“물방울을 그리는 행위는 모든 것을 물방울 속에 용해시키고 투명하게 ‘무(無)’로 되돌려 보내기 위한 행위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허’로 돌릴 때 우리들은 평안과 평화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에고’의 신장을 바라고 있으나 나는 에고의 소멸을 지향하여 그 표현방법을 찾고 있는 것이다.”
1988. 김창열
.
유난히 힘들었던 가을이다.
몸도 마음도 힘이 들 때면 언제나 그렇듯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잠시 현실을 도피한다.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으면 마음에 힘이 생기고, 스스로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내게 행복은 유년시절, 경주, 선재미술관 같은 조각의 파편들인데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문화예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부모님은 서울로 부산으로 경주로 자주 예술을 경험하게 해 주셨다. 특히 울산과 가까웠던 경주에는 대우그룹에서 운영하던 힐튼호텔의 선재미술관이 있었다.
대우 그룹의 외아들 고故 김선재님의 이름을 따서 지은 미술관이라 미술관 운영에 특히나 공을 들인 공간이었다. 그 덕에 한국의 주요 작가를 소개하며 좋은 전시를 자주 접할 수 있던 것이 지방에 살던 내가 누린 호사 중 하나였다.
김창열 선생님의 작품도 선재미술관과 힐튼호텔에서 자주 봤던 그림이기에 그 작품을 마주하면 이상하게 유년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마음이 따뜻해진다.
11월 초 한참 힘들었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전시장을 찾았다. 그간 알지 못했던 작가의 깊은 고뇌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기억과 고통 번민은 물론 치유하는 것이다’라는 작가의 말을 읽으며 정말이지 예술의 힘을 경험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