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승혜 Jan 23. 2019

어쩔 수 없는 마음

<캐롤>을 읽고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의 경우, 둘 다 볼 생각이 있을 때에 한해서지만, 영화를 본 뒤 책을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책을 먼저 읽고 영화를 보게 되면 상상 속의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에 뜨악하거나, 미처 반영되지 못한 세세한 디테일을 찾다가 실망하게 되므로. 몇 달 전 영화 <캐롤>을 본 덕분에 아주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으나 쳐다만 보던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캐롤>을 드디어 읽을 수 있었다.

책은 영화와 거의 흡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꽤 다르다. 테레즈와, 캐롤과, 테레즈의 남자친구인 리처드의 성격이 영화 속 인물들과 사뭇 차이가 난다. 다소 제멋대로지만 카리스마 있는 후원자 같았던 영화 속 캐롤과 다르게 책 속의 캐롤은 훨씬 더 포악하고 짜증스러운 자기 중심적인 인물이다. 누군가 영화 <캐롤>을 보고나서, 둔감하고 배려심 없는 리처드 대신 전폭적인 응원을 보내며 깜짝 선물로 카메라를 선물하는 캐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고 코멘트 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책 속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상황에 가깝다.

책 속의 캐롤은 테레즈의 작업물을 무시하고, 모욕을 주고, 무례하고 거친 행동을 하기도 하며, 제멋대로 구는 경우가 많다. 반면 남자친구인 리처드는 테레즈의 기분을 맞춰주려 애쓰고,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그녀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테레즈가 리처드를 두고 캐롤을 사랑하게 되는 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물론 성 정체성의 문제가 남지만.) 이런 사람을 좋다고 따라다니다니 바보 아냐?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그런데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소설 쪽이 사랑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영화 속에서는 테레즈가 무심하고 거친 리처드를 두고 섬세하고 다정하면서 사려깊은 (그리고 아름답기도 한) 캐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서사였다면, 소설 속에서는 그러한 모든 무례함과, 거침없음과, 난폭함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누구나 한두번 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신을 좋아해주는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 대신, 난폭하고, 거친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하던 그런 경험이.

읽으면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원작인 안드레 애치먼의 <그해 여름, 손님>을 자주 떠올렸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이지 싶다. 두 소설 다 사랑에 맹목적인 젊고 순수한 영혼의 상대로 원숙하고 노련한 이가 등장한다. 사랑에 빠진 미숙한 주인공의 전전긍긍한 심리가 잘 드러난다는 것도 비슷하다. 두 주인공 모두 사랑에 상처를 받은 뒤 ‘성숙’해 나간다는 점 또한 그렇다.

현실에서건 작품 속에서건 무책임하고 즉흥적인 캐릭터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지라 영화를 볼 때도 그렇고 소설을 읽으면서도 그렇고 제멋대로이며 난폭한 캐롤의 행태에 분노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사랑에 무조건 직진인 테레즈에 비해서는 아무래도 캐롤 쪽이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었다. 남편도 있고, 자식도 있고, 세상의 시선도 있고, 사랑에 맹목적으로 매달릴만한 나이가 지난, 잃을 것이 많은 캐롤. 반면 순수로 무장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테레즈.


그러한 테레즈이기에 캐롤이 자신보다 딸을 택한 것이라며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하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언젠가 희미해질 감정 대신 자식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 하는 마음이 들었고, 내 안에 테레즈와 같은 순수함 따위는 오래 전 사라졌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한 계기가 되었다. 그것이 조금 서운하기도 후련하기도 하다.

작가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백화점 직원으로 일하던 시절 손님으로 왔던 금발 머리 여성을 보고 강렬한 감정을 느껴 이 소설을 썼음에도 정작 본인은 테레즈보다는 캐롤 쪽에 훨씬 더 감정을 이입했다고 밝힌다. 제목이 <캐롤>이 된 것도 그 때문이라고. 그 시대에 이런 소설을 써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정말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대표작인 리플리 시리즈를 10년 전에 사서 1권만 읽고 방치해 둔지 오래다. 빠른 시일 안에(죽기 전에)읽어야겠다....


⭐️⭐️⭐️





눈동자는 회색으로 무채색이나 불꽃이 일듯 강렬했다. 눈동자에 붙들린 테레즈는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앞에 있는 손님이 재차 묻는 소리다 들렸지만 테레즈는 가만히 선 채 벙어리가 되었다. 여인은 딴 데 정신이 팔린 표정으로 테레즈를 쳐다보았다. -p.55

테레즈는 짙은 풀 내음 속에서 한 줄기 가녀린 실처럼 피어오르는 캐롤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그 실을 따라가 캐롤을 품에 안았으면. -p.129

캐롤에 대한 감정은 사랑일까, 아닐까? 그것이 뭔지조차 모른다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테레즈는 사랑에 빠진 여자들 얘기를 들어봤다. 그리고 그런 여자들이 어떤 부류인지, 어떻게 생겼는지도 알았다. 테레즈나 캐롤은 그런 외모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캐롤에 대한 테레즈의 감정은 사랑을 확인하는 시험을 모조리 통과했으며 사랑을 정의하는 내용과도 다 맞아떨어졌다. -p.151

테레즈는 몸을 돌려 캐롤의 미소를 바라보았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 지금 웃는 건가요?”
“넌 이 성냥만큼 연약해.” 캐롤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도 성냥을 끄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만 제대로 맞아떨어지면 성냥개비 하나가 이 집을 홀랑 태울 수도 있어.”
“도시도 가능해요.” -p.205

“넌 남들 감정을 살피는 데 미숙해.” 캐롤이 까칠하게 말했다.
(...)
“넌 너무 어려서 네 마음조차 제대로 몰라.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맞아, 그런 경우엔 거짓말을 했어야해.” -p.248-249

테레즈가 호텔 방문을 열자 캐롤의 모습이 창이 되어 테레즈의 가슴을 관통했다. 테레즈는 문고리를 붙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p.302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과연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건 정확히 무엇일까? 어떤 사랑은 끝나고, 또 끝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질문이다. 그런데 과연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p.310

매거진의 이전글 사라진 원고의 비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