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이 문제다. ‘영리한’ ‘현명한’이라는 이름 그대로 영리하거나 현명한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영리함을 파괴하는’ ‘현명함을 잃어버리도록 하는’ 물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사람들을, 특히 청소년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등교 후 교실에 들어온 아이들은 무엇을 할까? 책을 보는 아이도 있지만 대부분 아이는 스마트폰을 만진다. 쉬는 시간에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책 볼 시간, 대화할 시간, 생각할 시간, 놀이할 시간을 스마트폰에 빼앗겨 버렸다. 아이들에게 스마트폰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다. 가장 친한 친구가 스마트폰인 아이도 있을 것이다.
너나없이 모두 스마트폰의 노예가 되어 있다. 스마트폰이 없는 아이는 머리 깎인 삼손 그 자체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버스에 앉아서도 모두모두 스마트폰질이다. 가을이 가고 있는지 겨울이 오고 있는지, 단풍이 아름다운지 감이 익어가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미소도 아빠의 피곤함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몰입 그 자체이다. 몰입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는데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모습은 기쁨이 아니라 걱정과 근심을 준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만화도 영화도 본다. 드라마도 보고 연예 프로그램도 보며 스포츠 중계도 본다. 문자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은 기본이다. 스마트폰이 아이들의 생활 중심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문제는 이로운 점만 생각할 뿐 해로운 점은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인간은 절제력이 약한 동물이고, 특히 청소년 시기는 더더욱 절제력이 부족한 시기라는 평범한 진리를 외면하는 데 있다. 절제력이 약한 아이들은 누군가 통제하지 않으면 종일토록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간섭과 통제와 설득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을 되새김질하여 스마트폰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스마트폰이 옆에 있는 한 만지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졸고 있다. 15년 전만 해도 조는 아이들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한 반에 대여섯 명을 제외하고 많은 아이가 졸고 있다. 아예 자는 아이도 적지 않다. 스마트폰이 주범이다. 스마트폰이 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얻음’만 보고 ‘잃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지금 계산해 보자. ‘얻음’은 얼마이고 ‘잃음’은 얼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