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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19. 2020

'개'명하는 이유가 다 있다니까요?

'시고르자브종'에서 찾은 네이밍의 힘

우리집에는 아내 말고도 가족 한 명이 더 있다. 나이는 50대 중반 정도에 피부는 까무잡잡한 남성. 좋아하는 것은 먹고 자고 쉬는 것. 싫어하는 것은 혼자 집에 있는 것. 꽤나 다부진 몸매에 근육도 탄탄한데 무엇보다도 긴 다리와 슬림한 몸매로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끈다. 종종 나이에 걸맞지 않게 쉴 새 없이 우리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귀여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강아지 나이로는 이제 7살인, 많이 까맣고 조금 하얀 믹스견. 아내가 직접 지어준 그의 이름은 '똘멩이'다.


똘멩이는 소위 말하는 똥개다. 아내가 시골에서 우연한 기회로 입양한 친구인데 왠지 모르게 처음 보는 외모이면서도, 묘하게 어딘가에서 본 것만 같은 친숙한 느낌이 있다. 논밭을 유유히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시골 강아지의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수의사에게 대체 어떤 종이 믹스된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지만, 의사는 이렇게 답변할 뿐이었다. "진돗개는 분명히 섞였는데.. 너무 많이 믹스가 되어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집 강아지를 누군가 똥개라고 부르는 건 그닥 유쾌한 일이 아니다. 애초에 똥개라는 말의 어원이 똥을 먹는 강아지라는 뜻인데다가 더러운 무언가에 접두사로 쓰이는 '똥'이라는 단어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만약 똘멩이가 말을 할 수 있다면 똥개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뭐라고 할까? 이건 전형적인 견종차별이라고 울음소리 높여 크게 외치지 않을까?


고민 끝에 나는 우리집 강아지를 '순종 믹스견'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다양한 견종이 100% 섞인 친구이니 틀린 말도 아닐 뿐더러 똥개라는 표현보다는 훨씬 더 순화되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러 종이 섞였다'는 의미의 '믹스(Mix)' 보다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찾고 싶었다. 보더콜리, 비숑, 알라스카 멜라뮤트처럼 이름만 들어도 멋져보이는 견종명을.


그러던 어느날, 아주 고급스러운 이름 하나가 들려왔다.

"시고르자브종"


아, 발음만 들어도 프랑스 어딘가에서 태어난 강아지의 느낌이 물씬 든다. 프랑스 남부의 드넓은 목초지에서 양들과 함께 초원을 누비는 럭셔리한 강아지의 모습이, 젖소들 옆에서 귀엽게 숨을 헐떡이며 주인에게 애교를 부리는 순간이, 파리지앵이 목줄을 손에 쥐고 에펠탑 밑에서 산책을 하는 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아마도 이런 느낌...? ⓒ unsplash


사실 시고르자브종은 시골잡종이라는 기존 표현을 유러피안 느낌으로 장난스레 발음을 바꾼 것이다. 얼핏 들으면 불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이 엉뚱한 견종명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든다. 발음에서 느껴지는 우아함과 실제 의미의 커다란 간극 사이에서 오는 유쾌함이 있기 때문이다. 시골 강아지를 순식간에 유럽 강아지처럼 느껴지게 하다니!


잡종이라는 부정적 표현을 '자브종'이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도 매력적이다. '잡'이라는 접두사는 여러가지가 질서없이 뒤섞여 있거나 보잘것 없다고 느껴질 때 주로 사용된다. 여러모로 강아지에게 사용하기에 적절한 접두사는 아닌 것이다. 여러 종이 섞였다는 게 보잘것 없거나 무질서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자브종이라는 단어에서는 '여러분 잡종이란 말은 좋지 않으니까 조금 다르게 표현해볼까요?'라는 의도가 은근슬쩍 느껴진다. 그래서 좋다.


누군가는 재미삼아 만든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수많은 믹스견들이 이 네이밍 덕분에 더 사랑 받게 되었다고 믿는다. 똥개라고 부른다면 어쩐지 막 대해도 될 것 같은 인상을 주지만, 시고르자브종은 그렇지 않다. 존중해주고, 예뻐해주고, 귀여워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요즘은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외모를 시고르자브종 얼굴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해당 연예인이 강아지처럼 귀엽다는 의미가 듬뿍 들어있다. 시골잡종이란 말밖에 없었던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을 마케팅 용어로 '네이밍'이라고 한다. 그리고 적절한 네이밍에는 힘이 있다. 한때 내복을 입는 건 어쩐지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졌지만, 유니클로가 내복에 ‘히트텍'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자 누구도 내복을 민망해하지 않게 되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 다들 히트텍을 입어야 겠다고 심심치 않게 말한다. 이름이 바뀌면 인식이 바뀐다. 생활까지 바뀐다.


시고르자브종이라는 이름 덕분에 똘멩이 같은 믹스견들에 대한 눈길이 한층 달라진 것을 느낀다. 게다가 순종이든 아니든 반려동물은 언제나 귀여우니까. 혈통에 구애받지 않고, 종에 연연하지 않으며, 모든 동물이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세상이 성큼 찾아오면 좋겠다. 안 그래, 똘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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