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다 Nov 08. 2023

현모양처의 밤 마실, 쏘맥을 말아라!

"다 재웠어? 우린 아직 ㅜㅜ"

"아.. 엄마 마음 조급한데 오늘따라 왜 안자냐."

"난 남편 옴!! 얼른 나갈게!!"

"나 이미 밖이야! 얼른 나와 ㅋㅋ"


    육퇴를 향한 엄마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다와 땅이는 오늘따라 또렷한 눈망울로 뒹굴고 있다.

"빨리 누워, 이제 자자. 다 깜깜해졌네. 우리 잘 시간이야. 낼 신나게 놀려면 자야지. 엄마가 계속 말했지, 빨리 눈감고 자. 이제 그만 얘기해."

아이들만 잠들면 나는 자유부인이다. 금요일 밤의 치맥이라니, 쏘맥이라니. 유치원 엄마들과 오랜만의 밤마실 약속으로 심장은 바운스 바운스, 기쁨의 입꼬리는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다. '자나? 엄마도 옆에 누워있을게, 깨지 말고 푹 자렴.'이라는 마법의 주문을 걸며 높이뛰기 선수 저리 가라 몸을 가볍게 들어 올려 빠져나왔다.

"갔다 올게!"

"재밌게 놀고, 또 괜히 상처받고 오지 말고." 우리 집 세대주가 한마디 덧붙인다.

"상처는 무슨 상처, 그냥 만나서 맥주 한 잔 마시며 스트레스 푸는 거지. 나 나간다!"


    

    엘리베이터를 가뿐하게 내려 온몸으로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이 얼마만의 밤마실이던가. 조금 전 놀이터에서 영혼 없이 질질 끌려다니던 아줌마는 온데간데없고 경쾌한 말발굽 같은 걸음걸이의 자유부인만 있을 뿐이다. (애마부인이려나)

    아이들 재우고 만난 동네 아줌마들에게 장소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저 같이 모여 앉을 테이블과 바싹하게 튀긴 치킨(우리도 바싹한 상태의 치킨을 먹을 수 있습니다),매콤하게 무친 골뱅이, 그리고 영혼의 단짝이자 육아의 쏘울메이트, 쏘맥만 있으면 된다. 서로의 육퇴를 축하하며 한 잔, 놀이터 훈장으로 생긴 기미와 정수리 태닝을 위해 한 잔, 회사와 집안일로 탈탈 털린 멘털과 체력에 한 잔. 핑계 없는 무덤 없다지만 이유 없는 쏘맥도 없다. '아이로 인해 맺어진 관계'는 군대 동기 못지않은 유대감을 느끼며 서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몇 번째 잔에서 멈춰야 했을까. 몽글한 취기 속 강력한 한 방의 펀치가 날아왔고 남편의 쓸데없던 기우는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우리는 집에서 못 놀아, 우리 같은 애들은 계속 일해야 해."


띵- 잔을 내려놓을 수도, 먹을 수도 없이 멍해졌다. '잠깐, 지금 뭐라는 거야?' 얼큰하게 취해가던 내 전두엽은 순간 정신이 번쩍였고 두뇌 회전은 스탑됐다.


'지금 저 말이, 나를 보고 하는 말인가?

자기는 일하고 나는 논다는 거야?

나.. 집에서 놀고 있니...?'

 


   

    내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찰랑찰랑 넘칠 듯이 아슬하게 견디고 있는 유리컵이 홍수 난 댐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집에 있는 엄마는 놀고 있는 엄마라니, 내가 그렇게 하등 쓸모없는 사람이었던 건가. 그 말에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왜 아직 이 자리에 있는지, 당장이라도 몸뚱이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질 못했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어갔고 내 기분 따위가 어떻게 변했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는 다른 주제로 이어가며 술자리는 새벽을 향해 달려갔고, 나만 그 시간에 머물며 어정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잘 갔다 왔어? 별일 없었고?"

참 귀신같이 알아채고 묻는다. 이럴 땐 눈치 빠른 세대주가 얄밉기도 하고 속 터놓을 상대가 있어 고맙기도 하다.

"별일 있었지. 아주 많았지."

그렇게 나만의 대나무 숲에서 시끌시끌한 속마음을 내질렀다. 말하고 나니 개운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다시 되뇌니 기분이 그림자처럼 질질 끌렸다. 옆에서 같이 욕을 하며 쓸데없는 말에 기분 상하지도 말라고, 엄마가 중심을 잘 잡고 옆에 있기에 우리 아이들이 밝고 천진난만하게 잘 지낼 수 있는 것이라는 모범 답안을 내놓아도 쉬이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안다. 그 이유를.

바로,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내가 쓸모없는 사람 같다 여겨질 때가 종종 있는데, 예를 들면 기름때가 안 지워지는 프라이팬과 씨름 할 때, 욕실 줄눈 청소에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쏟아붓고 있을 때, 놀이터에서 일찍 퇴근한 커리어우먼과 마주쳤을 때, 엄마는 꿈이 뭐냐는 아이의 질문을 받았을 때가 그렇다. 이런 기분은 기나긴 하루 속 문득문득 스스로를 외롭고 비참하게 만들었다. 자아상과 현실의 괴리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이불 속에 숨어 들어 웅크리고만 싶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현실은 비슷하다. 다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훈장을 주고 싶어 브런치를 시작했다. 쓰는 시간만큼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고, 지난 나의 경험들이 참 애달프면서도 귀한 글감이 되어 주었다.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더라도 글을 통해 과거의 웅크렸던 나에게 치유의 손길을 내밀며 토닥이고 있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난 알아.



사진출처: unsplash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