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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날

by 스미다

어떤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날이 있다. 모래알 섞인 바람이 불현듯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는 것처럼, 갑자기 짜증이 솟구칠 때가 있다.


유난히 작은 둘째는 한 살 터울에는 옷을 물려 줄 수 없다. 두 살 터울, 그중에서도 자그마하다고 하는 편인 아이에게 계절에 딱 맞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물려주고 있다. 내 눈에는 그래도 한 철 잘 입을 듯 한것만 고르고 골라 보냈던 아이였다. 평소 오가는 길목에서 우연히 그 아이 엄마를 만났다. 잠시 서서 안부를 묻는 도중 그 집 아이가 눈에 띄게 크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다. 공교롭게도 며칠 전 지나치다 봤을 때, 두 살 많은 내 아이와 비등하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작아서 성장 검사를 해봐야겠다고 들었던 터라 나도 모르게 내심 '내 아이만 작은 게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위로까지 삼았었는데. 그랬던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제법 길어진 모습에 내 마지막 안심은 보기 좋게 무너지고 말았다.


학원 가기 전, 배고프다는 말에 빵집에 들려 팔에 담을 만큼의 요깃거리를 샀다. 한쪽에 앉아 뱃가죽을 채우려는데 점원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드시고 가실 건가요? 가지고 계신 일회용 용기는 매장 안에서 섭취 불가입니다." 손에 들려있던 테이크아웃 커피잔이다. 아이를 기다리며 잠시 카페에서 먹고 남은 것을 버리기 아까워, 양어깨에 맨 가방의 무게에도 굳이 손에 들고 나왔던 종이컵이다. 빵을 이만치나 샀음에도 한 모금도 마실 수 없는 상황에 섭섭함이 자리 잡았다. 아무리 실내에서 금지한다지만, 외부 커피잔에 더 매몰찬 목소리를 들은 듯해 기분이 모난 모양으로 변했다.


유치가 연달아 빠지고 있던 큰 아이의 하얀 터틀넥이 빨간 침투성이다. 급식을 먹다가 입안에서 피 맛이 나자 처음 입은 새하얀 옷으로 입을 닦았단다. 새빨간 잉크 한 방울이 아직 고르게 섞이지 않은 어정쩡한 핏물을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학교 검진이 아닌 이상 들리지 않는 집 앞 치과에 들렀다. 아이 학원을 오가며 대체 이 치과는 운영이 되긴 할까, 텅텅 빈 자리를 보며 모르는 사람의 지갑 걱정을 하던 곳이었다.

소파에 자리한 사람을 보며 '그래도 오늘은 손님이 있나 보네.'하며 다행이다 싶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한 치과를 메우는 시계 분침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우리 순서는 불리지 않았다. 평소 거리가 먼 다른 곳에서 정기검진하던 터라 엑스레이나 다른 검진은 필요 없고 그저 어제 빠진 유치가 뿌리까지 잘 뽑혔는지, 치과 의자에 누워 30여 초의 시간만 할애하면 되었는데. 마음이 시곗바늘보다 더 분주해졌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보이지 않는 치과 베드에는 사람들이 누워있었고, 생각보다 지체되는 시간에 '왜 또 하필이면 오늘이어서'라는 한숨이 덧붙었다. 아이 둘이 실없는 장난을 치며 앞에서 정신없이 구는 모습에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있어라, 조심해라, 앞을 봐라, 떨어져라. 쉬지 않고 내뱉고 있었지만, 그들 귀에 들어가는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만 집에 가는 게 낫겠다 싶어 엉덩이를 떼고 "선생님"하고 내뱉자 그제야 기다렸던 대답이 들렸고 다시 엉거주춤 짐보따리를 챙겨 진료실을 뒤따라갔다.


"기존에 다니는 치과가 계시는데, 왜 오셨어요?"

"정기 휴무일인가요?"


치과 선생님의 악의 없는 질문은 "돈도 안 되는 진료를 보러 오셨군요."라는 말로 변질돼서 들렸다.

실내에서 일회용 컵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지인 딸 키가 많이 자랐다는 것도 모두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느꼈을 얘기다. 어쩌면 더 기쁜 마음을 담아, 더 예의를 갖춰서 했을 말들이다. 그런데 오늘은 내게만 더 혹독한 날이었다. 슬라임 같은 끈적임이 어깨를 타고 스르륵 들러붙어 찝찝함을 만들어내는 그런 날이었다. 그런 날 임을 분명 알았건만, 나는 뭐가 아쉬웠는지 스스로 정점을 찍을 에피소드를 하나 추가하고 말았다.


지금 기분이 이렇다면 굳이 애써 화면을 열고 아이디를 입력하는 번거로움을 실행하지 말걸.

혹시 모른다는 작지만 간절한 기대감 때문에 지원했던 공모전 결과를 굳이 오늘 확인하고 말았다. 스크롤을 끝까지 내려도 보이지 않는 이름에 '글은 또 왜 써서. 글쓰기는 왜 해서' 굳이 실패담을 늘리고만 있을까, 좌절감만 들었다. 애썼던 만큼 시무룩해졌다. 퇴고했던 수만큼 무기력함이 배가 되었다. 하지 않았으면 성공도 실패도 없었을 일에 실패만 켜켜이 쌓이는 무력감이 마흔에는 쿨하게 던져버릴 수 없는 감정이 되었다. 젊음이 있길 하나, 뛰어난 실력이 있길 하나. 굳이 글은 왜 쓴다고 해서 애꿎은 가족들이 그 피해를 감당해야 하나. 평소보다 조금 더 늦게 손을 씻는 아이에게, 밥 시간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간식 통을 뒤지는 아이에게, 겉옷 정리를 하지 않는 아이에게 한 번 더 참지 못하고 내 불안의 짜증을 던지고 말았다.


문자화 되어있을 땐 다 주억거리는 말들이 입에서는 당최 나오지 않았다. 입속으로 작게 중얼거리던 문장들은 그 소리가 너무 작아 소실되었는지, 현실에선 쓰이지 못했다. 글로만 아는 것들. 머리로만 아는 것들이 마음에서는 무용지물 되어 어느 것 하나 집중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냈다. 그저 그런 날이라고 치부하기에도 시답잖은 일들일 뿐인데 왜 감정은 그렇지 못할까. 왜 또 이러고 있는지, 개운치 못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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