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멍고백
요즘 우리 가족은 캠핑에 빠졌다. 자세히 말하면 엄마와 아빠가 빠졌다. 5월에 2회, 6월에 2회 다녀왔다. 아이들이 이렇게 재미있게 놀 줄 알았으면 더 빨리 시작할 걸이란 생각과 동시에 지금 시기에 캠핑을 시작해서 그나마 수월하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아무래도 캠핑의 꽃은 '불멍'이기에 얼른 해가 지길 바랐고, 어두워지는 순간 불멍은 시작된다.
불을 피우고 멍을 때려야 불멍인데 아이들이 깨어있는 상태에서의 불멍은 쉽지 않다. 아이들과 함께 마시멜로와 쫀드기를 구워 먹고, 얼른 잠들기를 바라는데 또 밖에 나와서 일찍 잠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아이들하고 함께 캠핑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불멍은 불멍이냐, 같이 먹고 놀자'라는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보낸다.
마침 캠핑장에 물놀이와 에어바운스(미끄럼틀)가 설치되어 있어 둘째 날에는 오전, 오후 각 1시간씩 놀았다. 아이들이 학업에는 신경 쓰지 않아도 수영은 배웠으면 하는 바람에 불을 피워놓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다.
나 :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생존수영을 하는데 그전에 수영을 배워놓으면 좋지
아들 : 엄마랑 아빠는 물에서 계속 수영 잘하던데
딸 : 아빠는 물이 좋아?
나 : 아니 아빠도 어렸을 때 계곡 깊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다가 죽을 뻔해서 물이 제일 무섭지
딸 : 불보다 물이 더 무서워?
나 : 아빠는 불보다 물이 더 무서워
아들 : (옆에서 눈치 보다가) 아니 아빠 물이 제일 무서운 거 아니잖아. 흐흐.
나 : 우리 한 명씩 제일 무서운 것, 사람 포함해서 이야기해 볼까?
아내 : 엄마는 벌레
아들 : 나는 엄마랑 아빠
나 : 둘 중에 한 명을 고르면?
아들 : 그럼 엄마가 제일 무섭지, 아빠는?
나 : 아빠는 김.정.미(아내)
딸 : 나도 벌레
아내는 무서운 존재로 2표를 받은 것에 대해 의아해했으며, 나와 아들은 서로 마주 보고 킥킥거리면서 웃고 있는데 옆에서 딸이 한심했는지
딸 : 그러니까 아빠랑 오빠가 맨날 엄마한테 혼나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나 : 이번에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것, 사람 포함해서 시작!
아들 : 나는 나
나 : 아빠는 김.정.미
딸 : 나는 비버(오빠를 비버 취급함)
나 : 자, 다음으로 제일 재미있는 사람은?
아내 : 최승호, 가온이, 라온이 그때그때 다름
아들 : 나는 나
나 : 아빠는 김.정.미
딸 : 나는 비버
아들 : 아빠는 맨날 다 엄마네. 아빠는 무서운 것도 엄마, 좋아하는 것도 엄마, 재미있는 사람도 엄마네.
'아빠는 무조건 엄마'라는 인식이 아이들에게 강력하게 각인이 되었나 보다. 어렸을 때부터 내 자식도 중요하지만, '아빠는 무조건 엄마'라는 점을 노래 부르듯이 강조하였다. 이제는 아이들도 그러려니 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언제 이렇게 커서 엄마랑 아빠랑 같이 캠핑장에서 불멍 하면서 도란도란 대화도 나누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엄마(2표)와 벌레(2표)로 나뉠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투표 장소가 캠핑장이 아니었다면 투표의 결과는 3:1이 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점쳐본다.
요즘 들어 아이들과 소통이 잘 되는지는 의문이나 어쨌든 일상생활에서의 기본적인 대화가 된다. 아내와의 대화, 아이들과의 대화들을 차곡차곡 기록해 둘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