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질문이 끈적일때마다 다시 내 존재를 생각한다.
나란 사람, 나의 근원, 나의 부모.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지는 질문에 위 아래 어금니가 맞물리고 마음이 묘하게 일렁거려서, 설거지라든가 빨래같은 잡다한 일들을 하지 않으면 가슴의 쿵쾅거림을 가라 앉힐 수 없었다. 이 마음에 대해 말하자면, 고소공포증이 있는 내가 무서운 놀이기구 줄에 포박돼 종종걸음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랄까.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짓는 스릴넘치는 어트랙션에 대한 기대 속에서, 꽉 막힌 길을 되돌아 나올수 없는 나는 롤러코스터의 기세와 위용에 눌려 청바지에 손바닥을 비비는 것 말곤 허락된 게 없었다.
지금에 만족할 수 없는 상황. 작업을 하면서도 대가가 따르지 않는것에 대해 나름의 자기합리화를 하다가도 옆사람의 속도가 날아드는 날이면 발끝부터 저려오는 느낌에 과연 내가 작업을 작업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이 과정을 모든 창작자들이 안고 살아가는 것인지, 내가 얼마나 도태되어 있던 건지, 자꾸만 나란 사람을 휘둘겨 패는 느낌에 몸살이 난 듯하다. 몸살이란 것이 몸 겉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라. 마음의 몸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심장을 꺼내 보여주는 것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미칠때가 많았다. 물론 이는 나의 한계일테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올바른 '단어'를 선으로 잇는 사람일텐데 나는 그 단어의 형태 뿐만 아니라 뜻, 맞춤법까지 모든것을 잃은 느낌에 자꾸 '것' '듯한' '느낌' 같은 꾸밈을 곁들여야만 다음 줄을 쓸 수 있었다.
'한계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다음 줄을 쓸 수 있는 사람.' 작가의 정의를 이렇게 내려야할까. 잡다한 생각을 마구잡이로 풀어내면 내 응어리는 풀릴지라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은 무슨 죄일까. 한낮 뭉그러지는 마음을 해체하기 위한 속풀이용 글쓰기가 과연 나 말고(때론 나조차) 누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소연에 가까운, 분풀이에 가까운, 내 변명에 가까운 이 글 말이다.
감정이 진득거릴 때마다 노트북을 열 수밖에 없는 마음은 오죽할까. 가까운 그 누구에게도 내 진실된 마음을 그대로 꺼내 놓을 수 없는 나는, 자꾸만 빈 여백을 열어 글자의 형태로 남겨 놓는다. 이또한 어느 글의 실마리가 될지 모르므로 순간의 감정이 일기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남길 수밖에 없다. 처참하다.
내가 글을 쓸 때, 나는 반쪽짜리 작가라고 명명했던게 이런 화를 불러왔을까(사실 작가라고 말하는 것도 맞지 않고). 언제든 발 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아니 한 발만 쩍 벌러 간신히 들여놓고 나머지 한 발은 안전지대에 여전히 뿌리 박아서 나아가지도 돌아가지 못한 상태도 다리만 찢어지고 있는 것일까. 앞서 간 발에 힘을 주고 박혀있던 발을 빼야 앞으로 나아갈 터인데, 왜 난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까.
작업 시간을 조금씩 더해갈수록 나의 뿌리에 가졌던 의문에 얼핏 다가가는 모습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지만, 이는 마음의 갈등을 더 굴곡지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남편과 내가 만든 우리 가족의 단란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면, 근원전인 질문이 들지 않았다면, 모든일에 대해 기꺼이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면 하면서 자꾸만 틀어지고 변형하려는 내 모습을 때론 나무라고 싶었다. 혹자가 말했던 "살만해서 그래"라는 말처럼 살아지는 것에 그런대로 수긍했다면 괜찮았을까. 아이가 커가는 것에 감사하고 남편이 가장의 역할을 충실히 행함에 고마워하며(내가 그의 금전적인 우산에 끼어들수도 있고) 기꺼이 '가정에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는 정체성'에 만족했다면 지금과 같은 모호한 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떠한 성과도 없는 글쓰기를 왜 이어가야 하는지, 언제까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글이란 것이 그동안은 해소의 욕구, 작은 연대의 느낌을 가졌다면 이제는 자꾸 나의 세계를 깊게 바라보려고 숨겨있던 질문들을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꺼내고 있다. 것은 때때로 모양이 달랐는데, 길쭉하기도 작기도 퉁퉁하기도 벗겨있기도 했다. 작은 감자알 같은 물음은 반 나절 안에 해소되기도 했고, 김장 무같이 큼직한것이 올라올때는 묵직함에 온전히 정신이 나자빠 지기도 했다. 허나 나는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직책을 갖고 있는 사람인지라 허용된 시간은 질문을 싹둑 베어버리는 낫과 같은 일을 매몰차게 하기도 했다. 더이상 현실로 가져올 수 없는 물음은 흙바닥에 나뒹굴다가 고랑에서 썩어갔다.
낫자루에 끊기지 않고 살아남은 질문은 더 큰 골칫거리였다. 온종이 흙을 묻힌 손톱으로 밥을 하고 해도 티도 안나는 살림을 하다가 문득문득 서글프게 손톱 끝을 바라봤다. 왜 자꾸 따라와서, 왜 자꾸 묻어 나서 힘들어질까. 그럴때면 손톱깎기로 때 낀 손톱을 바짝 잘랐다. 사방에 튄 손톱을 그러모아 쓰레기통에 보냈다. 나의 정체성은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