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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 호 Oct 26. 2022

꾸준한 사랑

잘츠부르크

당황한 언니 목소리가 잘츠부르크 숙소 리셉션에 울렸다.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어, 오늘 예약자 명단을 찾아봐도. 정말 예약한 거 맞아?”


언니는 내게 시선을 화살같이 꽂으며 말했다. “뭐야?”

숙소담당인 나는 손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1인 20유로, 6인 mix 도미토리, 예약금까지 모두 넣었는데, 예약자 명단에 없는 게 이상했다. 이 호스텔이 맞는지 다시 확인했다.


모니터를 찬찬히 살피던 그는 뭔가 발견한 듯 눈이 커졌다 “내일로 예약되어 있어


“.....?” 내일이라니? 뒤엉킨 머릿속을 빠르게 굴렸다. 배낭을 바닥 내려두고 다이어리를 꺼내 잘츠부르크 숙소 일자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정말 내일이었다. 뇌 회로가 싹둑 잘린 것 같았다.


하지만 왜 하루 일찍 여기 와 있는지 우리도 몰랐다. 일단은 혼동을 일으켜 미안하다고 사과한 뒤, 늘 묵을 남았는지 물었다. 하루치 숙박비를 추가로 계산했다. 계획에 없던 지출. 그렇게 잘츠부르크에서 예상치 못한 하루가 끼워졌다.




배정받은 6인실로 돌아와 일정표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적힌 대로라면 오늘, 할슈타트에 있어야 했다. 더 혼란스러웠다. 계획때부터 잘못된 건지, 일정이 뒤틀린 건지. 무거운 공기가 언니와 나 사이를 드나들었다.


지금까지 무탈했는데. 고민하던 나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인을 분석하던 언니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절규가 이어졌다.


"뭔데.."

사건의 전말은 무려 비엔나까지 가야 했다. 잘못 끼운 첫 단추처럼, 그때부터 일이 틀어졌다. 빈 무려 전전 도시였는데, 그곳에서 하루 일찍 나온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빈 숙소에서 체크아웃할 때 깔끔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본인 일정을 모르고 나가는 여행자는 없을 테니 절차는 단순하고 빠르게 끝났다. 숙소 다음으로 미리 예약해둔 할슈타트행 OBB (기차) 티켓에도 새겨진 날짜가 달랐는데, 그마저도 무사히 통과되었다.


할슈타트 숙소에 도착했을 때 주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일 오는 줄 알았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저 농담이라고만 생각했던 말속에 답이 있었다.


마지막 잘츠부르크행 버스도 일자가 달랐지만 문제없이 넘어간 사실까지. 드러날  한 신호 전부 이고 있었던 것이다. 무려 잘츠부르크 숙소에 와서야 알게 된 진실이었다. 몰랐을 때는 평온했던 마음이 알고 난 뒤 무척 괴로워졌다. 너무 바보 같아서다.




단순히 시간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비엔나를 전부 느끼기엔 그저 부족한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루라는 구멍이 생겼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계획에 없던 숙박비 지출과 빈에서 날린 하루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 계획 6개월 준비한 우리는 딱 출발 전까지 완벽했다. 벽한 계획은 자신감을 주지만, 느슨한 마음도 함께 준다. 촘촘한 계획은 어 문제가 와도 방패막이 되어줄 것 같아서다.


하지만 아무리 계획을 꼼꼼하게 세운들 결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음을,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여행은 우리를 어떻게 하면 무방비 상태로 만들지 고민하는 존재 같았다. 어떻게 하면 당황할지, 힘이 빠지게 할지를. 이젠 그만할 때도 되지 않나 싶은 순간에도, 여행은 매번 새로운 문제들로 우리를 놀래켰다. 아무리 계획한다 한들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계획을 많이 세울수록 오히려 생기는 틈이 많아졌다. 무계획 여행에서 변수는 드문드문, 어쩌면 줄어들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계획 꼭 세워야만하는 성격으로 타고났다. 세워둔 계획이 무너져도, 여행의 짓궂은 장난에도 웃어넘길 줄 아는 면역이 필요했다. 일상에서 경험 못할 일을 여행에서는 자주 겪었지만, 당황스러운 순간이 와도 "괜찮아, 그럴 수 있어" 하고 넘길 줄 아는 마음. 잡고 있어 봤자 괴로운 감정을 빨리 털어내는 그런 마음.


