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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Dec 09. 2023

서랍 속 팀장님을 마주하다.

그녀를 마주하며 곱씹기.

"야, 너 머리에서 귀신 나오겠다. 머리 좀 잘라."

이렇게 또 내 자존감이 상장되지 못한 주식처럼 바닥에 흩날린다. 결혼식을 앞두고 머리를 기르고 있는 나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노처녀 팀장의 한마디는 내 하루의 상한가와 하한가를 결정짓고 있었다.


"푸드스타일리스트는 가꿔야지, 옷 좀 차려입고. 좀 꾸며."

남들이 봤을 때 그 직업에 대한 환상이 있듯이 나 역시 디즈니 영화 상영 직전 BGM처럼 환상에 젖어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내가 스타일리스트인지, 이삿짐센터 직원인지 모를 만큼 매일의 짐 싸기와 짐 풀기의 향연이었다. 혹시 모르니깐 이것도 챙겨야지, 혹시 모르니깐 저것도 챙겨야지(이거 안 챙겼니? 소리 들으면 안 되니깐) '혹시'라는 단어가 안 붙으면 진행이 안 될 정도였다. 이것도 연차가 쌓여가자, 그릇과 소품을 완충제로 쏙쏙 넣어가며 컴팩트하게 더 많은 짐을 넣는 능력이 레벨 업 되었다. 모든 직업이 그렇겠지만 한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위한 그 밑면에는 잠 못 자는 찌그러진 노동의 시간이 반복되었다. 창고에서, 마트에서, 소품 가게에서 짐을 보부상처럼 옮기다 보면 구두가 웬 말, 어느 정도 사용감 있는 운동화에(실내와 실외를 번질나게 드나들어야 하므로 발이 익숙한) 맨투맨 티, 후드티, 목 파짐 없는 기본 라운드티가 유니폼이 되었다.


"넌 어린애가 SNS도 안 해?"

"SNS을 '잘' 이용할 줄 모르겠어요, 하다 보면 결국 남과 비교하는 삶을 살 것 같아요."

"야, 넌 무슨 아줌마 같은 소리를 해, 애 낳은 내 친구도 그렇게는 말 안 한다."

그 말을 듣고 또 한 번 나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온몸이 꽉 쪼이다가 폭삭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성격상 나를 치장하고 드러내고 적당히 과시하는 삶을 너무 불편하게 여겼다. 그런 성격은 SNS라는 플랫폼과 맞지 않았고, 온라인에만 있는 허상의 것을 운영한다는 자체가 본질적인 삶을 등한시한다고 여겼다. 이 얼마나 고리타분한 생각인지. 그 당시에는 일련의 좀 '있어 보이는 직업'은 죄다 강남에 있었고, 그 직업군의 사람들은 없어도 더 '있어 보이는' 말재주를 덤으로 장착하고 있었다. 그래야 그 사람을 믿고 하나라도 더 제안할 수 있는 법이니깐. 하지만 나에게 그들의 있어 보이는 재주는 새로 씌운 크라운처럼 계속 신경 쓰이는 이물감에 가까웠다. 알지만 혀를 자꾸 데 보며 그 이질감을 자꾸 신경 쓰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내겐 불편한 단어들이 몇몇 있다. 그중 몇 개를 나열하자면 '늘씬한, 킬 힐, 명품, 강남, 신상, 빠른, 높은, 화려한, 형광, 도전, 성공, 광택' 등의 것들이다. 반면 마음이 좀 편안한 단어들은 '낮은, 평온한, 하늘거림, 천천히, 수평, 면, 초록, 나무, 마당, 책상, 노트' 등이 있다. 단어들로 나를 표현해 보면 내 안의 정체성을 더 뚜렷하게 알 수 있고 때론 확고함이 아집을 동반하는 경우도 있었다.

    글쓰기 이전엔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며 더 이상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의 삶도 나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성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잖아?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건가, 꼭 뭔가를 이뤄야만 그 삶이 '성공한 삶'이라는 표창을 받는 건가, 심히 불편했다. 그랬던 내가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고 플랫폼에 글을 쓰는 삶을 살고 있다. 글을 쓰다 보니 나를 드러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고, 솔직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글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렇게 경계했던 플랫폼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나를 오픈하는 글을 쓰고 있다니, 나도 궁금하다. 왜 나는 이 일을 지속하는 걸까.


© unsplash

    글을 쓰면서 생각이 정리된다.

    너무 흔한 얘기지만 글을 쓰다 보면 정제되지 않은 불편한 감정들이 이성적으로 명확해졌다. 삶을 살아가며 특히, 육아를 하면서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을 불쑥불쑥 느꼈는데, 이를 말로 전하자니 어떤 단어와 어떤 어조로 나의 답답함을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결국 삼키는 일이 잦았다. 또한 뭐 나만 유세떠냐 싶어 다른 이의 힘듦 앞에 내 소소하게 고단한 하루를 감히 얘기하지 못했다. 그들의 광대한 삶의 변주에 비하면 나는 유치원 연말 음악회의 실로폰 연주쯤 되는 삶을 살고 있었으니.

© unsplash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소소하게 고단한 그 이유를 직면하게 됐다. 솔직한 글을 쓰려면 누가 볼까 낯 뜨거워 깊은 서랍에 억지로 꾹꾹 눌러 닫았던 마음을 조심스레 열어봐야 했다. 서랍 속의 정돈되지 못한 욱여 있는 옷가지를 다 꺼내고 서랍의 먼지를 쓱 훑어줘야 했다. 그러고 나선 쌓인 옷들을 하나 하나 펴서 그 옷과의 추억을 마주하고 상기하고 다시 넣을 것인지 흘려버려야 할 지 선택해야 했다. 청소년기 나와 함께 한 교복, 과거 연애사를 추억하게 되는 속옷, 언니와 머리채 잡고 싸웠던 스무 살 언저리의 옷, 먼지와 함께 구깃구깃 구겨져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직장 생활의 유니폼. 그 모든 것들을 애정어린 손길로 다림질 해주고 '고생했어'라고 얘기해 줘야 했다. 너와 보낸 계절이 쓸모없지 않았다고, 나와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이제야 열어봐서 미안하다고. 하나하나 얘기해줘야 했다.

    아직 못 다한 옷 정리가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한 평생 마무리 짓지 못하고 다시 서랍을 닫아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젠 외면하지 않으려 한다. 서랍이 있었고, 그 안에 구겨진 옷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니 더 이상 고개 돌리지 않을 것이다. 서랍 속 나의 계절을 함께 버텨 준 옷가지, 내 마르지 않는 글감이자 글을 쓰는 원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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