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받기 위해 아내와 함께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중년 여인이 쭈뼛쭈뼛하면서 미소를 보냈다. 아내의 지인이겠거니 하고 아내를 쳐다보았는데 아내도 아는 눈치가 아니었다. 다시 그 여인을 쳐다보았는데 분명히 나를 향한 미소였다. 순간, 얼굴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대학교 동아리 1년 후배.
미국과 캐나다에서 생활하다가 아들 둘 대학에 보내놓고 작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에게 영어를 지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교육 문제로 화제가 옮겨졌는데, 대뜸 우리나라 아이들이 불쌍하고 우리나라 교육이 문제가 많다는 것이었다.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것도 이상하고, 사교육비 많이 쓰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수업 시간에 자는 것도 이상하고, 인터넷 강의 많이 듣는 것도 이상하다고 했다. 영어 공부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데 외국 사람을 만나면 영어로 대화하기를 꺼리는 것 또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공부에 투자하는 시간도 돈도 엄청난데 학생들의 지적 능력은 미국이나 캐나다 학생들보다 떨어지고, 30년 전보다 떨어져서 하향 평준화된 것 같다고 하면서 이해할 수 없고 안타깝다고 하였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등 모든 면에서 미국이나 캐나다 아이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뒤떨어진다고 진단하였다.
“미국 고등학생들은 몇 시에 하교해?”
“3시 반이나 늦어도 4시…….”
“그 뒤에는 뭐 하는데?”
“놀지요. 운동을 가장 많이 하고. 음, 영화관이나 박물관에도 가고, 공원에도 가고, 도서관도 가지요. 그런데 도서관에서 우리처럼 교과서나 참고서나 문제집을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보고서 작성을 위해 자료를 찾거나 다양한 책을 읽어요.”
“……”
“그런데도 말하는 것, 생각하는 것이 우리 한국 아이들보다 훨씬 뛰어나요.”
한바탕 울고 싶었다.
“맞아. 열심히 하는데 실력은 보잘것없는 것 인정해. 얼마 전까지는 인정하지 못하였었는데 이제는 인정할 수 있고 이유도 알아냈어.”
“공부 열심히 하는데 실력은 보잘것없는 이유를 알아냈다고요?”
“그래. 우리나라 학생들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 인정하게 되었고 그 이유도 알아냈어.”
“그래요? 이유가 뭐예요? 저도 생각을 많이 해보았지만, 저는 알아낼 수 없었는데요.”
“나도 3년 전까지는 몰랐었지. 사교육 때문이야.”
“사교육 때문이라고요? 저도 사교육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을 조금 하긴 했었어요.”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하고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말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지만 미국에서 살다 온 후배는 말이 된다는, 그럴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선배님의 원인 분석이 맞을 수 있어요. 어쨌든 우리나라 교육,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해요.”
후배는 우리나라 교육 현실을 보고 많이 놀랐고 많이 안타까워했다고 하였다.
“그래도, 우리 한국 학생들, 수학 실력만큼은 아주 뛰어나다고 하던데…….”
수학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모든 학생에게 어려운 수학을 강요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는데, 후배는, 외국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던져본 말이었다.
“수학요? 한국 중·고등학생들의 수학 실력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겠어요. 그런데 저는 수학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모든 학생이 꼭 고난도 수학을 잘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수학을 잘해서 나쁜 것은 없지만, 굳이 모든 학생이 잘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요? 수학이 우리 삶에서 그렇게 중요한가요? 저는 모든 학생이 어려운 수학을 잘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수학이 필요 없다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도대체 왜 수학만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고요? 무슨 이유로, 해도 해도 어려운 수학만 공부하도록 강요하느냐고요? 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수학에만 집중하게 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수학 공부 때문에 진짜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을 공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지 안타까워요. 수학 때문에 공부 자체를 싫어하게 된 학생이 적지 않다는 사실까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원했다. 화장실에서 맛본 시원함보다 더 큰 쾌감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던가? ‘맞다’ ‘맞아’ ‘그래’ ‘정말 그렇다니까’를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사고력을 길러준다잖아, 사고력!”
“사고력은 무슨 사고력이에요? 제가 보니까 수학 잘한다는 한국 아이들의 사고력 별 볼 일 없던데요. 공식 달달 외워서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대입하여 답만 내더라고요, 기계처럼 문제만 푸는데 어떻게 사고력이 생길 수 있어요? 또, 학원에서 보니까, 선생님만 열심히 생각해서 답을 내고 아이들은 선생님 문제 푸는 것 구경만 하는 것 같던데요, 뭘…… 사고력은 생각하는 능력이잖아요? 제가 보기에 한국 아이들은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아예 생각하기를 거부하더라고요, 생각하기를 엄청나게 귀찮아해요.”
“미국 아이들은 어떻게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