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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15. 2020

고품격 헛소리?

Prologue: 헛소리에서 찾아낸 헉! 소리 나는 크리에이티브

여러분, 요즘 아이디어 두통으로 고민이십니까? 효과 빠른 크리에이티브를 찾고 계십니까? 부작용 없는 근사한 문장이 궁금하신가요? 그렇다면 헛소리를 처방받으십시오!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길. 제가 국가 공인 자격증은 없어도, 석사 박사 학위는 없어도, 헛소리에 대해서 만큼은 꽤나 전문가니까요. 저는 광고대행사에서 카피라이터로 일하고 있는데요.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다양한 헛소리들을 찾고, 모으고, 정리하면서 8년째 회사에서 카피를 쓰고 있답니다. 헛소리 같은 카피나 아이디어로 광고를 제작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누구보다 헛소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카피라이터라는 저의 직업을 듣자마자 머릿속으로 몇몇 분들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훔치고, 따스한 카피 한 줄로 흐뭇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멋진 카피라이터들 말이죠. 저도 그런 카피라이터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광고를,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제가 쓴 카피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면, 사람들은 대개 이런 반응을 보이더군요.


"비싼 밥 먹고 왜 헛소리야?"


얼마 전에는 한 증권사 광고에 쓸 아이디어를 고민하다가 취권, 호권, 당랑권, 그다음 '00증권'이 영웅처럼 나오는 권법 액션물을 만들면 어떻겠냐고 친구들에게 떠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맥주를 마시며 낄낄거리던 친구들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면서 어떻게 밥벌이를 하냐고. 고맙게 생각하라고요.


그런데 말입니다. 며칠 뒤, 저의 허무맹랑한 아이디어를 본 광고주는 꽤나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제 아이디어는 무사히 광고로 제작되어 온에어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소정의 밥값을 한 셈입니다. 제가 아직까지 광고회사에서 꼬박꼬박 월급을 받고 있는 것도 다 이 헛소리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래 봤자 헛소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떤 헛소리에는 품격이 있습니다. 무해하면서도 유쾌하고, 어이없으면서도 뼈가 있는, 가벼우면서도 곱씹을수록 기분 좋아지는 헛소리가 있죠. 배우 최화정 씨가 유행시킨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말이 있는데요. 정말이지 완벽한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음식에는 칼로리가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녀의 '말도 안 되는 말' 덕분에 야심한 밤에도 라면을 끓여먹을 그럴듯한 핑계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우리 모두 다이어트에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위로받지 않았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전국 식당 사장님들의 가슴을 뒤흔든 근사한 카피가 아닐까요? 게다가 무엇이든 맛있게 먹으면 스트레스는 0칼로리에 가까워질 테니까요. 여러분을 다독여주는 매력이 헛소리에는 분명 존재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말들을 '고품격 헛소리'라고 부릅니다. 듣는 순간 '헛?' 물음을 가지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헉!' 소리를 내면서 공감하게 되고, 끝내는 '헐!' 감탄사를 외치며 무릎을 탁 치게 하니까요. 주변을 한 번 둘러봅시다. 세상 모든 헛소리가 크리에이티브한 것은 아니지만, 크리에이티브한 말들 중에는 헛소리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러브픽션>을 보면 남자 주인공 '주월'이 여자 주인공 '희진'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즐기는 술자리에서 뜬금없이 속마음을 드러내는 주월의 첫 대사는 이렇습니다.


"이 자리에 앉아계신 점잖은 신사분들 앞에서 저 여인을 고발하기 위해 내 이렇게 결례를 무릅쓰고 내 분연히 일어섰소."


갑자기 왠 헛소리? 뜨악하는 표정의 사람들과 당황스러워하는 희진 앞에서 그는 꿋꿋이 말합니다.


"고결한 인격과 활달한 미모로 내 마음을 초토화시킨 당신을 (중략) 치명적 매력이라는 죄목으로 큐피드의 법정에 세우겠소!"


허무맹랑한 그의 고백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웃고 희진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희진은 주월에게 키스를 하고 둘은 연인 사이가 되죠. 그야말로 헛소리 덕분에 연애에 성공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헛소리로 은근슬쩍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그 뒤로 하고 싶은 말을 유쾌하게 건네는 전략인 것이죠. 여러분, 헛소리를 잘 사용하면 사랑까지 크리에이티브하게 쟁취할 수 있다 이겁니다!


영화 <러브픽션>의 한 장면 (출처: DAUM 영화)


헛소리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며 주목하게 만들고, 이게 뭐냐며 따지게 하고, 이래도 되는 거냐고 묻게끔 합니다. 싫든 좋든 일단 관심이 생기고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여러분의 굳어있던 마음을 슬쩍 무장해제시키는 것입니다. 소위 '병맛'이라고 불리는 광고들을 보면 하나같이 엉뚱한 말들로 가득 차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그 광고를, 광고 속 제품을 웃고 떠들며 즐깁니다. 헛소리 전문가인 제가 카피라이터로 계속 일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헛소리가 훌륭하다는 건 아닙니다. 수많은 정치인들의 실언이나 일부 공인들의 생각 없는 언사를 떠올려보세요. 어떤 헛소리는 특정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억울한 사람을 만들기도 하며, 차별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유해한 헛소리는 저급한 것에 불과하죠. 그것은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형의 헛소리일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까지 고품격 헛소리의 유용함을 설명하는 것조차 헛소리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여러분이 끝까지 읽었다면, 바로 이 문장을 읽고 있다면, 이것은 마냥 헛소리 같은 얘기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제가 헛소리로 이 글을 시작한 덕분에 당신은 어느새 이 글을 완독하게 되었으니까요.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고품격 헛소리를 찾아서! 이제 저와 함께 떠나볼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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