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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17. 2020

아이디어는 기세야!

지나친 걱정은 아이디어를 망치는 지름길

몇 년 전, '거시기' 덕분에 국가대표를 한 적이 있다. 거시기...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요? 이 이야기는 '칸 국제 광고제'로부터 시작됩니다.



칸 국제 광고제?


'칸 라이언즈 크리에이티비티 페스티벌(Cannes Lions International Festival of Creativity)'이라고도 불리며 매년 여름 프랑스 칸에서 개최된다. 세계 3대 국제 영화제 중 하나인 ‘칸 영화제’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칸 국제 광고제가 시작된다. 전 세계 광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종 콘퍼런스를 열고 매일 밤마다 올해 최고의 크리에이티브를 선정하는 국제적 규모의 행사다. 모든 광고인들이 한 번쯤 꿈꾸는 페스티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회사에는 칸 국제 광고제를 다녀온 선배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를 자랑스럽게 말해주곤 했는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빠지지 않는 건  칸의 해변이었다. 쾌청하고 맑은 날씨에 햇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바다를 보며 마음껏 로제 와인을 마셨다나 뭐라나. 심지어 출장으로 간 도시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원 없이 즐기며 취했다나. 그래서 결론은 저도 사람인지라 부럽고요. 꼭 한 번 가보고 싶네요...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칸 국제 광고제에는 만 30세 미만 광고회사 주니어들을 대상으로 하는 '영 라이언즈 컴피티션(Young Lions Competition)'이라는 대회가 있다. 특정 과제가 주어지면 60여 개 국가에서 온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24시간 동안 아이디어를 내는 크리에이티브 백일장 같은 프로그램이다. 매년 한국에서는 영 라이언즈 컴피티션에 참가하는 티켓을 놓고 동일한 방식의 크리에이티브 경연을 개최하는데 때마침 참가 신청을 받고 있었다. 나도 티켓만 따내면 칸으로 갈 수 있다! 1분짜리 광고 영상을 만드는 필름 부문에 서둘러 지원했다.


친한 아트 디렉터 형과 함께 2인 1조로 팀을 짰다. 평소에도 얘기가 잘 통하는 형이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크, 이제 우승만 하면 되겠네! 우리 진짜 칸 가는 거 아니야? 형 로제 와인 좀 마실 줄 아나? 치즈는 좀 알고?(알고보니 형은 파리에서 6년을 공부했다고 한다..) 함께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켠 후에 주어진 과제를 읽기 시작했다. 유명 스포츠 용품 브랜드의 공장에서 나오는 독성 화학물질이 지역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영어로 빼곡하게 적힌 오리엔테이션 자료를 읽다 보니 마음이 점점 심란해졌다. 한국어도 어려운데 영어가 웬 말입니까.(국제 대회인 만큼 모든 과정이 영어로 진행된다) 아이디어는 안 떠오르고, 칸은 가고 싶고, 우승은 어려워 보이고. 막막하던 그때, 인터넷 검색을 하던 도중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유독물질의 핵심 성분인 '이온성 PFCs'가 환경오염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생체 호르몬을 교란시켜 남성의 정자수까지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정자요?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바로 그 정자? 수많은 축구선수와 축구팬이 열광하는 각종 용품이 정자를 위협할 수 있다고?


"여러분, 축구 용품을 만들면서 생기는 환경 파괴를 막읍시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겠지만 "야, 그거 잘못 쓰면 정자수가 줄어든다고!" 외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정자는 곧 나의 미래이며 어쩌면 새로운 인류가 될 터인데 이 소중한 친구들이 감소한다고 걱정하지 않을까? 나아가 유독 물질의 위험성에 자연스레 주목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뭔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친김에 캠페인 슬로건까지 단숨에 만들었다.


#SAVE THE BALLS (당신의 거시기를 구하세요)


슬로건을 정하자마자 다양한 아이디어가 오고갔다. 축구선수들이 프리킥 수비벽을 만들 때 자신의 급소에 두 손을 올리는 걸 활용해보자는 얘기가 나왔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프리킥 자세처럼 사타구니를 가린 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도록 유도하는 캠페인 영상을 제작했다. 자신이 가린 중요 부위에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유명 스포츠 브랜드들의 인스타그램을 태그하고, 해당 슬로건을 사진 밑에 적어 업로드하게 한 것이다. 영상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심호흡 끝에 제출 완료!


며칠 뒤, 우리는 '거시기를 지키자'는 헛소리 같은 슬로건으로 대회에서 1등을 했다. '거시기'라는 키워드로 이 대회에서 우승한 팀은 아마도 우리가 처음이지 않았을까.


