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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용 Oct 20. 2020

힘을 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힘 빼기에 너무 힘 빼지 맙시다

취미로 기타를 친다. 가끔씩 퇴근 후에 시간이 날 때면 기타 연주에 관한 여러 가지 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곤 한다. 며칠 전에도 유튜브를 기웃거리며 기타 테크닉에 관한 영상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AZ의 인생 기타레슨 #02 '테크닉 레슨 - 힘을 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

(출처: 유튜브 채널 'Emotional Guitarist AZ')


뭐랄까. 이 제목을 읽는 순간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틀린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문장이 헛소리처럼 느껴진 것이다.


올해 들어 화제가 '고이즈미 신지로'라는 일본 정치인이 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다름 아닌 특유의 화법 때문. 그의 어록으로는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 "바뀌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등이 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를 이렇게까지 얘기할 일인가?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힘을 빼려면 힘이 있어야 한다'는 영상의 제목도 신지로의 화법과 비슷한 점이 있었다. 뺄 힘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으면, 힘 빼기도 당연히 불가능한 법이니까. 대체 무슨 내용이 숨어있는 거지. 호기심에 영상을 클릭한 순간, 나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이 반박 불가한 진리를 내가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양손에 힘을 빼는 게 중요합니다!


처음 기타를 배울 때 선생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지나치게 힘을 주면 기타 플레이가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운 소리가 난다는 것. 실제로 선생님의 기타 연주는 안정적이고 편안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어디 하나 무리하는 지점이 없어 보였다. 역시 힘을 빼는 게 중요하구나. 기타를 칠 때마다 그 사실을 속으로 되뇌곤 했다.


그런데 웬 걸. 막상 기타를 손에 쥐면 어떻게 힘을 빼라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장 기본적인 C 코드를 잡아보려고 왼손가락으로 있는 힘껏 지판을 누르면 '씨'로 시작하는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게다가 왼손에 느껴지는 진한 고통을 참아내며 오른손으로 기타 줄을 튕기면 돌부리 가득한 논밭을 달리는 소달구지처럼 '드르륵드르륵' 괴랄한 소리만 날 뿐이었다. 양손에 힘 빼기는 고사하고 그럭저럭 힘 주기도 힘든 시기였다.


영상 속 유튜버가 전하는 조언은 이런 내용이었다. 기타 연주는 결국 손가락 근육을 쓰는 행위이므로 충분히 힘을 기르지 않으면 힘을 빼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 그러니까 처음부터 연주에 힘을 빼려고 노력하지 말고, 힘이 빠지지 않는다고 조바심 내지 말고, 꿋꿋이 연습하며 필요한 근력을 키우자는 게 레슨의 요지였다.


ⓒ unsplash


사실 힘 빼기는 기타에서만 중요한 화두는 아니다. 카피나 아이디어의 영역에서도 많은 이들이 힘을 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대단한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부담감은 글이나 생각을 딱딱하게 만드니까. 나아가 그런 상태가 심해지면 어떤 문장도 쓸 수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패닉에 빠지게 된다.


신입사원 시절의 나는 이런 상태를 자주 겪곤 했다. 몇 줄짜리 카피를 써보겠다고 어깨에 잔뜩 힘을 준채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꾸역꾸역 만든 결과물은 너무 오글거리거나 핵심을 빗겨나가기 일쑤였다. 이런 나와는 달리 몇 시간 만에 휘리릭 카피와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선배들을 볼 때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몰래 일기장에 '어깨에 힘을 빼자'는 다짐을 적어놓기도 했던 나였다.


그러나 고통은 모두에게 공평한 것이다. 에릭 클랩튼도, 존 레넌도, 지미 핸드릭스도, 신중현도, 아이유도, 모두 기타를 처음 쳤을 때가 있었다. 그들 모두 나처럼 손가락 끝이 찢어질 듯 아픈 순간이, 끙끙대며 기타를 연습하던 시간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회사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카피를 손쉽게 써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들도 어떻게든 카피를 쓰려고, 아이디어를 내보려고, 머리를 쥐어뜯는 순간을 수없이 지나왔을 것이다.


기타를 손에 쥐고 충분히 아팠던 덕분에 지금의 나는 제법 기타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C 코드쯤은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잡을 수 있다. 어느새 손가락이 악기에 맞춰 단련된 것이다. 모니터 앞에서 카피나 아이디어를 고민하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 8년이란 시간이 쌓이다 보니 몇 줄짜리 카피는 이제 밤을 새우지 않고도 쓸 수 있다. 무엇이든 하면 는다. 엉성하더라도, 조금 느리더라도, 무언가를 계속해서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어떻게든 성장한다.


힘 빼기가 잘 되지 않는다고 너무 초조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힘 빼기는 힘 주기의 부산물 같은 것이니까. 충분한 근력이 생기면 자신도 모르게 힘은 빠지기 마련이다. 기타든, 카피든, 아이디어든, 다른 무엇이든, 때론 있는 힘껏 힘을 주자. 삶의 근력은 그렇게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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