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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r 01. 2024

출장 간 남편이 면세점 들리기 전, 확인해야 할 한가지

    출장을 다녀온 남편과 어색한 조우 끝에 그가 화해의 선물을 내밀었다. 이 순간만을 기대하며 '이건 예상치 못했지?'라는 덤덤한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건넨 검은색 쇼핑백에는 명품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던 나는 잠시 '이게 무슨 상황 역전이지?' 싶은 마음에 어물쩍하게 박스를 전해 받고 웃음이 났다. 최대한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안 들어가는 레깅스에 마음을 붙들고, 고개를 수그려 머리카락으로 웃음을 가렸다. '정신 차려, 지금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할 타이밍이야. 웃음이 나다니, 너 정말 이렇게 속물이니?' 심한 내적 갈등 속, 그를 등지고 선물을 들어 봤다. '음, 보이는 것에 비해 내용물은 가볍군. 이게 말로만 듣던, 출장 간 남편의 가방 선물은 역시나 아니군.' 하며 1차 실망. 그 안에 작은 욕망덩어리가 보였다. 저 정도 내용물이면 대충 지갑이나 키홀더 정도 되려나. 값비싼 상자를 열기 전, '제발' 이라는 작은 소망이 꿈틀거렸다. 안에 있는 내용물에 '제발, 지금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너는 검정이여야먄 해!'라는 주문을 걸며 숨죽여 리본 끈을 벗겼다. 역시나, 고리타분 과 고상함 그사이를 오가는 오묘한 색깔에 2차 실망이 더해져 선물을 건넨 남편의 마음이 보이지 않았다.

© unsplash

    

    이쯤에서 아내 대표로 말을 건네볼까. 귀국하기 전 홀로 면세점을 쇼핑하며 '어떤 서프라이즈 선물로 연애 시절 아내의 반응을 끌어낼까.' 기대하는 남편이라면 무조건, 스테디셀러를 사면 90퍼센트는 성공이라는 확언을 전한다. 그렇기에 면세점 판매원의 신상품이라던가, 하나밖에 없는 색깔이라던가, 이 지역에서만 살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인이라는 말은 제발, 평소의 아내 말 듣듯이 흘려듣기를 간곡히 바란다.

    '응답하라 1994' 시리즈에는 이와 비슷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비행기에서 판매하는 색색깔의 팔레트를 사 온 쓰레기와 여자들이 딱 좋아하는, 어디에도 매치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무엇보다 여심을 공략한 브랜드의 립스틱을 사 온 칠봉이. 우리가 바라는 것은 기가 막힌 한 가지 효용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내 드레스룸이 딸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모든 액서서리를 바꿀 수 있는 재력이 아닌 이상, 가장 무난한 것을 원한다 이 말이다. 세상의 진리, SIMPLE IS BEST. 이 간단한 명제가 내 남편의 머릿속에 자리 잡길 바랐으나, 표어는 두둥실 떠다니다 표류했나 보다. 유심히 아내의 옷장을 들여다본 남편이라면 내 아내의 확고한 취향이 좀 각인 될 터인데, 세탁물 하나를 넣어도 어쩜 이리 다른 공간에 쑤셔 박았는지 모를 그의 무던함이 예상치 못한 변화구를 던졌다.  



    아내들이 블랙 또는 화이트, 가장 심플한 디자인을 원하는 그 이면에는 더 이상 아가씨의 형형색색임이 내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 시절, 흔하디흔한 신용카드 하나 없이 체크카드로만 생활했던 나는 혼수를 준비하며 첫 명품 가방을 가질 기회가 생겼다. 스드메로 일컬어지는 결혼 준비 코스를 가장 저렴하게 진행했고 스튜디오 사진은 아예 찍지도 않았다. 대신 작은 사진관에서 흑백(여기서도 나의 확고한 신념)사진을 찍고, 신혼여행에서 간단한 스냅사진을 찍어주는 반 패키지여행을 선택했다. 원체 정형화된 틀을 싫어하는 성격도 한몫했을것이고, 유난히도 밝게 내리쬐는 스튜디오 조명 아래서 경련을 일으키는 사진을 찍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 역시, 나의 이 조금 모난 성격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다는 듯이 스튜디오 사진을 찍지 않아 다행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다.

    여행지에서의 자연스러운 태양 아래, 그나마 조금은 덜 정형화된 사진은 '결혼하면 내다 버리고 싶지만, 치우는 게 일'인 스튜디오 액자를 대신해 간소하게 자리 잡았고, 이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하지만 패키지에서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들린 파리의 유명 백화점 코스는 모든 신부에게 명품 가방이라는 봉인된 욕구를 흔들기에 여념 없었고, 혼수 준비로 반지와 시계만을 주고받은 남편은 흔쾌히 가방을 선물했다. 파리라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어서였는지, 신혼의 단꿈에 빠진 신부였기에 그랬는지,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색깔의 가방은 선택할 리 만무했던 핑크색에 꽂히고 말았다. 그렇게 핑크색이 예뻤다. 진한 철쭉 색 같기도 하고 꽃분홍색이라고 일컬어지는 그 색이 아른거려 검정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성의 소리를 외면하고 말았다. 그렇게 데려온 파리의 색은 지금껏 들고 나간 횟수가 한 손가락에 손꼽힌다. 현실은 더 이상 파리가 아니었다. 차림새가 수수한데, 명품 가방을 든다고 해서 그 값어치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고, 아이들과 함께한 외출에서 체인 백은 그 쓸모가 기저귀 가방을 대신할 수 없었다. 빗방울이 묻을까, 하나 있는 그 가방을 품 안에 모시기 바빴다. 어떤 날씨의 방해도, 아이의 방해도 없이 나간 약속 장소에서 조차 어린아이가 엄마 구두를 신은 듯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이 가방의 쓰임이 수명을 다했다는 것을. 순간의 기분에 도취해 한 선택은, 장롱 속 깊숙한 동굴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아까워서, 크기가 작아서, 장소에 맞지 않아서. 각종 아닌 이유를 상기하며 장롱 속 핑크 샹들리에와 아기 전용 물티슈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남편의 선물로 상기한 내 핑크색 가방은 불량식품과도 같았다. 화려한 포장지에 이끌려 몸에 안 좋을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선이 가고 손이 가는 것. 외면하지 못한 채 내 마음을 현혹하는 것. 지금 내 삶에서 핑크색 가방은 무엇일까. 글쓰기와 독서, 운동이라는 진리를 알면서도 내심 일상에 핑크색 요행을 바라고 있었다. 브런치나 메인 포털에서 내 글이 많이 읽히기를 바라며 명품 가방 금액만큼의 애독자를 상상하곤 했으니깐. 또한 며칠 안 된 운동이지만 빨리 체중계에 올라 작아진 숫자를 확인하고 싶었다. 몇 년을 입던 옷이 한순간에 커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요행이 그리 쉽게 통할리가 있나. 핑크색 풍선이 부풀수록, 더 큰 실망감이 함께 터져버렸다.

    장롱 안 전시된 명품 가방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내 어깨에 둘러메진 광목천의 에코백을 쓰다듬는다. 어쩔 수 없다. 현실은 더 이상 파리가 아니기에. 내 몸에 꼭 맞게 자리 잡은 너를 메고 장롱문을 힘차게 닫고 묵묵히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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