당시 만들었던 캠페인 영상의 한 장면


마침내, 프랑스 칸에 도착하다


몇 달 뒤, 우리는 프랑스 칸으로 떠났다. 처음 며칠은 근사한 해변가에서 로제 와인을 신나게 마셨다. 낮에는 다양한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밤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광고인들과 파티장에서 대화를 나눴다. 프랑스 칸의 다른 이름은 천국이었다! 그곳에서 보내는 모든 시간이 행복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한국 대표 자격으로 영 라이언즈 컴피티션의 필름 부문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주어진 과제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클라이언트는 세계 자연 기금 WWF(World Wildlife Fund)이었는데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환경 파괴나 동물 멸종의 심각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영상을 만드는 게 목표였다.


과제를 받고 나서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브라질 아마존 숲이 사라지고 있는 걸 브라질리언 왁싱에 비유해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털을 뽑는 게 아픈 것처럼 지구에게는 나무를 뽑아버리는 게 고통스러운 일 아닐까? 지구를 향한 브라질리언 왁싱을 멈춰주세요! 이런 메시지는 어때?


그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세계에서 난다 긴다 하는 광고인들이 모인 칸에서 이런 실없는 아이디어를 낼 수는 없었다. 브라질리언 왁싱 같은 장난스러운 아이디어가 통할리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많은 아이디어가 우리 입 밖에서 나왔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에이, 그래도 여기는 칸이잖아! 좀 더 대단한 아이디어 없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덧 주어진 과제 제출까지는 6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우리는 숙소에서 마구 머리를 쥐어뜯다가 허겁지겁 영상을 찍고 편집을 하며 카피를 썼다. 그리고 대회에서 무참히 탈락했다. 심사 결과를 듣고 창밖 너머 아름다운 칸 해변을 바라보았을 땐 황망한 마음이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아름다워서 더욱 서글펐던 칸 해변가


그날 저녁, 우리는 광고제 클로징 파티에서 로제 와인을 연거푸 마시며 한숨 섞인 대화를 나눴다. 형, 우리 브라질리언 왁싱으로 뭐라도 해볼 걸 그랬나 봐. 그러니까, 그게 훨씬 더 재밌었을 것 같은데. 뭘 그렇게 엄청난 아이디어를 내겠다고 부담감을 가졌을까. 1등 팀 영상 보니까 잘하긴 했지만 아주 특별한 것도 아니던데...



걱정스러운 '거시기'들을 구하자


 '거시기'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중 하나는 곤란한 사람이나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이는 경우다. 입 밖으로 꺼내기 민망한 사람의 주요 부위를 '거시기'라고 종종 표현하는 이유다. 또는 '거시기하다'라는 동사나 형용사로도 쓰이는데 무언가를 언급하기 애매할 때 주로 사용된다. "이런 말 하는 게 조금 거시기한데.."라는 말은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라고 걱정하는 의미다.


한국에서 컴피티션을 치를 때만해도 우리는 '거시기'라는 단어를 자신만만하게 슬로건으로 쓰는 패기를 보여줬지만, 칸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런 아이디어는 좀 거시기하지 않냐.."라고 끝없이 외친 꼴이었다. 모든 아이디어에 검토는 필요하지만 지나친 걱정은 더 큰 걱정을 부를 뿐이다. '이런 아이디어는 안 되겠지'라는 부정적인 생각이 커지면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태에 빠지고 만다.


지금 이 아이디어와 생각이 좋은지 아닌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창작의 영역에서 비평과 흥행은 판이할 때가 많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별로라고 했지만 성공하는 작품이 있고 제작자들이 성공을 확신했지만 대중이 차갑게 외면하는 결과물도 있다. 그러니까 너무 부담 가질 이유도 없다. 되면 좋고 아님 말고. 이번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테니까.


영화 <기생충>에선 과외선생님 '기우'가 여고생 '다혜'를 가르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의 정답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과외 학생을 보며 기우는 말한다. 한 문제를 고민하다가 시험 전체를 망칠 수도 있다고. 과감하게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할 때도 있다고.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실전은 기세야!"


한국으로 돌아온 뒤로도 나는 여전히 광고에 쓸 아이디어를 고민한다. 그럴 때마다 종종 두려움이 찾아온다. 나의 생각이 마냥 헛소리에 불과한 건 아닌지, 뻔한 것은 아닌지 갈팡질팡 할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아이디어를 스스로 믿지 못하면 누가 나의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을까. '거시기를 구하자'는 슬로건처럼 때로는 ‘거시기한 걱정'들을 마음속에서 구해낼 필요가 있다. 아이디어도 결국은 기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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