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위한 열정 한 잔 01
잃어버린 엄마의 자존감을 되찾아줄 비밀 레시피
엄마를 위한 마법 카페에서 준비한 커피 한 잔을 선물합니다 :-)
나를 위한 열정 한 잔
생기 넘치는 내 모습이 그리울 때
잃고 나서야 알게 된 일의 소중함
2012년, 지방에서 회사를 다니는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면서 하던 일을 정리했어요. 안정적으로 탄탄하게 잡아 놓은 기반을 버린다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의 일터를 모두 만족시키는 지역은 존재하지 않았고, 어디서든 고생을 조금만 하면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프리랜서가 양보를 하는 게 맞다는 판단에 기꺼이 휴직을 선택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지역에서 시작된 신혼 생활. 일을 다시 시작하기도 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됐고, 극심한 입덧과 우울증, 생각지도 못 했던 조산과 육아가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경력단절녀가 되었어요. 얼마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떠밀려 간 결과였지만 또 한 켠에는 핑계 김에 편하게 좀 쉬어보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단 1점 때문에 합격의 당락이 뒤바뀌는 대학입시의 최전선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며 쌓여온 긴장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보고도 싶었거든요.
매일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일거리에서 벗어난 일상. 임신 중에는 매일 운동을 다니고, 태교를 하고, 살림의 잔재미를 느끼며 그럭저럭 평온한 일상을 보냈어요. 일이 없는 하루가 무료하고 허전하기도 했지만 임신으로 인한 몸과 마음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벅찼던 터라 일이 사라진 빈자리를 들여다보고 의식할 여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출산과 동시에 펼쳐진 전업맘의 하루는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불러왔어요. ‘아이고 그때가 좋을 때였구나. 나가서 100시간 일하는 게 집에서 10시간 애보기보다 100배 낫지. 내가 미쳤다고 집에서 애를 본다고 주저앉아서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내가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내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일을 할 때는 이걸 언제까지 해야 하나, 그만두고 싶다, 하기 싫다 투덜대며 몸살을 앓았건만… 하던 일이 사라진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했는지, 인간의 욕구 최정점이 왜 자아실현의 욕구인지를요.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가져왔던 나의 모성상은 대단한 착각이었어요. 엄마가 없는 빈 집에 들어가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던 저는 ‘아이는 무조건 엄마가, 엄마는 당연히 집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그게 내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이라 여겼고, 나 또한 그런 엄마가 되겠다 다짐했습니다. 그게 특별히 괴롭거나 힘겨울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 했어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지극히 당연하게 이루어질 줄 알았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1980년대가 아니었어요. 여자는 오빠와 남동생을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집안일을 돕다가 결혼을 해서 가정주부로 사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똑같이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사회생활을 합니다. ‘여자를 뭐 하러 가르치냐, 여자가 무슨 일을 할 줄 아냐, 여자를 뭘 믿고 쓰냐’는 말은 이제 생각만으로도 혐오의 대상이 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에요. 집안일과 육아는 더 이상 여성이 해야 할 일의 전부가 아닙니다.
엄마가 나를 낳아 기른 그때와 내가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오늘의 간극은 깊고 넓었어요. 살림과 육아는 내 삶의 만족도를 채워주지 못 했고, 열심히 쓸고 닦을수록, 최선을 다해 씻기고 먹일수록 허무와 공허만이 커져갔습니다. 내가 공부하고 연구하고, 종사하고 인정받던 전문성이 털 끝만큼도 필요 없는 하루가 쌓여갈수록 내가 사라졌습니다.
‘나는 집에서 살림만 하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내 일을 전부 버리고 아이만 키울 수는 없겠구나.’
일을 다시 찾고 싶었지만 계획을 하고 궁리를 할수록 해야 하는 이유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쌓여 갔어요. 일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짐은 거대했고, 일하는 엄마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과 질책은 매서웠습니다. 내 일을 포기하면 ‘집에서 놀고먹는 엄마’, 내 일을 버리지 않으면 ‘자식은 내쳐두는 이기적인 엄마’라니… 무엇을 선택해도 피할 수 없는 손가락질 앞에서 저는 한없이 시들었습니다.
다시는 피어나지 못 할 것처럼 형편없이 오그라든 저에게 물을 부어준 건 우리집 꼬맹이였어요. 아이에겐 너무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해 감춰두었던 그림책을 들고 와 바짝 마른 엄마의 가슴을 파닥파닥 다시 뛰게 만들어 준 여섯 살 딸 아이. 아이가 저에게 선물해 준 그림책은 나카야마 치나츠의 <살아있어>에요. <살아있어>는 살아 있다는 게 어떤 건지 묻고 대답하는 책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씩 보여줍니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숨쉬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숨 쉬는 거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헤엄치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헤엄치는 거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뛰어오르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뛰어오르는 거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자라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자라는 거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꽃이 피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꽃이 피는 거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열매가 열렸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열매가 열리는 거네.
살아 있다는 건 숨 쉬는 것, 소리 내는 것, 물속의 물고기처럼 헤엄치는 것, 땅을 달리는 동물들처럼 뛰어오르는 것. 풀과 꽃, 나무처럼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 맺는 것.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시들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시드는 거네
으아앙 으앙 시들었어. 으아앙 꽃이 시들었어. 으아앙 으아앙 으아앙 으앙.
아, 살아 있다는 건 눈물이 나는 거네. 으아앙 으아앙. 살아 있다는 건 눈물이 나는 것...
하지만 살아있다는 건 시들고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해요. 살아있다는 건 곧 사라진다는 것, 눈물이 나는 것...