마주한 문제를 해결한 횟수가 쌓일수록 비슷한 실수에 대해서는 내성이 생기기도 했다. 파도처럼 요동치는 마음이 잔잔하게 바뀌기까지 여러 시간이 쌓였다. 마음을 너그럽게 쓰는 법을 여행에게서 배울 수 있었다.


우리는 여행하는 과정을 통해 여행자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여행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그 끝에는 비슷한 마음결이 생긴다고 믿는다. 낯선 땅 위에서 만나 서로 이해하는 관계가 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시간여행

중세 시대 문맹인을 위해 만들어진 철제 간판이 모여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가 되었다. 상점마다 개성이 녹여진 간판을 보러 많은 사람이 모인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들이 남긴 것을 보며 그때 사람들을 떠올린다. 천 년 전 마을 분위기 고스란히 담 거리에 서면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을 잠시나마 거슬러 보고자 하는 경험이 여행임을 깨닫게 된다. 그 시절과 이어진 거리를 시간 여행하듯 천천히 걸었다.







꾸준한 사랑

잘츠부르크 미라벨 정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송을 불렀던 장소로 유명하다. 정원에 들어서자 같은 영화 한 편씩을 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레미송을 흥얼거리거나 기념사진 찍는 사람 사이에서 영화 속 장면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나는 1969년 개봉된 영화가 50년간 받는 꾸준한 사랑을 본다. 시대를 초월하는 마음이 정원 곳곳에서 재생된다.






전쟁 없는 세계

산꼭대기에 있는 호엔잘츠부르크성은 훼손되지 않은 세월을 담고 있다. 숱한 전쟁 속에서 한 번도 점령당한 적 없기 때문이다. 성 안에 있는 고문, 무기 박물관에서는 전쟁 치르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무언가를 얻거나 뺏기지 않으려는 과정 속에서 생명이 너무도 쉽게 잘려 나가는 것을 본다.


전쟁은 일상의 터전을 부수고 인간 삶이 어디까지 참혹해질 수 있는지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리는 일. 소수 평생 살 것처럼 전쟁을 일으키고, 피해는 무고한 다수가 고스란히 안게된다.


수많은 생명이 지워져야만 겨우 끝나는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천 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 평범한 일상이 잔해 더미에 깔리고 있다. 이제는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보며 오늘도 전쟁 없는 세계를 간절히 바란다.







작은 실천


전망대에 선 관광객들은 카메라 셔터를 마구 눌러댔고,  옆에 서자 탁 트인 잘츠부르크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거대한 세상이 쪼그라든 것 같았다. 흔치 않은 장면을 보았을 때 분주해지는 것은 전 세계를 막론하고 비슷해 보였다.


사진 찍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성벽을 따라 걸었다. 고요한 길이 계속 이어졌다. 걷다 보니 아까와는 다른 풍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집 사이로 울창한 나무 빼곡했기 때문이다. 저마다 나무를 품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빨라서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유한한 지구가 모든 면에서 조금씩 닳고 있어서다. 변화가 가속화될수록 오존층은 파괴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 된다. 공장을 짓기 위해 산림이 제거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은 사람을 품는다. 산과 나무를 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자연 없이 살 수 없피부로 느낄 것이다.


나는 지구가 천천히 늙어가길 바란다. 작은 텃밭을 일궈 채소를 거나, 텀블러와 유리 빨대를 챙기 일회용품을 자제하 이유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번거롭고 피곤하유난이라 할 수 있지만, 미세하게나마 지구에 도움이 된다면 그거 하나로 충분해진다. 원래 좋은 건 어렵고 나쁜 건 쉬우니까.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게, 날씨를 크게 거스르지 않으 살아가려 한다. 추우면 히터 대신 내복을 껴입 수면양말을 신는다. 오늘도 지구 노화에 불 붙이지 않는 방향으로, 아주 작은 실천을 이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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