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여러 사람이 여유롭게 걷는 걸 봤다. 울타리 속 산책로인 듯했다. 그들 틈에 섞이려 입구에 도착한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산책하는 사람 사이로 조형물이 가득했고, 그제야 정원이 아니란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오래된공동묘지였다. 할슈타트 묘지는 마을 한가운데 자리했는데, 대체로 도시 외곽에 있을 거란 경험적 개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카타콤베라 불리는 이곳은 전통적인 장례문화를 보기 위해 관광객이 많이 찾는 장소였다. 나무로 된 이름표 아래는 저마다 미니 정원을 품었고꽃은 다채롭고화사했다.
묘지는 대부분 한 방향을 응시했는데,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탁 트인 호수가 시선 끝에 닿았다. 고요하고 차분하고 시원했다. 그들과 나란히 서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소리 없는 자들이 머문 곳에 소리 내는 자가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이곳은 누군가의 일상에 가깝게 스며 있었다. 여기에서는 죽음이 멀리 있거나 무조건 피해야만 하는 건 아니었다. 기억 속에 남겨진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곳이자 매일의 산책길이었다.
쪼그라든 마음
가게 문이 열리자 짤랑-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직원이 안내해준 자리를 본 순간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테이블 옆으로커다란 유리창이 보였기때문이다. 막힘없는 통창 너머로 드넓은 호수가 펼쳐있고 하얀 안개가 자욱했다.
경치를 감상하며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풍경에 웃음이 씰룩 튀어나왔지만 정신을 차리고 곧바로 점잖은 척을 했다. 바로 옆에 서있는 직원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이런 뷰는 우리가 묵은 숙소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듯, 덤덤하게 자리에 앉았다.
직원이 떠나자내가 은밀하게말했다. "호수 위에 둥둥뜬느낌이야"
언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여행자인데 우리는 익숙한 척을 하고 있었다. 마치 경치 좋은 레스토랑에 많이 와본 사람처럼, 멋진 숙소에서 호수를 실컷 보다 나온 사람처럼. 정반대였던 우리는 처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못해본 경험을 부끄럽게 여겨서, 마음껏 표출해도 부족한감정을 꾹 누른 채 숨기기 바빴던 것이다.사실 처음은 부끄러운 게 아닌데.
낡고 저렴한 숙소라서, 호수 뷰 레스토랑이 처음이라서 결코 부끄럽거나 숨겨야 할 일이 아니란 것을 이제는 안다. 진짜로 부끄러운 일을 저질러 놓고도 당당한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알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이란 창피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타인 눈치 보느라 내 감정을 숨길 필요 없다고,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온다면 온전히 누리라고. 살면서 흔치 않은 순간이라고. 과거 나에게 외치는 소리는 음소거가 되어 공중을 떠돈다.
잔잔한 호수를 보면 마음이 차분해져서 음식도 오래 씹게 되었다. 평소에는 10분 만에 사라지는 음식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래도록 음미했다. 덕분에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똑같이 주어진 시간인데 호수 위에서는 시간이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졌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조금 더 느리게 보냈다.
음식의 온기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아침이 있다. 조식을 제공해 주는 숙소에 묵을 때가 그렇다. 대용량 식빵과 쨈, 시리얼이 전부인 조식이지만, 여행에서 한 끼 절약은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추워서 경직된 몸을 이끌고 내려온 1층 식당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따뜻한 공기를 가로질러 두 사람분의 식기류가 놓인 자리에 앉았다. 접시 위에는 처음 보는 쨈과 버터가 무려 네 개나 있었다. 낱개 포장이 흥미로웠다. 이전 쨈은 큰 유리병에 담겨 공용으로 나눠 먹어야 했다.
새로워서 쉽게 부푼 호기심은입에서 많은 말을쏟아내게 했다. 이야기로 가득 찬 식탁 위로 주인아주머니가 빵 네 개와 우유를 올려놓으셨다.
“빵이 모형처럼 생겼다” 언니가 말했다.
차갑고 딱딱해 보이는 빵 하나를 집어 들자 뜨거운 엔트로피가 손끝으로 전해졌다.생각지도 못한 따뜻함이 닿았다. 밤새 차갑게 식은 몸으로 전해진 온기는 이날 아침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방금 구워진 빵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일. 옆에 있던 우유를 머그컵에 따르자 김이 모락모락 났다.
“우유도 따뜻해” 온기는 에너지를 빠르게 전했다. 추운 날 먹는 따뜻한 음식은 경직된 얼굴 근육을 하나씩 펴주는 일이었다. 그저 기대 없이 왔다고 치부하기엔 미안한 조식이었다.
조식 시간에 맞춰 우유를 끓이고 우리가 자리에 앉는 순간 구워졌을 빵. 공용 테이블에 놓인 빵을 직접 토스트기에 넣던 지난날의 조식과 달랐던 이유는 누군가 공간을 데우고, 우리를 바라보며 움직였을 그 따뜻함 때문 아닐까. 쪼그라든 지난밤을 스르르 풀어주는 아침이었다.
그리움을 심어두는 일
떠나는 날 아침. 결국 맑은 날 할슈타트는 못 봤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여행에서 ‘다음’이란 그곳에가기까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을 의미했다. 동시에 기약 없는 시간 속 그리움을 심어두는 일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