책은 여기서 멈추지 않아요. 삶과 맞닿아 있는 죽음과 슬픔을 보여준 뒤, 다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눈물 흘릴 줄 모르지만 살아있는 벌레가 등장하고, 벌레를 잡아먹는 물고기가, 물고기를 먹는 새가, 새를 먹는 짐승이 차례로 나타나더니 짐승 한 마리가 나무 아래 쓰러져 흙이 되어요. 나무에서는 커다란 사과가 열리고, 나는 그 사과를 따 먹습니다.
먹었어 먹었어. 아하하하 나도 먹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웃는 거네
아하하 아하하 아하하. 아얏, 이마를 부딪쳤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아픈 거네
살아 있다는 건 이런 거구나!!
생명의 순환과 원리를 보여주는 그림책 <살아있어>. 아이는 아직 이 책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읽어달라고 조르니 읽어주기는 했지만 마지막 장이 넘어갈 때까지 아무 말이 없는 아이를 보며 확신했습니다. ‘역시 아직은 이르지. 이게 재미가 있겠어?’
그런데 책을 덮으려는 순간 아이가 물었어요.
"엄마 엄마. 그럼 콧구멍이 간지러운 건? 콧구멍이 간지러운 것도 살아 있어?"
저는 책의 운율에 맞춰 대답해 주었어요.
“그럼.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건 콧구멍이 간지러운 거야."
그러자 아이는 또 물었습니다.
"엄마 엄마. 그럼 이렇게 뛰는 건? 이렇게 뛰는 것도 살아 있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아이를 보며 답해주었어요.
"그럼~~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뛰고 있어. 살아 있다는 건 신나게 뛰는 거야."
아이는 까르르 웃으며 더욱 힘차게 발을 굴렀어요. 겅중겅중 솟아오르며 제 몸이 움직이는 리듬에 맞춰 노래했습니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뛰고 있어. 살아 있는 건 뛰는 거야!"
아이는 계속해서 물었어요.
"엄마 엄마 앞구르기는?", "엄마 엄마! 이렇게 꽈당 넘어지는 건?", "엄마 엄마!!! 그럼 이렇게 물구나무 서는 건??"
신이 나서 조잘거리는 아이의 말에 답을 해주니 그게 또 한 권의 책이 되더라고요. 나카야마 치나츠의 <살아 있어>가 우리 아이만의 <살아 있어>로 재탄생 한 것이지요.
우리 아이의 '살아 있어'는 콧구멍이 간지러운 것, 신나게 뛰는 것, 앞 구르기를 하는 것, 꽈당 넘어지는 것, 물구나무를 서는 것. 정말 싱싱하지 않나요? 에너지 넘치는 아이만의 '살아 있어'가 어찌나 예쁘던지요.
‘이 작은 아이의 살아 있어는 이렇게 펄떡펄떡 생기가 넘치는구나. 그럼 나는? 나의 살아 있어는 뭘까? 나는 언제 살아 있다고 느끼지?’ 나는 언제 살아 있을까, 나의 '살아 있어'를 찾아 봤어요.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느꼈을 때, 살아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어 괴로웠던 그런 순간 나를 채워주고 일으켜준 ‘살아 있어’를 되짚어보았습니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읽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읽는 거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외딴 동네, 좁은 집 안의 움직이지 않는 시계. 째깍째깍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할 초침이 움직이는지 마는지 보이지도 않는 시침이 되어버린 영원 같은 시간을 구해준 건 한 권 한 권의 책이었어요. 끝없이 반복하는 자장가가 지겨워 시작한 소리 내어 읽기는 끝나지 않는 형벌처럼 무겁기만 했던 순간의 시침을 옮겨주는 마법이었고, 그렇게 쌓인 책들은 한없이 추락하는 나를 붙잡아 올려주었습니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쓰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쓰는 거네"
아이가 깨지 않고 잠이 든 축복의 시간, 가뭄의 단비같이 소중한 시간이 주어지면 언제나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썼어요. 글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블로그 포스팅. 소소한 일상 이야기와 구입한 물건의 리뷰가 대부분인 지극히 사적이고 잡다한 글이었지만 특별한 목적과 쓸모, 가치를 떠나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 자체가 중요했어요.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들길수록 가슴이 후련해졌거든요. 새하얀 화면 위에 새겨지는 까만 글자는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울분이었어요. 나에게 가장 확실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글쓰기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글자를 알게 된 8살부터 글을 쓰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초등학교를 다니는 6년간 매일 일기를 썼고, 사춘기의 열병을 앓던 중학교 시절에는 수없이 많은 편지를, 입시 준비를 하느라 잠 잘 시간이 부족했던 수험생 시절에도 편지와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고,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부터는 다양한 SNS에 글을 썼습니다. 글쓰기는 하루 세 번 밥 먹기처럼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의 한 부분이었고,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마다 나를 위로해주고 일으켜 세워주는 가장 든든한 친구였어요.
나의 살아 있어, 나의 운명, 나의 길
‘응? 그러고 보니 나의 살아 있어는 읽기와 쓰기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한 나, 읽거나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나. 읽기와 쓰기 없는 나는 상상할 수가 없으니 이게 바로 나의 운명이 아닐까?’
나의 ‘살아 있어’를 마주하니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가 떠올랐어요. ‘우리의 임무는 자신의 운명을 찾아 그걸 살아내는 일’이라고, ‘우리는 어떤 인간이 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가는 길을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 싱클레어. 운명이란 게 정말 있긴 한 건지, 내가 가야 하는 길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서른이 훌쩍 넘도록 좀처럼 보이지 않는 나의 길에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던 싱클레어의 말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싱클레어가 그토록 찾아 헤맨 나의 운명이 글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뜨겁게, 바짝 말라있던 제 가슴을 불태웠습니다.
+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