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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슬호 Oct 29. 2022

긴 밤을 지나는 동안

베네치아

긴 밤을 지나는 동안

모두 이불속으로 파고든 시간, 우리는 배낭을 멨다. 무거운 눈꺼풀을 이겨내며 인적 드문 거리를 걸었다. 잘츠브루크 새벽 공기는 시원했고, 캄캄한 도시는 같은 공기를 낯설게 만들었다. 두려우면서도 설레는 마음이 거리 위를 맴돌았다.


베네치아까지 야간열차를 타러 가는 길. 분에 숙소와 교통을 한 번에 해결게 되었다. 엉덩이에게만 주어진 1칸짜리 좌석에서 잠도 자고 세수도 하고 아침도 먹어야 하는데 문득 비행기와 닮았다고 느꼈다.


새벽 1:30분. 티켓에 적힌 좌석을 찾아 도착한 곳엔 6명이 빼곡히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승무원은 복도에 선 우리 여권을 확인한 뒤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아무 데나 앉으라고 말했다. 모든 좌석은 문이 닫혀 있었고 그 안은 캄캄했다.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 든 열차표는 그저 종이 쪼가리란 것을 타고난 뒤에 알게 되었다.

빈에서 출발한 열차는 승-하차를 반복하며 오기 때문에 미리 탄 사람이 한 자리씩 차지했던 것이다. 당연히 표에 적힌 자리가 확보된 줄 알았는데, 꼬박 7시간을 서서 가는구나 싶어 괜히 값싼 좌석을 구입한 과거를 탓했다.


한참 자리를 찾던 그때, 맨 끝에 한 명만 앉아 있는 희귀한 칸을 발견했다. 옆자리가 비었는지 물었고 그는 흔쾌히 앉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의자 아래쪽을 잡아당기면 평평한 침대가 되는 것도 알려주었다. 바닥에 배낭을 집어넣고 의자를 이으면 의자 6개가 침대 3개로 완성되었다.

우리 셋은 나란히 누워 잠을 청했지만 나는 그를 온전히 믿을 수 없었다. 야간열차에 소매치기가 많다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귀중품을 노리고 친절을 베풀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조가방을 옷 속 깊이 품고 잤다.


(잘츠부르크 -> 베네치아 OBB 1:34 -> 오전 8:30)




일어나자마자 찾은 보조가방이 가벼웠다. 손 끝에 무엇도 닿지 않았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어젯밤 친절했던 남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여행에서는 친절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늘 되새겼으나 잠들어야 하는 야간열차에서는 그마저도 별 수 없음을, 모두 잃고난 뒤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빈 껍데기만 남은 가방을 손에 쥔 채 울부짖을 뿐이었다. "내 핸드폰, 내 여권!!"


얼마나 크게 외쳤는지 "권!"과 동시에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난 것 같았다. 동 트기 전,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어스름한 빛이 기차 안을 감돌았다.

'..??'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운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비어있던 보조가방이 아기 캥거루처럼 품 속에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다. 밤새 도둑이 들어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마음이 꿈으로 파고든 것이다. 너무도 생생해서 한편으로는 핸드폰과 여권이 다시 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무엇을 선택하든 결과적으로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잘한 일이 되곤 했다. '선택하길 잘했다' 쉽게 내뱉던 말속에 무수히 많은 운이 작용했음을 이제는 안다. 쿠셋(6인실 침대칸) 아닌 컴파트먼트(의자 6개) 좌석에서 아무 일 없이 자고 일어난 건 분명 운이 좋은 거라고, 꿈에서 대신 겪은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운이 따르지 못한 결과를 마주해도 쉽게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운이 좋았다면 안 좋을 때도 있는 거니까. 후회 여러 개가 모여 언젠가 잘한 일 하나를 만들 테니까. 꿈에서 경험한 후회는 현실에서 반대가 되었고, 묵직한 가방 "잘했다" 고 말하고 있었다.





꿈속에서 사라졌던 그는 말린 새우처럼 누워 있었다. 잠든 모습을 힐끗 보다가, 이내 미안해지고 말았다. 꿈속에서조차 도둑이라 확신했던 그 마음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벽이 높았던 만큼 무너져 내린 잔해는 무겁기만 했다. 어쩌면 긴 밤을 지나는 동안 문쪽에서 잔 그 덕분에 안전했는지 모르는데.


내가 가진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작은 호의조차 의심해야 하는 공간은 풀기 어려운 숙제와 닮았다. 훗날 야간열차를 다시 탄다고 해도 경계를 완전히 버릴 수 없어서 더욱 그랬다. 마음이 답답해서 나는 그를 조심히 넘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와.." 짧은 탄성이 터졌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입을 닫지 못한 채 그대로 얼어버리고 말았다. 창 밖으로 생각지도 못한 푸른 바다가 펼쳐졌고, 출렁이는 물결은 마치 배를 탄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기차가 물 위를 달리는 듯했다. 아직 숨지 못한 달과 어스름한 하늘이 신비하고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혼자 보기엔 너무 아까운 장면을 마주한 것이다.


서둘러 카메라 앵글에 담다가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그리워질 거란 걸 느꼈다. 크고 화려한 건축물보다 고요하고 잔잔한 장면이 오래도록 남을 것을 말이다. 이런 순간은 많이 담기 위해 분주했던 시간보다 비어있는 시간에 찾아왔다. 답답했던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 시원해질 때, 훗날 이 시절을 그리워할 나를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보고 있어도 자꾸만 그리운 마음이 든다.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간을 보고 또 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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