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부터 꼬여버린걸까
새로운 아카데미로 옮긴 후엔 낯선 분위기 속에 여러 변화에 적응하느라 바짝 군기가 들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점프투어 1차 시드전을 얼마 앞두지 않은 상태였지만 새로운 프로님에게 레슨을 받으면서 내 스윙은 기본적인 부분들부터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지만 낯선 사람들뿐인 이곳에서 내 사정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당장 내 샷을 본다면 나를 얼마나 못 치는 사람으로 볼지 신경이 많이 쓰였다.
오후에 있었던 9홀 라운딩에도 일부러 빠지곤 했다.
허리가 아프다거나 숏게임 연습을 더 해야 될 것 같아서라거나 그런 핑계까지 대가면서 말이다.
비유를 하자면 같이 점심 먹을 친구가 없을 것 같아, 그냥 배가 안 고파서, 속이 안 좋아서 괜히 밥을 안 먹겠다고 하는 심리와 비슷하달까.
지금 생각하면 이런 생각들조차 부끄럽지만 당시엔 누군가에게 내 샷을 보여주는 게 더 부끄러웠다.
공을 치려다가도 누가 지나가면 연습 스윙하는 척 멈추고, 잘 치는 사람들이 근처에 모여 이야기라도 나누고 있으면 신경이 그쪽으로 곤두서 연습을 할 수도 없었다. 지나가고 나서야 공을 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연습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에 숙소로 데리러 오는 아카데미 셔틀을 타지 않고 매일 사람들보다 일찍 걸어 나와 연습장으로 갔다. 새벽엔 연습장에 사람들이 없으니까 눈치 보지 않고 편하게 연습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남들이 오기 전에 샷 연습을 실컷 하고, 다른 사람들이 오고 나면 빽을 들고 숏게임장으로 가 하루 종일 어프러치와 퍼터만 했다.
그러던 중 1차 점프투어 시드전에 참가했고, 큰 기대 없이 나갔던 시합에서 본선 이틀 토탈 투오버로 예상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다. 어프러치와 퍼터를 죽기 살기로 한 보람이 있었던 걸까?
새로운 아카데미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던지라 나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던 아카데미 내에서도 내 결과를 조금 의외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연습장도 따로 나가, 뻑하면 라운딩도 안 나가고 연습장에 있겠다고 해, 하루 종일 숏게임장에 있어.
게다가 샷 연습은 얼마 하지도 않아 볼 수도 없으니 파악이 안 될 만도 하다.
같은 아카데미에서도 프로님들에 따라 팀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시드권을 따낸 뒤 당시 여자프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던 우리 팀 내에서 '어쭈?' 하는 그다지 곱지 않은 눈초리와 비아냥 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그땐 그게 대수롭지 않았다.
그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자질이 없는 게 아니었나? 연습환경의 문제였나?'
내가 나를 잘못 판단했었던 걸까라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각은 한 달도 채 가지 못했다.
시드전을 통해 얻은 네 번의 시합결과는 모두 예선 한 번 통과하지 못하고 끝이 났기 때문이다.
매서운 눈초리들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있었던 2차 준회원 선발전 역시 본선 첫날 꽤 괜찮은 스코어를 기록했으나 그 뒤로 이틀 모두 70대조차 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이제 내게 남은 기회는 2차, 3차 두 번의 시드전뿐이었다.
그렇게 또 다음 한 달 뒤 열린 2차 점프투어 시드전.
여기서 떨어지면 이제 진짜 벼랑 끝에 몰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절대 그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에 정말 절실히 마지막까지 가고 싶진 않았다.
그 절실함 때문이었을까?
2011년 그 해 열린 시합들 중 처음이었다.
'예선 탈락'
시드권을 따내기는커녕 시드전 본선조차 들어가지 못했다.
이제 난 두 달 동안 참가할 수 있는 시합이 없고 기회는 단 한차례밖에 남지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슬기야, 요즘은 어때?"
"그냥... 그냥....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엄마랑 아빠는 네가 너무 힘들어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슬기 네가 많이 힘들어하니까 아빠가 인터넷이고, 신문이고 이것저것 많이 찾아보셨나 봐.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만한 게 있는지.
그러다가 스포츠선수들이 많이 도움을 받는다는 박사님 한 분을 찾게 돼서 엄마가 연락을 하고 그 분하고 슬기 얘기를 나눴거든? 그래서 슬기도 직접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겠는데. 어때?"
성적이 잘 안 나오면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걸 피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님 또한 그런 나를 알고 계시기에 혹시 부담이 될까 봐 먼저 전화하는 것도 늘 조심스러워하셨다.
그래도 매시합이 끝나면 전화는 드리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서 "저 끝났어요."라는 말을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데,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말을 하면서도 눈물 때문에 계속 목이 메고 코가 막혀서 숨기기 위해 꽤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다 알고 계셨나 보다.
내게 왜 그러는지 직접적으로 묻지도 못하고 뒤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셨을 생각을 하니 또 불효를 하는 것 같아서 풀이 죽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면.. 엄마 아빠도 덜 힘드실 텐데..'
그렇지만 나아지고 싶었다. 도움을 받아서 나아질 수 있다면 차라리 지금 뭐라도 해서 얼른 나아지고 싶었다.
뭔가 상황을 바꿀 수만 있다면..
"혼자 가는 게 조금 걱정되면 서울에 계신 작은 고모께 동행만 좀 해달라고 말씀드려 놨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가서 그냥 네 얘기를 좀 해보면 어떨까? 그런 분은 여러 케이스를 많이 겪어봐서 슬기가 힘들어하는 부분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엄마의 목소리엔 언제나와 같이 따뜻함과 배려심, 그리고 안정감이 있었다.
지금 내 상황이 이렇게 지속되는 것보다 더 최악은 어차피 없을 거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결국 부모님을 더 힘들게 하는 상황이 될 거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싶었다.
'그곳에선 나를 알 수 있을지도 몰라. 알고나면 바뀔 수 있을지도 몰라.'
"응, 알겠어요. 가볼게요. 감사해요 그리고 죄송해요."
평상시 엉망인 생활습관으로 살다가, 여기저기 아픈 구석이 많은 상태로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의 마음처럼 호기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