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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1억 번째로 싫어해.

거꾸로 말하기 화법

by 최승호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 아들이 엄마와 아빠를 닮아서인지 말장난을 좋아한다. 아니 놀이터에서 간혹 보면 대부분의 초등학교 1~2학년 또래 아이들이 상대방의 말을 따라 하거나 일부러 반대로 대답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당하는 상대방은 하나도 재미없어하는데 혼자서 껄껄껄 하며 배를 잡고 웃는다. 본인도 재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봐 웃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어렸을 때 그랬던 것 같은데 도통 학교나 학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집에서 꺼내지 않았다. 가족 간 저녁 식사를 하면서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어?"라고 물으면 "예~", "선생님 말씀은 잘 듣고?", "예~" 지금은 예스맨인데 학창 시절엔 '예맨'이었다. 어쩌면 '예'조차 안 하려고 했으나 대답 안 한다고 꾸중을 들을까 봐 '예'라도 했던 것 같다.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들과 가까운 근교라도 다녀오는데 지난 주말은 더우면서 습하고, 익충이라 불리는 '러브버그'들의 습격으로 야외활동을 하지 않았다. 둘째 딸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여 놀이방이 있는 식당에 다녀왔다. 아이들과 대화를 이어나가려면 부모가 질문을 잘해야 한다고 하는데 질문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나 : 아들, 왜 남자친구들하고는 잘 놀면서 여자친구들하고는 인사도 안 해? 부끄러워서 안 하는 거야?

아들 : (웃으며) 아니 A, B, C(남학생들 이름만 말하며)가 좋아. 재밌어

나 : 아니 그래도 먼저 인사를 하면 인사는 받아줘야지. 귀도 밝으면서 왜 못 들은 척해? 이유가 있어? 좋아해?

아들 : (대답은 다해줌) 안 좋아해~

아내 : 그럼 라온이(여동생)랑 그 D(같은 반 친구) 중에 누가 더 예뻐?

아들 : (보란 듯이 웃으며) D

딸 : (엄마 옆에서 밥 먹던 라온이가 눈물을 흘린다.) 엄마, 오빠가 나 안 예쁘대

아내 : 그럼 엄마랑 D 중에 누가 더 예뻐?

아들 : 엄. 마.

아내 : (엄마 당황)

나 : 아들이 사회생활을 잘하네. 거기서 갑자기 엄마가 제일 예쁘대


고기를 먹다가 딸은 눈물을 흘렸고, 옆에서 아내는 아들의 달콤한 대답에 싱글벙글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자, 말 한마디로 천냥빚도 갚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대화를 이어갔다.


나 : 그럼 아빠는 가온이한테 어떤 아빠야?

아들 : 아빠는 1억 번째로 싫어

나 : (뜬금없이) 오잉? 싫다고? 1억 번째로?

아들 : (웃으며) 응

나 : (곧이곧대로 해석) 아니 1억 번째로 싫은 사람이랑 왜 하루 종일 붙어있는 거야~ 가온이가 아는 사람이 1억 명이 안 되는데 1억 번째로 싫다고?!

아내 : (옆에서 거들며) 1억 번째로 싫다는 거면 반대로 그만큼 좋다는 거지

나 : (급화색) 그런 거지?

아들 : (역시 엄마랑은 대화가 통해) 흐흐흐, 놀이방 갔다 올게


다행히 식사를 하는 동안 침묵의 대화가 아닌 아직까지는 대화를 하면서 식사를 하는 분위기이다. 이 분위기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고 시간이 되는 한 가급적 아내와 아이들과 늘 식사도 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고 한다. 점심식사 후 키즈카페가 아닌 첫째가 원하는 보드게임카페로 향했다.


나 : 가온이가 하고 싶은 보드게임 다 가져와, 아빠가 다 이겨줄게

아들 : 아빠는 나한테 다 지잖아. 내가 다 이기잖아.

나 : 아빠가 봐주는 거지

아들 : 예전에는 봐줬는데 이제는 봐주지 않아도 내가 이기잖아.

그렇게 시작한 기싸움은 2시간가량 지속되었다. 이기고 지길 반복하며 각자의 강점을 발견한 시간이었다. 나는 스피드 게임에, 아들은 두뇌 게임에 소질이 있었다. 결국 우리 가족 4명 모두는 승부욕에 불타있었다. 집에서도 보드게임카페에서도 늘 마지막에는 "항상 승패의 결과도 중요하지만 결과가 전부가 아니고, 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마음이 중요하고, 내가 상대방보다 조금 더 잘해서 혹은 운이 좋아서 이기고 있는 상황이더라도 끝까지 방심하지 말고 해 나가면 돼. 방심하는 순간 위기가 찾아온다."라고 말을 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승부욕의 끝판왕이었다. 초등학교 1~3학년 3년 동안 기원에 다니면서 어느 정도 길을 볼 줄 안다고 자부했기에 주말이면 아빠의 친구들과 혹은 삼촌들과 바둑을 두었다. 이상하게 막상막하로 흐르다가도 결국은 내가 항상 졌다. 너무 분해서 씩씩거리며 흑돌을 놓았고, 밤 12시가 지나서도 "한판더"를 외치며 강제로 귀가시키지 않은 적도 있다. 그 끝은 결국 나의 서러운 눈물 대폭발이었다. 그렇게 울다가 잠든 적이 꽤 있다.


이번 글은 나의 넘치는 승부욕보다는 아들과의 대화가 주된 주제였기에 이만 줄인다. 오늘도 나는 아들에게 80억 번째로 싫은 사람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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