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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승혜 Mar 26. 2019

시대정신

<2019 이상문학상 작품집>

언젠가부터 이상문학상 수상작 모음집은 읽지 않게 되었다. 너무 무겁고 진지하고 뭐랄까, 현실과 겉도는 느낌이 별로였다. 뭐 이러쿵저러쿵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재미없다는 이야기.

그러다 이번 수상작들은 워낙에 평이 좋아서 읽게 되었는데, 과연 전반적으로 굉장히 좋았다. ‘전반적으로’라는 것은, 역시나 모든 작품이 그렇지는 않았다는 것. 그렇지만 몇몇은 올해 읽은 단편소설 중 가장 좋았다.

대상 수상작인 윤이형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요즘 시대 여성의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 마음에 많이 남는다. 결혼, 주거, 출산, 육아, 경력단절, 재취업, 반려동물, 이혼, 죽음, 등등의 화두를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풀어낸다.

간혹 둘 다 괜찮은 사람들인데 뭐 때문에 저렇게 안 맞을까, 뭐 때문에 저렇게 계속 갈등상태에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윤이형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무해한 두 사람이 어떻게 점차 멀어지고 어긋나는지를 잘 그려낸 작품이었다. 시대의 이야기도 담겨있고.

장강명의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제목 그대로 동네 빵가게 세 곳이 서로 경쟁하는 내용인데, 요즘의 화두인 자영업자 구조조정 및 인기리에 방영 중인 백종원의 골목식당 생각도 나게 하고, 하여간 섬뜩할 만큼 리얼하고 현실적인 이야기였다. 장강명 작가는 현실을 박제하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이 특히나 그랬다. 심사 후기에 보니 대상이 아닌 우수상인 이유가 소재가 너무 피상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게 어때서...라는 의문을 잠깐 품었음.

최은영 작가의 <일 년>이라는 작품도 괜찮았는데, 사실 최은영 작가의 최근작들은 다 좋으면서도 비슷비슷한 느낌이다. 말하자면 하나하나의 작품들은 완성도가 높고 수준도 있는데(그래서 대개의 작품이 모두 어떤 수상집에든 꼭 들어가 있는데), 작가 전체의 작품의 흐름으로 따지면 모두가 다 비슷비슷한 이야기 같다는, 뭐 그런 느낌적 느낌.



⭐️⭐️⭐️



희은은 조금 놀라 의사의 얼굴을 보았다. 곱실거리는 머리카락 밑 그의 이마에는 땀이 배어나 있었고, 눈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희은은 방금 전까지 무심한 배경으로만 존재하던 이 젊은 의사에게도 삶이 있고 역사가 있으며, 그동안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살려내지 못한 개와 고양이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역시 숱한 죽음들 앞에서 얼마나 위로가 필요한지, 그가 전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혹독한 진실이든 간에 자신이 그 한 문장을 되풀이해 돌려주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일인지 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토록 끔찍한 악의들로 가득 찬 세상에도 실은 그것이 당장 형체 없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게 떠받치는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의지들이 있음을, 그러므로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탓할 권리를 영원히 빼앗겼음을 깨달았다. -p.24, 윤이형,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세 빵집이 모두 식빵을 경쟁적으로 할인하는 바람에 함께 죽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집에 식빵이 남으면 빵집을 찾는 일 자체를 꺼린다. 더구나 식빵은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윤도 박하다. 그렇다고 다른 두 곳이 식빵을 반값에 파는데 먼저 할인을 거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싸움이라고 하은의 어머니는 말했다. -p.208, 장강명, 현수동 빵집 삼국지



그게 정말 우리 손에 달린 일 맞아요? 전 잘 모르겠어요. 이건 저희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의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저희 집이나 이 집이나 장사 잘되면 어떻게 될 거 같으세요? 그러면 여기 장사 잘되는 곳이구나, 하고 옆에 빵집 또 생겨요. 틀림없어요. 저는 가게 망할지 안 망할지는 그냥 다 운인 거 같고요. -p.226, 장강명, 현수동 빵집 삼국지



다희를 만나고 얼마 후, 그녀는 회사 내의 대학 동문 모임에 초대받아 참석한 적이 있었다. 몇 기수 위 선배가 인트라넷 메시지로 동문들을 비밀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 가서 그녀는 인간이 배타적인 공동체에서 얻는 끼리끼리의 저급한 쾌락을 읽는 동시에 어린 여자인 자신이 그들의 ‘진짜 우리’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더 이상 그들의 ‘우리’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왜 그 모임에 다녀와서 기운이 없고 울고 싶었는지 그녀는 다희와 대화하며 알 수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모두 같은 목소리로 저마다 방백하고 있었던 것이다. -p.330, 최은영, 일 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 눈썹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것이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워했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p.336, 최은영, 일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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