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1:4~40
믿음의 좋은 사례 1 - 아벨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브리서 11:4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에 비해 아벨의 제사를 특별히 기뻐 받으신 이유가 성경에는 그리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지 않다. 신학자들의 여러 추측이 있지만, 여기 쓰인 ‘믿음’을 ‘진심’으로 한번 바꾸어 읽어 보면 한결 쉽고 더욱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날 갖은 행위로 이상하게 치환되곤 하는 믿음 말고 우리의 진실한 마음, 진심! ‘아벨이 다름 아닌 진심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By faith Abel offered unto God a more excellent sacrifice than Cain, by which he obtained witness that he was righteous, God testifying of his gifts: and by it he being dead yet speaketh. (Hebrews 11:4 KJV)
관계대명사 계속적 용법에 분사구문 같은 게 있어서 직역하기가 좀 어려운데, ‘아벨은 믿음으로써 가인보다 더 훌륭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로 인해 아벨은 의롭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물을 확인하셨음에야..’ 이렇게 하면 대략 될 것 같다.
흠정역의 ‘witness’를 우리말 개역개정은 ‘증거’라고 또 번역했는데, ‘witness’는 원래 ‘목격’, ‘증인’의 의미를 갖고 있어, 전후 과정을 다 ‘목격/목도’하신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의미를 ‘확증’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내 번역’으로 간략하게는 ‘평가’라 해 보았다.
비슷한 단어 ‘증언’은 ‘testify’의 번역이다. 여기서는 굳이 더 따질 것 없이 ‘증언하다’로 그냥 쉽게 보는 방법과 문맥의 흐름상 ‘보증/보장하다’ 또는 ‘확증하다’의 의미를 포함시켜 보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내 번역’으로는 간단히 그 가치를 ‘확인하셨다’고 하였다.
다시 죽 훑어보니 흠정역 4절은 마침표가 끝에 하나만 찍힌 한 문장이다. 우리말로도 한 문장으로 이해하기 쉽게 나름 정리하면 ‘더 진심으로 예배한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아벨을 옳다/바람직하다/의롭다 평가/칭찬하셨는데 아벨은 이미 갔어도 그의 믿음/진심은 이렇게 남아 여전히 진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By faith Abel brought God a better offering than Cain did. By faith he was commended as righteous, when God spoke well of his offerings. And by faith Abel still speaks, even though he is dead. (Hebrews 11:4 NIV)
역시 NIV가 오늘날 우리에게 분명 더 자연스럽다.
믿음의 좋은 사례 2 - 에녹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히브리서 11:5 개역개정)
‘이런 일이 다 있나?’ 믿기 어려운 게 문제지, 문맥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흠정역을 보면 ‘translate’ 같은 단어가 요즘 흔한 쓰임새와 다르게, 그것도 각기 조금씩 다른 뜻으로 한 절에 세 번씩이나 사용된 게 오히려 더 헷갈린다. NIV를 참고해 오늘날 독자들에게 좀 더 와닿게 살짝만 고쳐 쓰면 이렇다.
'믿음으로 인해 에녹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겪지 않고 이 세상으로부터 옮겨졌다. 이후 세상에서 그를 본 사람은 없다. 일찍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칭송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셨다.'
2절의 '증거'가 그랬던 것처럼 5절의 '증거'도 '좋은 평가/평판' 또는 '칭찬/칭송'으로 보는 게 무난하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개역개정)
다음 사례로 넘어가기에 앞서 저자의 당부가 이어진다. 믿음의 우수 사례로 꼽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런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듯이.. 믿을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결과 상을 받은 에녹의 사례에 바로 덧붙여서 말이다.
갖은 이상한 '생각' 또는 이상한 '행위'로 자꾸 치환되곤 하는 '믿음'의 본래 의미를 애써 부각시켜 보고자 앞서 한번 해 봤던 것처럼 '믿음'을 '진심'으로 바꿔 다시 한번 읽어본다.
'진심이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믿음의 좋은 사례 3 - 노아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히브리서 11:7 개역개정)
'믿음을 통해 노아는 아무 징후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놀랍고 두려운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들어 결국 큰 배를 짓고 그 가정을 살려냈다'는 사실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런데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누가복음 6:37)' 이게 하나님이신 예수님 말씀인데 노아가 세상을 정죄했다?
영어 성경을 봐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틀림없이 노아가 주어고 그가 세상을 정죄했다고 되어 있다.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노아는 사적인 감정과 개인적인 이유로 세상을 정죄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노아는 이렇게 믿음의 우수사례로 소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노아는 온 인류 가운데 딱 한 명, 믿음의 사람으로 선발된 사람이다. 세상을 정죄하신 것은 (노아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가운데 노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역할을 맡아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다. 개인적인 감정 폭발이나 파괴적 행동은 전혀 없었다. 다만 이 모든 일 끝에 다른 사람은 다 죽고 본인 그리고 본인 가족만 살아남았을 뿐, 이들은 아무도 다치게 하거나 죽이지 않았다.'
악한 일에 동원됐거나 부역했던 사람들이 비슷한 논리를 가져다 자기변호에 쓰는 게 문제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사람 가운데 노아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마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위해를 가한 사실이 있었는가 하는 점에 있어서는 아마 노아와 완전히 다를 것이다. 노아는 시간 들여 힘 들여 방주를 짓는 동안 바보짓한다는 비방을 들으면 들었지..
