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슬기 May 28. 2017

엄마라는 단어의 폭력성

위로 한 잔 (3) 나만 찾는 아이가 숨 막히고 도망치고 싶을 때



엄마를 위한 마법 카페, 위로 한 잔.
나만 찾는 아이가 숨 막히고 도망치고 싶을 때

(3)



(2) 편에서 이어집니다.




단점이라고만 생각했던 나의 성격이 사실은 엄청난 장점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려주고, 이런 별종이 나 하나가 아니라며 동지를 찾아주고, 내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까지 제시해주는 책. 이런 책을 만난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좀처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엄마로서의 수치심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준 책까지 만났으니, '남들보다 민감한 성격을 타고난 사람들을 위한 심리서' - 일자 샌드의 <센서티브>입니다.


일자 샌드는 '민감함은 신이 주신 최고의 감각'이라 말하며 민감한 사람들이 민감성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안내하는데요, 제 가슴을 완전히 뒤흔든 부분이 있었으니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부모 역할을 유난히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남들보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자녀를 갖지 않거나 한 명만 갖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부모 역할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내게 필요한 휴식 시간을 갖기가 너무 힘들어요. 잠시 쉬려고 욕실에 들어가면 금방 딸아이가 '엄마, 엄마, 어디 있어?'라고 소리치거든요."



저자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 중 십 대의 자녀와 함께 사는 게 너무 힘들어(너무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해서) 자녀에게 나가 살 것을 권하며 독립을 시킨 부모도 있다고 소개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글을 쓰는 본인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등원 준비를 시키지 않고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없이 실랑이를 벌이며 등교를 시키고 나면 일에 집중할 에너지가 전부 사라지기 때문에요! 그는 매일 반복되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귀마개를 하고 침대에 누워 아이들이 학교에 간 뒤에 일어나는 방법을 선택했다고 해요. 때때로 미안함을 느끼지만 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받아들인다고 했어요. 현실을 인정하고 더 이상 나 자신에게 화내지 않기. 이것이 그가 택한 방식이고, 아이들은 그런 엄마 밑에서도 자립적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 데, 제 가슴이 울컥! 눈물이 날 것 같더라고요.








저는 아이를 18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보냈어요. 워킹맘도 아니면서 18개월밖에 안 된 아이를 기관에 보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보내기 전은 물론이오 아이를 보내는 내내 걷잡을 수 없는 회의에 시달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집을 선택한 건 신랑의 단호한 결정이었어요.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우린 3월부터 무조건 어린이집에 보내는 거야. 당신은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 다만 몇 시간이라도 아이와 떨어져 있을 수 있어야 해. 18개월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뭐 어때? 내가 힘들면 도움을 받는 거야. 지금 우리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게 어린이집뿐이고. 살고 싶지 않을 만큼 괴롭고 힘든 걸 왜 억지로 버텨야 해? 그렇게 하는 게 좋은 엄마라고 누가 그래? 그렇게 말하는 본인들이나 그렇게 하라고 해. 우리는 우리대로 하면 되는 거야. 우리는 어린이집에 보내는 거야.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여기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그 시간에 이제 뭘 할지, 뭐가 하고 싶은지만 생각해."


언제나 제 생각을 존중하고 따라주던 사람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강하게 밀어붙이니 저항할 수가 없더라고요. 못 이기는 척 신랑의 뜻을 따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집에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었어요. 내가 이렇게 혼자 있어도 되는 건가, 지금이라도 가서 아니다 잘못 생각했다 말씀드리고 데려와야 하는 게 아닌가. 집에 있으면서도 불안불안. 내가 부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넘어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하지만 서서히 시간이 지나고, 아이도 저도 점차 적응을 해가기 시작하면서 하루하루 삶의 질이 달라졌어요. 그때 그렇게 단호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내가 있었을까? 오늘까지 내가 멀쩡히 웃으면서 살아있을 수 있었을까? 조금 극단적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질문의 답을 굴려보며 그때의 신랑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 권 한 권의 책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우울증의 늪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벗어나면서, 당시 내가 처해있던 상황과 감정, 생각들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저는 고통의 임계점이 매우 낮은 민감한 사람, 작은 자극에도 크게 고통받는 예민한 사람이며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내향적인 사람이에요. 아이의 작은 짜증과 울음, 찡얼거림도 내 신경 시스템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는 자극이 되는데, 수시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가라앉혀야 살 수 있는 사람이 하루 24시간 잠시도 쉴 틈 없이 나만 찾아대는 아이와 붙어 있었으니…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나 정말 이렇게는 하루도 더 못 살겠다'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던 거죠.


끔찍하게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엄마'라는 단어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깨달았어요. '엄마'라는 단어가 지닌 어마어마한 보편성이 참 무서운 거더라고요. '엄마'라는 말이 주는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나'라는 개별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나는 엄마이기 이전에 ‘나’라는 한 사람인데, 엄마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의 특징은 모두 버린 채 ‘좋은 엄마’라는 틀에 맞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려니… 이게 잘 되겠어요? 평범하고 무던한 사람도 될까 말까 한 판국에, 날 때부터 초예민+극민감한 제가 이 작은 틀 속에 들어가려니 작은 것 하나하나 모든 게 삐걱거리고 어긋났던 것이지요.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들의 판단 속에서 비틀어진 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