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고 말하지 말 걸 그랬어/ 넌 듣지 않잖아
나는 못났어 바닥난 자존심 때문에/ 어렵게 뱉었던
그녀는 어디로든 떠날 수 있었고/ 난 땅에 잡혀서
모든 걸 다 주고도 더 줄 게 있어서/ 그걸로 기뻤어
언젠가 모든 걸 다 잃게 되더라도/ 넌 슬퍼하지 마
내가 느꼈던 아름다운 마음조차/ 넌 가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언젠가라도 나를 알아줄까/ 그렇게 되면 한 번이라도 나를 안아줄까
난 너야/ 난 너야 / 난 너야
F.U.Y. /데이먼스 이어
위는 내가 정말 사랑하는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래는 가사를 곱씹으며 화자의 마음을 생각해 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는데, 난 왠지 이 화자의 마음이 참으로 몇 년 전의 나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나도 한 사람 앞에 일종의 처절함과 비슷한 마음을 떨어뜨려 놨었고, 과연 그가 그때의 내 마음을 이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지수다. 사실,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짐작한다.
부끄럽지만 "난 너야."라는 말을 수단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백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차오르는 마음을 배출은 해야겠고, 뭔가 사랑한단 말보단 더 거창하고 장대하면서도, 문학적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뱉은 말이 "난 너야."였다. 그때 생각했을 땐 그 말이 꽤나 맘에 들었었나 보다. 그냥 한마디 한 걸로도 모자라서 그에게 편지로도 저 고백을 했으니. 이해 못 하는 사람한테 나는 너라는 말만 주절주절하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 생각해도 정말이지, 좀 창피하다.
난 너야, 그 말의 함의는 이랬다.
'난 너를 만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너를 만날 거야. 우리가 많이 다투고 등도 돌리고 그러면서도 다시 서로를 찾았잖아? 그러면서 난 생각했어. 난 아무리 생각해도 너야.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난 너야. 너를 향하지 않는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대충 말해서 내 '방향'은 너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백 번을 고쳐 생각해도 '너'였던 그와 난 이별을 했다. 당연했다. 그땐 어렸고, 서툴렀고, 애석하게도 그를 향하던 내 방향은 매우 가변적이었다. 그러나 이별을 한 후에도 난 종종 저 때의 고백과 그때 당시의 감정이 생각났다. 그때의 난 진심보다는 치기였고, 사랑보다는 욕망이었던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난 "난 너야"라는 고백의 정의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어느 책에서 읽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과정이라고. 뇌과학적으로도 분석된 부분인데, 사람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자신 스스로의 개념을 확장하고 발전시켜나간다. 그 사랑의 대상이 물건일 수도 있고 어떠한 경험일 수도 있으며 사람일 수도 있다. 그 대상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고 더 나아가 그 대상을 스스로와 동일시하면서 나 스스로의 개념을 개척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누군가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비난을 받으면 마치 내가 공격받은 듯하여 분노하거나 비통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난 너야'라는 고백은 사랑에 있어 본질적이고 과학적인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저 말을 뱉었던 그때 당시는 안타깝게도 고차원적인 이유보단 내가 이만큼 너를 사랑한다는 걸 전시하듯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마음이 잘 못 됐다는 건 아니지만 미숙하고 유치한 감정이 앞서 있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내 마음을 계속 늘어놓듯 꺼내놓기만 했었다. 그 꺼내놓은 마음을 그에게 이해시킬 자신도, 이해시킬 방법도 나는 찾지 못한 채 그저 늘어두고 계속 가져가라고 성화만 했었다. 난 그게 사랑을 표현하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내 마음을 삼키지 못하는 그를 계속 닦달하고 삼키지 못하면 실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와 나를 동일시하지 않았다. 그를 명확히 객체와 대상으로 판단했다. 내 마음을 밀어 넣어야 하는 대상으로써 말이다. 그래도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난 그때보다 더 성숙해진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