믿음의 좋은 사례 4 - 아브라함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서 11:8 개역개정)
아브라함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출발부터 하고 보았다는 사실은 절대적 순종의 모범으로 감동을 주기는 하지만, 매번 우리의 결단이 이런 식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부르심도 딱히 없는데 어디든 가볼까 공연히 떠올려 보는 사람, 또 말도 되지 않는 일에 맹신자들을 함부로 동원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오용 또는 악용되는 사례가 많으니 주의할 일이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히브리서 11:9~10 개역개정)
히브리서 11장을 이렇게 꼼꼼히 읽게 된 것은, 매우 익숙하지만 솔직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히브리서 11장 1절(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작정하고 샅샅이 들여다보면서부터다. 영어 전공자로서 개역성경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기는 하지만, 그 가운데 오늘날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을 적잖이 보게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약속하신 땅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곳에서 갈 곳 없는 나그네처럼 살았고, 같은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영원한 터가 있는 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세우신 성입니다. (히브리서 11:9-10 쉬운성경)
보수적인 대한민국 교회 풍토에서 개역 아닌 다른 성경을 기준 삼기가 무척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개역만 붙잡고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천 번 만 번 나은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외국어 성경이 아니더라도 참고할만한 우리말 좋은 역본이 여러 가지 있어 참 다행이다. 이 구절의 경우 훨씬 이해하기 쉬웠던 것은 바로 ‘쉬운성경’이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히브리서 11:11~12 개역개정)
가임연령이 한참 지난,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믿음 가운데, 약속을 하신 분이 과연 ‘믿을만한 분이심’을 알아 결국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다. 출산과 관련해서는 사실상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던 한 사람을 통해 결국엔 별처럼 모래처럼 수많은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개역개정)
이 구절은 번역한 지 더 오래된 흠정역을 읽는 게 차라리 이해가 더 빠르다. 번역하면 '그들은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믿음 가운데 죽었다. 그러나 약속의 성취를 멀리서 보고 이해해 알았으며 또 그것을 꼭 붙들어 안았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그들은 (스스로를) 나그네요 순례자라 불렀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계속) 어떤 나라를 찾고 있음을 말한다. 사실, 그들이 떠나온 나라를 혹 (다시) 마음에 두었다면 그들은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나은 나라, 이를테면 천국을 열망한다. 하나님은 거칠 것 없이 이들의 하나님이 되시었고 이들을 위한 도시를 준비해 놓으셨다.' 대략 이렇게..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11:17~19 개역개정)
믿음의 우수사례로 선정된 아브라함의 마지막 공적사항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실 때 아브라함은 외아들 이삭을 기꺼이 바쳤는데, 아브라함은 ‘반드시 이삭을 통해 대를 이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의지했고, 그러기에 혹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이라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의 좋은 사례 5 - 이삭, 야곱, 요셉
믿음 가운데, 보이지 않는, 자녀들의 미래를 미리 보고 축복했다. 특히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 이집트를 떠나게 될 것을 알고 후손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수습해 챙겨갈 것을 당부한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세기 50:24~25 개역개정)
믿음의 좋은 사례 6 - 모세
한두 명 대표적 인물이 소개되나 했더니, 과연 히브리서 11장은 성경의 주요 인물이 총망라된, 일종의 대서사시다. 이 가운데 모세가 빠질 수 없다.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가 모세를 지켜낸 것은 모세 부모의 믿음이었고, 이집트 왕실의 안락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도 믿음때문이었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듯 마음을 다스리고 이집트 왕의 분노를 겁내지 않은 것도 그의 믿음이었으며, 첫 유월절, 이스라엘의 장자들을 구하기 위해 피 뿌리는 예식을 치른 것도 믿음이었고,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것도, 7일 동안 빙빙 돌아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것도 믿음이었다. 이밖에도 모세오경 가득 쓰인 어마어마한 모세의 행적이 다 모세의 믿음 덕이었을 것이다.
믿음을 통해 보이지 않는 걸 증거하는 것(히브리서 11:1)이 무엇인가 새삼 다시 생각해 본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브리서 11:25~26 개역개정)
눈에 보이는 당장의 안락보다 궁극의 선과 영원을 소망함으로.. 그것은 보이지 않으나 우리는 믿음 가운데 그것을 볼 수 있으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린도후서 4:18 개역개정)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새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믿음의 좋은 사례 7 - 라합
믿음의 좋은 사례 8 -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선지자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11:32~40)
통독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 말씀을 혹 처음 대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달콤한 구절만 찾아 요절이라며 암송하는 사람들이 애써 이런 말씀을 찾아 되뇔 일은 사실 만무하다. 좋게 말해 선교, 적당히 말해 교세 확장, 막말로 고객 확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구절이다. 다들 믿음으로 고문받고 조롱당하고 채찍질당하고 묶이고 갇히고 돌 맞고 톱에 썰리고 갖은 모욕에 궁핍에 환난에 학대를?
히브리서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이스라엘 민족, 히브리 사람들을 대상으로 신약시대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고 교양하기 위해 작정하고 쓴 책이다. 시쳇말로 하면 '선수가 쓰고 선수가 읽는 책'이다. 손님 떨어질까 봐 할 말 못하는 책이 아닌 것이다.
히브리서는 엄중하게 묻고 있다. 믿음을 통해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보아 일평생 온몸으로 증거하고 있는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그것이 이 어둠 건너 우리를 부활케 하리라!'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 김진경 작사, 윤민석 작곡)
이 와중에 한국 교회는 믿음으로 치부하고 갑질하며 유세하고 차별하며 핍박하는가?
11장을 잘 읽어야 12장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히브리서 12:1 개역개정)
익숙한 구절이지만 앞뒤 맥락 없이 읽으면 잘못 이해하기 십상이다. 혹 내 주위에 떼지어 모인 이 많은 성도들이 허다한 증인? 이 큰 교회의 이 많은 사람? 아니다. 11장에서 실컷 본,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그분을 증거한, 그래서 증인이 된 허다한 믿음의 조상들 얘기다.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꾹 참고 그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결국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2 개역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