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
공저자가 있는 책, 그중에도 특히 소설은 잘 안 읽는 편이다. 책의 퀄리티가 들쭉날쭉해지는 게 싫은 것도 있고, 읽은 다음 내용이 거의 휘발되어버려서 나중에 뭘 읽었는지 기억에 안 남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다가 이번에 나온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은 워낙에 평이 좋아서 보게 되었는데,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들었던 몇 가지 단상.
1. 박민정
사실 박민정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캐릭터가 잘 와 닿지 않고 주제의식이 너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별로랄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취향의 문제일 뿐, 작품성이나 완성도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박민정의 강점은 시대를 굉장히 잘 읽는다는 것. 이번 현대문학상 수상작이자 소설집의 표제작인 <모르그 디오라마>는 불법 촬영물(몰카)을 다룬 것이었는데, 최소 1년 전에 쓰였을 법한 작품이 지금 가장 뜨거운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2. 여성 작가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소설’ 하면 떠오르는 특정한 이미지들이 있다. 뭔가 고루하고, 뜬구름을 잡는 것 같고, 현실과 동떨어진 듯하면서, 무엇보다 지루한. 여기에는 아마 학창 시절 배웠던 단편들(김동인과 염상섭 등으로 대변되는)의 영향도 있을 것이고, 소위 문단의 ‘거장’으로 대우받는 몇몇 원로 작가의 이미지도 씌워져 있을 것이고. 실제로 그간 흥행했던 유명한 한국소설들 역시 이러한 느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 사실 한국소설이 외면받게 된 주된 이유가 바로 이런 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 - 한 5~6년 전부터 - 한국 소설은 확실히 달라지고 있는데, 여기에는 여성 작가들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이번 현대 문학상 수상 소설집만 하더라도 수상작뿐 아니라 수상 후보작이 모두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남성은 정영수 작가 딱 한 명. 예전에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주로 내면세계 탐구에 치중한다는 비판이 많았는데, 요즘은 완전 반대이다. 남성들이 자아탐구, 인물의 내면세계, 사랑과 낭만을 논하는 사이 여성들은 너무도 치열히 세계를 응시하고 사회적 이슈를 다룬다. 이 차이가 굉장히 주목할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책에 실린 작품 중에서는 최진영 작가의 <돌담>이 가장 좋았다.
3. 슬픔
수상작 및 수상 후보 작품들 외에도 역대 수상작가의 최근 작품 세 편도 함께 실려있었다. 김성중, 윤대녕, 이승우. 윤대녕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는 아무런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서 조금은 슬프기까지 했다. 뭐랄까, 예술적인 재능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낡는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에? 혹은 그 두 명이 유독 그럴 수도 있고. 하여간 반짝거리던 것이 점차 그 빛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슬프다. 그게 무엇이든.
⭐️⭐️⭐️
상담사는 내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지금도 논리적으로 말하려고 애쓰고 있네요. 그냥 말해도 돼요.
(...)
나는 상담사에게 대답했다.
(나는 발가벗겨진 채 사진을 찍혔고) 그때 죽었어요. -p.32, 박민정, 모르그 디오라마
그때 내가 무엇을 피하려고 했는지 이제는 안다. 수치심이었다. 내가 어떨 때 거짓말하는 인간인지, 무엇을 부끄러워하고 무엇에서 도망치는 인간인지 생각하기 싫었다. 그런 나를 내게서 빼고 싶었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더 잊으려고 했다. 결국 나는 나쁜 것을 나누며 먹고사는 어른이 되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괜찮겠지, 괜찮겠지, 아직은 괜찮겠지, 기만하는 수법에 익숙해져 버린 형편없는 어른. -p.226, 최진영, 돌담
나는 뱉어졌다. 나도 처음부터 뼈는 아니었다. 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의 살이 되고 싶었나? 아니, 절대 아니야. 그럼 뭐가 되고 싶었지? 모르겠다. 더 나빠지고 싶지 않다. -p.227, 최진영, 돌담