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킬링타임. 다들 있으시죠?
시간을 죽이며 때론 흘려보내는 방법, 뭔가 재밌는 것에 홀딱 빠져 몰입하고 싶고 주변 것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무엇을 선택하시나요? 제 경우엔 소설을 집어 듭니다. 것도 두꺼운 벽돌 책의 로맨스 판타지 소설이요. 도서관 800번 대의 먼지 가득 쌓인 묵직한 녀석. 누렇게 바랜 몇백 장의 페이지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녀석. 몇 년 전에도 읽었고, 일 년 전에도 읽었던 녀석을 다시 한번 꺼내며 주위를 괜히 힐끔거립니다. 금서를 탐하는 것도 아니며 먹은 나이로 치면 금서 속 어떤 행위를 해도 별문제가 없건만, 왜 전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출이요......"라며 속삭일까요. 불법 비디오 대여도 아닌데 말이죠.
여러분도 이런 책이 있으실까요. 마음속에 봉숭아 물이 사르르 퍼지며 몽글해지는 책. 설렘과 긴장, 아련함으로 아랫배가 살살 저리는 그런 책이요. 제겐 축축하고 스산한 어느 마을에서 펼쳐지는 뱀파이어와 사랑이기도, 수십 개의 그림자를 가진 남자일 때도, 때론 거대한 서사가 몰아치는 문학 소설이기도 합니다. 시리즈로 구성된 이 녀석들을 가슴 한가득 빌려와 소파 위 툭 올려놓으면 엄마 몰래 검은 봉지 한 가득 불량 식품을 담아온 그때로 돌아갑니다. '너를 또 찾아왔어.' 하는 악수를 하고 야금 야금 읽어 내려가는 이 맛. 해야 할 일들을 손끝으로 밀어낼 수 있는 만큼 저만치 치워두고 엎드려 쿠션 하나 끼고 읽다 보면 그곳의 냄새, 바람, 온도에 휩쓸려 몽롱한 상태가 될 때가 있어요. 몇 시간이 지나면 '온전치 못한 독서'를 했다며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요. 밤새 넷플릭스 정주행한 것도 아닌데 '아....시간을 허비했네.'하는 불편한 감정은 언제나 곁다리로 따라온 부록입니다.
사실 이런 감정을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할 때가 많습니다. "책을 읽는 데 불편한 마음이 든다니?" 하며 저를 의아하게 쳐다보는 친구들도 있고요. 그러나 적어도,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당신은 제 마음에 주억거려주실 거로 생각합니다. "맞아, 맞아" 하면서 당신의 경험을 끌어오실 수도 있겠죠. 잠시 '내게 그런 책은 무엇이었나' 낮게 깔린 흐린 구름을 바라보다 도서관에서 슬며시 빌려오실 수도 있고요. 살짝 미소 지은 채, 흠흠, 목을 가다듬고 "대출이요...."하며 양손에 나만의 불량 식품을 한가득 담아 오는 날이면 그 뿌듯함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실 거예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이와 비슷한 것 같아요. 내 선택에 따라 결과물의 '질'이 달라지잖아요. 우린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되길 바라며 모든 일들을 감당하고 있진 않은가요. 조금이라도 나은 결정이었기를 바라며 좀 더 옳은 방향으로 가려고 애를 쓰고 있잖아요. 그게 목표를 위해 한발 다가가게 만들기도,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이 선택들이 모여 나라는 사람이 되겠구나.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구나. 난 독서의 범주에 킬링 타임이 속하는 사람이구나. 목적을 위한 독서도 있고, 위로를 받고 싶은 독서도 있지만 단순히 재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독서도 하며 그게 나에겐 킬링타임 용이라는 의미를 주는구나 하며 저를 알아갑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것들의 압박에 지쳐 무릎 꿇고 싶을 때 또 다른 내가 되어 다른 공간을 여행하는 것은 제게 큰 위로가 된다는 경험을 한 후로 저를 위로하는 방식도 찾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조금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불량 식품을 소리 내서 먹으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몰랑'하는 마음으로 천연덕스럽게 푹 빠져 읽고 나오려고 하는 중입니다. 그럼 개운하게 현실을 직면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아갑니다. 뿌옇던 선택지가 조금 더 선명해지고 객관화된 시각으로 나에게 다가오리라는 것도 알았으니 이제, 배 깔고 나만의 은밀한 취미를 즐기겠습니다.
당신의 검은 비닐봉지에는 어떤 불량 식품이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