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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하얀 밤이 문을 두드릴 때

by 스미다

인생은 심장 그래프나 태동 검사기 같은 주기를 동반한다. 가파르게 쭉 치솟았다가 한동안 잔잔한 물결을 그리고 또 어느 지점에서 날카로움이 위를 뚫고 올라간다.

내 경우에는 보통 돈 공부에 대한 위기감, 육아에 대한 근원적인 생각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서로 다른 주기로 끊임없이 나타난다. 도통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일 때는 위 세 가지가 한 번에 몰아친 경우다. 잠을 자려고 누웠지만 눈은 어느새 밤의 침묵에 적응한다. 눈에 익은 서랍장을 보며 잡히지 않는 생각은 떠다니고 눈동자만 끔벅인다. 머리맡에 둔 핸드폰을 켜 의미 없는 기사를 클릭하다가 유튜브를 재생하지만, 머리에 들어올 리 없다. 세상은 이리 빨리 돌아가는데 왜 난 몇 년 전 생각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을까. 주기가 조금 더 빨라졌다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다.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던 생각은 다시 마음이 가라앉으면 이내 현실의 모서리에 콕 박혀 눈에 띄지 않았다.


6~7년 전 끄적였던 대로 움직였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달라졌을까. 몸의 외형은 근육으로 더 단단해졌고, 피부는 맑아졌으며 통장 잔액엔 몇 개의 0이 늘어났을까. 현실은 시무룩하다. 어쩌면 피부는 더 처졌고, 뽑다 지친 흰머리는 굳이 들추지 않아도 쉽게 눈에 띄며 근육 대신 근육주사를 더 쉽게 처방받는 나이가 되었다. 겉모습이 바뀌는 동안 생각은 훨씬 더 쉽게 동력을 잃어갔다. 자꾸 안주할 핑계를 대며 내가 하지 못할 이유를 열거하기에 바빴다. 이는 사실 핑계라기보단 현실에 가깝지만서도 위축되고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지난 다이어리들을 한 장 한 장 공들여 넘기다 보면 추억과 함께 하나도 해결된 게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아이들 스케쥴을 적다가 장 봐야 할 식재료를 적고, 모서리에 방과후 신청 기간이라던가 관리비 평균을 끄적인 자국이 공존한다. 뒷장은 학습 관리 강의 내용이 빼곡히 적혀있고, 옆 장은 문득문득 들었던 짧은 생각들이 달아날라, 한두 줄로 휘갈겨있다. 그곳엔 수많은 줄임표와 물음표가 가득했다. 확신이 없었다. 흩날리는 생각들과 나 자신에게 묻는 물음표들. 볼펜의 밑줄이 그어지고 동그라미는 같은 기울기로 몇 번씩 채워 있었다.


이 생각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문득 발등에 떨어진 현실이 비상등 없이 훅, 끼어들 때면 끄적이던 생각들 대신 핸드폰 앱을 켰다. 주문 목록에서 항상 담던 목록들을 검색하며 두루마리 휴지와 세제, 다 떨어진 칫솔을 담았다. 온라인 서점에 들어가 중고 책을 검색하고 걔 중 고르고 골라 두세 권을 구매했다. 읽던 경제 신문과 책은 식탁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남은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다가 빨래를 개다가 숨을 돌리려는 차에 하교하는 아이를 맞이하러 나가야 했다. 오늘도 생산적인 생각들은 잡힐 듯 잡힐 듯하다가 현실 앞에 깊게 가라앉아 뿌연 부유물을 만들어 낼 뿐이다. 이 생각들은 바닥 깊이 쿵 내려앉아 침전하다가 어느 밤, 검은 시야에 눈이 차차 익숙해질 때면 또 조용히 떠올라 긴 밤을 지새우게 만들겠지. '나를 또 잊은 거니?'하며 전보다 긴 불안 이불을 끌고 와 새하얀 밤을 직면하게 만들 테다.


몇 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때의 내가 변했더라면. 현실을 쓱쓱 물리고 생각을 붙잡고 끄집어내고 집요하게 탐색해서 실행했다면 하면서 과거의 나를 탓하려나. 미래의 내가 답답할 수 있겠지만, 현실의 속도를 살다 보면 생각은 지나치게 앞서 있거나 여전히 뒤에서 쫓아오지 못해 헐떡일 때가 많았다. 정신과 신체가 같은 속도로 동행하면 좋으련만 간극이 벌어져 내 안에 분열이 일어났다.

현실에 마음 쓰다 보면 머릿속 생각들은 옅어졌다. 발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갈수록 안주하지만, 평온한 삶이 이어졌다. 이 안에서 감사함을 찾고 지금의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쓰임을 더 열성적으로 해나갔다. 그러다 밤이 찾아오면, 쓰러져 잠들 정도로 몸이 노곤하지 않을 때면 문득, 나의 쓰임이 고리타분하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현실을 벗어나고 변화하고 이상적인 발돋움을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생각에 힘이 실렸고, 이는 현실 불만족을 끌고 와 내 발목을 붙잡는 원인에 신경질을 보탰다. 정신과 신체의 균형을 맞추는 게 이렇게 힘들었던가. 지난 시절, 인생을 많이 고민했다고 여겼지만 지금 드는 생각들에 비하면 그건 몹시 단조로웠다. 나만 생각하면 되는 이기적이고 단순한 것들이었다.

조금 더 복잡한 관계 속에서 문득 지나온 세월과 함께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다 보니 선명한 밤이 늘어났다. 쉽사리 잠이 오지 않는 날 속에서 하얀 밤을 맞이하는 날이 많아졌다. 이 밤이 지나면 또 어디론가 사라져 흩어지겠지만, 내게 온 손님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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