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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돈 Jan 28. 2021

내게 기네스는

아일랜드, 더블린 같은 데 대해서는, 뭐랄까, 일종의 부채의식 같은 게 있다. 대학에 입학할 때 우리 과 학과장이시던 김종건 교수님은 국내 조이스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서 재직하시는 동안 내내 제임스 조이스 학회장을 맡으셨던 분이다. 우리는, 1학년 때 Dubliners(더블린 사람들), 2~3학년 때 A Portrait of the Artist as a Young Man(젊은 예술가의 초상), 3~4학년 때 Ulysses(율리시즈)를 배우고 졸업하는 게 문학 수업의 기본 틀이었고..


안암동에 자리 잡은 고려대학은 학생이 술꾼이라 교수도 술꾼에 총장도 술꾼이라는데, 민족고대 청년사대 단결영어교육과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읽지 않을 수 없던 조이스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술은 바로 흑맥주 기네스였다. '맥주는 싱거우니 신촌골로 돌려라’는 옛말이 있기는 하지만, 기네스는 그리 싱겁지 않으니 고대생이 딱히 못 마실 이유가 없기는 하였겠지만, 책에서는 자꾸 접하는 그 흔한(?) 맥주를 당시 국내 시중에서는 결코 쉽게 구할 수 없었으니.. 다른 호텔은 말고 꼭 조선호텔 지하 아이리시 펍 오킴스에 가서 무시무시한 값을 치러야 겨우 맛이나 볼까 말까 하는 정도의 귀한 술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졸업을 앞두고 사은회 사회를 보면서 '여기도 참 좋지만, 선생님들과 함께 더블린 리피 강가에 앉아 기네스를 한 잔씩 하면서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훨씬 더 좋지 않았겠나 생각한다’고 말씀 드렸더니 김종건 선생님께서 그렇게 좋아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저러나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율화되고 1990년대 초반 꿈에도 그리던 유럽여행을 누구나 다닐 수 있게 되었지만, 숱한 사람들의 그 흔한 동선에서는 아무래도 좀 벗어나 있던 아일랜드 그리고 더블린. 


막상 1999/2000년 영국 유학을 가서도, 런던에 비하면 아일랜드에 훨씬 가까운 웨일스의 카디프에 살았지만, 더블린 가는 일은 이래저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정착 초기 슈퍼마켓에 가서 잔뜩 쌓인 기네스를 보았을 때의 감동만큼은 정말 잊기 어렵다. 다른 맥주에 비해 결코 싸지 않았지만, 유학생활 초반 적어도 6개월 동안은 입에서 탄내가 나도록 기네스만 사다 마셨던 기억이.. 술맛도 중요하겠지만, 학부 때 숱하게 접한 조이스 작품에 소개된 아일랜드 또는 더블린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적잖이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근처에 살 때는 오히려 못 가보고 도리어 귀국했다가 몇 년 뒤 작심하고 가 본 더블린. 조이스 작품에 등장한 명소이며 맛집인 펍을 마구 찾아다니면서 한 군데 들어갈 때마다 기네스 한 잔씩을 마시고 나왔던 기억은 참으로 귀하기만 하다. 더블린의 인기 관광코스 중 하나인 기네스 공장 견학과 시음을 빼놓아서는 또 안 될 것이고..


붉은 템플바의 흥성스러움이 새삼 떠오른다. ‘내가 사랑한 다리’로 기억하자고 마음먹은 보도교 '하 페니 브리지(Ha’penny Bridge)’ 앞에서 몽롱한 상태로 한참 바라보았던 리피강의 밋밋한 풍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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